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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해방군 첫 조선족 상장 조남기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05.21일 09:41
대형계렬기획보도-《중국조선족 백년백인》(19)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임 부주석 조남기는 우리 나라 정계의 조선족 최고위급간부이자 중국인민해방군 첫 조선족상장이다.

조남기는 1927년 4월 20일,조선 충청북도 청원군의 한 농민가정의 넷째로 태여났다. 남기란 이름은 조선의 저명한 학자이며 애국지사인 그의 할아버지 조동식이 지어줬다. 조남기의 할아버지는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후 문화계몽운동 열성자의 일원이였으며 1919년 《3.1》반일애국운동때 청원군 반일봉기조직자의 한사람이였다. 1940년초 조남기는 가족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길림성 영길현 차로하로 이주해왔다. 그곳에서 그는 못 다 마친 소학교 공부를 마쳤다. 중학교에 가고싶었지만 가정형편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얼마후에 차로하진상업련합사에 들어가 점원으로 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투항하자 동북지구는 무정부상태에 처하여 사회질서가 아주 혼란스러웠다.조남기가 살던 차로하진도 늘 토비와 강도들이 나타나서 당지의 조선족군중들을 괴롭혔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을 보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100여명의 자위대를 조직했다. 길림해방동맹회에 가입한 조남기는 자위대의 조직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을뿐만아니라 책임자직무를 맡았다. 이때 동북민주련군이 이 지방에 들어왔다. 조남기는 차로하진 조선족군중들을 동원하여 집집마다 쌀을 거둬 민주련군을 지원했는데 석달도 안돼 25만근이나 되는 입쌀을 보냈다. 이 일은 길림지구에서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조남기도 이때로부터 각급 조직에서 주목하는 청년으로 되였다.

1946년말, 중공길림성위에서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에 가서 민중운동 공작대원을 선발, 천여명의 학생중에서 조남기는 학습성적이 우수했을뿐만아니라 한어수준도 조선족학생중에서 으뜸으로 최종 선발된 5명중의 한사람으로 뽑혔다. 연변에 파견된 조남기는 기관에서 몇명 안되는 나젊은 조선족간부중의 한사람이였으며 모든 일에서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요구를 제기했고 맡겨진 과업을 당지의 실제와 결합하면서 독보적으로 훌륭히 완수해나갔다. 그후 조남기는 길림성당위 정책연구실에 전근되였으며 부서에서 가장 나젊은 정책연구원으로 됐다.

1950년 《6.25》조선전쟁이 발발하자 조남기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작전처에서 참모로 있으면서 팽덕회사령원의 신변에서 빈틈없이 사업하였다. 1951년 여름, 조남기는 지원군 부사령원 홍학지장군의 명령을 받들고 작전처에서 지원군 후방근무사령부로 옮겨와 자동차운수조직 총지령원이라는 낯선 임무를 맡았다. 난생 처음으로 자동차운수라는 과업과 접촉하게 된 그의 앞에는 곤난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당시 지원군앞에 놓인 가장 큰 난제중의 하나가 바로 군수물자의 운송이였다.

조남기는 세밀한 조사와 심사숙고를 거쳐 《단거리로 넘겨주는》 릴레이식 운수방법을 고안해냈다. 비상시기에 조남기가 《발명》한 이 운수방법은 놀라운 효과를 발생했는바 처음에 군수물자를 30%정도밖에 보장하지 못하던데로부터 얼마후에는 60%로, 8개월후에는 100%로 보장하는 기적같은 성과를 올렸다. 조남기는 조선전쟁에서 무수한 곤난을 겪었고 또 그 곤난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허다한 기적들을 창조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과시했다.

유엔 과학과 평화주간 중국조직위원회 상임부주임

리현덕(조선족)으로부터 사업회보를 듣고있는 조남기장군(오른쪽).

1959년 조남기는 연변군분구 정치부 부주임으로 임명되며 후에는 선후로 군분구 주임, 부정치위원, 정치위원을 맡고 10년동안 연변에서 사업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후 1967년 11월, 조남기는 격리심사를 당하고 그와 가족은 온갖 박해를 당했다.

1972년 4월,심사를 끝마친 조남기는 새롭게 사업에 참가했다. 1978년 조남기는 길림성군구 부정치위원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서기 겸 연변군분구 제1정치위원으로 임명되였다.새로운 사업이 또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혁명에 참가한 후 조남기는 선후로 세번이나 연변에서 사업한 경험이 있었기때문에 연변의 상황을 손금보듯 환히 장악하고있었다. 그는 연변의 경제가 하루속히 발전하려면 반드시 현실에 립각해 대담히 개척창신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그것은 바로 지방자치조례부터 제정해 법에 의거해 연변의 경제사회발전을 가져오는것이였다. 1979년 조남기의 제의하에 드디여 《연변조선족자치주자치조례》가 제정됐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전국의 여러 민족자치지방가운데서 제일 처음으로 자치법을 세운 곳으로 되였다. 조남기는 이어서 또 《연변조선족자치주림업관리조례》를 제정하였으며 연변의 경제구조에 대해 전면적인 조절을 진행했다.

1983년 3월,조남기는 5년동안 사업한 연변을 떠나 길림성당위 부서기로, 그후에는 길림성군구 정치위원으로 임명되면서 1985년 길림성을 떠나 해방군 총후근부로 갈 때까지 사업의 수요로 계속 길림성당위에서 서기직무를 맡으면서 동시에 전 성의 농업까지 겸해 관리하였다. 그가 농업을 주관하는 기간 길림성의 농업은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는바 1984년 전 성의 농업 총 수확고는 처음으로 300억근을 돌파했다. 이는 16년이나 앞당겨 원경목표를 실현한 셈으로 된다.

1987년 11월, 조남기는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해방군 총후근부 부장으로 임명되였으며 1988년에는 중앙군위로부터 상장계급을 수여받았다. 그는 주둔환경이 어렵고 힘든 부대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돌렸는데 임기내에 신강과 서장에 주둔하는 부대에서 꼭 물기가 없는 마른 남새를 먹는 력사를 결속지으리라 결심하였다.조남기장군은 매번 후근부장회의가 열릴 때마다 신강, 서장 두 군구의 책임자를 특별히 찾아 부대의 부식품공급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토론했다. 1992년 10월, 조남기가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 원장으로 떠날 때 신강과 서장의 높고 추운 지대에 주둔하고있는 부대에서는 남새와 고기, 계란을 공급하는 문제가 뚜렷한 개선을 가져왔다.

1998년 3월,조남기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9기 1차 회의에서 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정협부주석으로 당선된 후 그는 혁명사업에 참가해서부터 몸에 배인 오랜 습관ㅡ심사숙고와 심입되는 조사연구를 거쳐 사업의 중점을 우리 나라 수토류실을 방지하고 사막화를 퇴치하며 삼림을 보호하고 생태환경을 개선하는데 두기로 하였다.

1999년 조남기의 제의로 전국정협, 전국록화위원회, 국가림업국, 국가라지오텔레비죤영화총국, 중국록화기금회, 중화전국신문사업일군협회에서는 공동으로 《삼림을 관심하자》는 조직위원회를 설립하고 그가 친히 주임책임을 맡았다. 2003년 전국정협 리서환주석은 이 활동표창대회에서 조남기부주석을 《당신은 력사에 영원히 남을 아주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혁명사업의 제1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조남기장군은 86세의 고령인 오늘까지 사회에서 여러가지 직책을 맡고있다. 비록 직무가 변했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진실하고 실사구시하며 개척과 혁신의 정신으로 사업을 밀고나가는 그의 일본새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오늘도 그는 아름다운 석양을 불태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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