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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兎死狗烹” - 중국 정치사에서의 循環律 /김관웅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08.14일 12:45
김관웅

목록:

1. 프롤로그-사적(史籍)으로부터 본 “구팽(狗烹)의 래원

2. 중국 고대 정치사에서의 순환률 - "구팽(狗烹) "

3. 중국 당대 정치사에서도 “구팽(狗烹)”의 순환률은 계속 되었는가?

4. 에필로그- 정치문화는 절대 력사를 초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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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사적(史籍)으로부터 본 “구팽(狗烹)의 래원



사마천의 《사기․ 월세가(史記 ․ 越世家)》에는 “하늘의 새를 다 잡으니 활을 숨겨두고, 토끼를 다 잡으니 토끼를 잡을 때 데리고 다니던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飛鳥盡, 良弓藏; 狡兎死, 走狗烹)” 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담겨있다.

춘추 말 월나라의 왕 구천(勾踐, 기원전 497-기원전 465)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하면서 대부(大夫) 문종(文種)과 범려(範蠡)를 등용하여 국정을 정돈하고 10년 동안 국력을 키워서 끝내 오(吳)나라를 격파하고 설욕했다. 오왕 부차(夫差)는 도주하면서 일곱 번이나 월나라에 거듭거듭 평화를 구걸했으나 문종과 범려는 견결히 응낙하지 않았다. 부차는 부득이 편지 한통을 화살에 매달아 범려의 병영에로 날렸다.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다.

“토끼를 다 잡으면 토끼를 쫓던 사냥개는 쓸모가 없으니 잡아먹게 되는 법이요, 적국을 멸망시킨 뒤에는 계책을 대주던 모사는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게 되는 법이니라. 두 대부는 왜 오나라를 살려둠으로써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살릴 여지를 남겨두려 하지 않는가?”

오왕(吳王) 부차는 자기가 바로 이렇게 하여 왔으니 이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은 진실한 말이였다. 하지만 문종과 범려는 그래도 강화(講和)할 것을 거절하자 오왕 부차(夫差)는 검으로 자살하였다.

월왕(越王)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한 뒤 오나라의 궁전에서 큰 연회를 베풀어 뭇 공신들을 위로하였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범려가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태호가에서 범려의 겉옷을 발견하자 사람들은 범려가 물에 빠져 죽은 줄로 알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어떤 사람이 문종한테 편지 한통을 전해주었는데 그 편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하늘의 새를 다 잡으니 활을 숨겨두고, 토끼를 다 잡으니 토끼를 쫓던 사냥개는 잡아먹는 법입니다.(飛鳥盡, 良弓藏; 狡兎死, 走狗烹) 적국을 파했으니 모사들은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게 되는 법입니다. 월왕의 위인을 보면 그 사람과는 환난은 같이 할 수 있으나 향락은 같이 누릴 수 없습니다. 대부께서는 지금도 월왕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으니 미구에 살신지화(殺身之禍)가 있을 겁니다.”

문종은 그제야 비로소 범려가 죽지 않고 어느 곳에 숨어 살고 있음을 알게 되였다. 문종은 범려의 말을 다는 믿지 않았으나 그래도 마음속에 걸리는 데가 있으므로 이때로부터는 늘 병을 핑계로 조회(朝會)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날이 가고 달이 바뀜에 따라 구천은 문종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구천이 문종에 집을 찾아왔다가 작별할 때 패검(佩劍) 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는데, 문종은 검갑에 “속루(屬樓)”라는 두 글자가 아로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검은 바로 당년에 오나라 왕 부차가 충신 오자서(伍子胥)를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한 그 검이였다. 문종은 구천의 뜻을 알고 범려의 권고를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그 검으로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범려는 격류용퇴(激流勇退)의 모범으로 천추에 이름이 남았지만 문종은 벼슬에 련련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으로 지금가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2. 중국 고대 정치사에서의 순환률 - 구팽(狗烹)



이때로부터 “새를 다 잡으면 활을 숨겨두고,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 것(鳥盡弓藏, 兎死狗烹)”은 수천 년 중국 고대 정치사에서 거듭 재연되였던 순환률(循環律)로 되였다.

한신(韓信, ?-기원전 196년)은 류방(劉邦, )을 도와서 한나라를 세운 개국공신이였지만 나라를 세운 뒤에는 야망이 커져서 모반을 하다가 류방의 부인 려후(呂侯)에 의해 사살되지 않았던가. 한신처럼 모반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개국공신들은 어차피 룡상(龍床)에 오른 황제들에게는 껄끄러운 존재들이였다.

그래서 한 새로운 왕조가 기틀을 잡은 뒤에 황제가 가장 처리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자기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나라를 세웠던 공신(功臣)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그 방법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송태조(宋太祖)처럼 주연을 베풀어서 공신의 병권을 빼앗은 것이고, 한조 때의 광무제(光武帝)나 당태조(唐太祖), 당태종(唐太宗) 부자처럼 위협과 회유(懷柔)를 겸용하여 건국원훈(建國元勳)들을 손아귀에 틀어잡는 것이고, 셋째는 터무니없는 죄명을 들씌워하는 건국원훈들을 죽여 버리는 것이였다.

중국 고대 정치사에서 이 “구팽(狗烹)”이라는 순환률은 명태조 주원장(朱元章, )에 이르러서는 극치에 달했다. 주원장이 재위하고 있을 때, 절대 대부분 대신들은 주원장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으며 제명을 다 살 때가지 무사한 이들은 례외였다. 호유용(胡惟庸), 람옥(藍玉)과 같은 주원장이 직접 정한 “반국(叛國)사건”의 주요한 인물들이 멸족을 당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역모를 했다는 실중은 없었지만 주원장이 구실을 만들어 죽인 건국공신들인 리선장(李善長), 왕광양(王廣洋), 풍승(馮勝), 부우덕(傅友德), 료영충(廖永忠), 화운룡(華雲龍), 한정(韓政) 등은 멸족까지는 당하지 않았지만 사사(賜死)를 당했다.

야사(野史)들에는 명조 건국 당시의 으뜸가는 무장(武將) 서달(徐達)이 주원장에 의해 사사(賜死)를 당한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달이 등창이 났다는 소문을 들은 주원장은 찐 거위고기를 먹으면 병세가 더해진다는 말을 듣고 서달에게 찐 거위고기를 하사했다. 서달은 자손들을 념려하여 찐 거위고기를 가지고 온 사신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 거위고기를 다 먹었다. 물론 서달이 찐 거위고기를 먹어도 무사할 수 있었으나 주원장이 찐 거위고기를 하사한 것은 실제상에서는 사사(賜死)를 뜻하므로 서달은 어차피 주원장에 의해 죽음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자기 스스로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주원장은 등극한 후에 자기의 아들들을 왕으로 봉했다. 진왕(晉王)으로 봉해 진 주원장이 한 아들이 자기의 주방장을 채찍으로 후려갈겼다는 말을 듣고 주원장은 진왕을 호되게 꾸중했다고 한다.

“이 놈아 이 애비는 한 평생 말차 타고 전쟁터를 누비면서 수하의 장수들에게는 아주 엄했지만 주방장만은 질책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느니라”

우리는 주원장의 이 말을 자세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자기를 따라 남정북전하면서 생사고락을 같이 한 건국원훈들은 가차 없이 목을 베면서도 주방장한테는 왜 이처럼 인의(仁義)를 베풀었을까?

그것은 자기 수하의 공신들은 모두 정치적 야망이 있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여서 배에 탈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는 인물들이였기 때문에 은혜와 위협을 겸용해서 길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주방장은 정치적 야망이 없고 자기를 뒤집어엎으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였다. 그러므로 제왕으로서 주방장 같은 자기 수하의 심부름꾼들은 건국원훈들을 대하듯이 그렇게 잔혹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왕으로서 매일 국가대사로 하여 눈 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내다보니 음식기거 같은 일상생활에서는 바로 이런 자기 몸 가까이에 있는 심부름꾼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어루만지고 너그럽게 잘 대해 주지 않으면 음식에 비상이라도 친다면 방비를 할래야 할 수 없기 때문이였다.

3. 중국 당대 정치사에서도 “구팽(狗烹)”의 순환률은 계속 되였는가?

중국 당대 정치사에서 중국의 제1인자인 모택동에 의해 정치적으로 매장되고 육체적으로도 말살 당한 고위급간부들은 많지만 가장 억울한 두 사람을 들라면 아마도 시간 순서적으로 팽덕회와 류소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첫째, 천고기원(千古奇寃) - 팽덕회의 억울한 죽음

팽덕회“(彭德懷, 1898-1974)는 토지혁명시기,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 항미원조시기에 이르기까지 중국공산당 군대의 중요한 창건자의 한사람이고 중요한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서 남정북전하면서 새 중국의 창건을 위해 불후의 공훈을 세운 개국원훈(開國元勳)이다. 1956년에는 원수(元帥) 군함(軍銜)을 모택동으로부터 수여 받았고 그 순차는 10대 원수(元帥)들 중에서 주덕 버금이였다. 모택동은 일찍 토지혁명시기에 “누가 감히 칼을 휘두르며 말 타고 돌진하랴, 애오라지 우리 팽대장군뿐이리(誰敢橫刀立馬, 唯我彭大將軍)”이라고 팽덕회를 높이 칭찬했었다.

그러나 1959년 7월,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려산회의)에서 대약진, 인민공사화로 인한 급진적인 경제로선으로 인한 초래된 중국 성향(城鄕)의 경제적 파탄을 용감하게 제기하였다가 모택동의 노여움을 사서 “팽덕회반당집단”으로 몰림과 동시에 국방부장을 비롯한 모든 당, 군사, 행정 직무를 철소 당했다. 그러나 그 후의 실천은 팽덕회의 의견이 정확했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모택동은 기어이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았다. 1962년 1월, 북경에서 열렸던 7천인대회는 대약진, 인민공사화 운동 중에서 나타난 급진적인 과오를 시정하는 대회이였기에 모택동은 그 회의에서 대약진, 인민공사화 운동을 지도함에 있어서의 자신의 과오를 얼마간 인정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팽덕회 문제에 대해서만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팽덕회가 제기한 의견은 구체적인 일들에서는 사실에 부합되지만 “반당종파를 무은 문제”와 “외국과 내통한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기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시정해 줄 수 있지만 유독 팽덕회만은 시정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중상이였다.

1959년 7월 이후로부터 팽덕회는 16년 동안의 잔혹한 정치적 박해 속에서 8년 동안은 감옥에 갇혀 잔혹한 비판과 투쟁을 받았으며 부인마저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해 리혼하고 떠나 버렸다.

개국공신 팽덕회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모택동은 당장에도, 헌법에도 부합되지 않게 처사했다. 설상가상으로 “문화대혁명”중에서 림표, 4인방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외국과 내통했다”는 죄명을 들씌워 죽을 때까지 팽덕회를 풀어주지 않고 숨통을 옥죄였다.《풍우팽문(風雨彭門)》(문예출판사)에 의하면 팽덕회는 직장암에 걸려서도 ”나는 다만 내 정치문제를 똑바로 해명해 줄 것을 바랄뿐이다. 나의 ‘정치병’을 치료해 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1974년 7월 21일, 해방군 301병원에서 의사들이 주사를 놓으려고 주사바늘을 잡아채여 던지면서 “나는 모택동의 약은 안 맞는다!“라고 소리를 질렀고, 음식물을 먹으라고 하면 ”나는 모택동의 밥은 안 먹는다!“고 하면서 사발을 손으로 뿌리쳤다고 한다.

1974년 11월 29일, 팽덕회는 직장암으로 처참하게 목숨을 거두었고, 태평방에서 18일 동안 랭장되였던 팽덕회의 시체는 화장을 하였는데, 모든 것은 비밀리에 진행되여 현장에는 단 한 명의 친척이나 동지와 벗들도 없었다고 한다. 기가 막힌 것은 화장비용마저도 팽덕회의 쥐꼬리만한 옥중 생활비에서 지불되였다고 한다.

둘째, 중국공산당 력사에서 가장 억울한 “류소기사건”

류소기(1898-1969)는 팽덕회와 마찬가지로 모택동과는 호남(湖南) 동향(同鄕)이며, 중국공산당의 가장 오랜 원로 중의 한 사람으로서 194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당내에서 모택동의 버금으로 가는 제2인자였다. 그러나 정계에서 제2인자는 종래로 비극적인 배역을 담당하여 왔음은 중국의 정치사가 립증해 준다.

장기간의 중국공산당내의 로선투쟁 중에서 류소기는 언제나 모택동의 편에 서서 모택동의 립지를 굳혀주었다. 1935년 장정이 끝난 후 모택동과 장국도의 투쟁 중에서 류소기는 견결히 모택동의 편에 서서 장국도를 밀어내고 모택동의 당내에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40대 초반에 있었던 연안정풍 시기에도 류소기는 진백달, 호교목, 팽진, 륙정일, 주양 등과 더불어 모택동이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였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코 첫 손가락에 꼽혔다. 류소기는 또 1945년 중국공산당 제7차대표대회에서 제일 처음으로 “모택동사상”을 제기한 사람이기도 한데, 다음은 7차대회에서 류소기가 한 말이다.

“우리의 위대한 령수 모택동은 이미 그이의 사상으로 우리 전 민족의 사상을 전례 없는 높이에로 올려놓았다. 이것이 바로 모택동사상이다.”

이처럼 류소기는 당내에서의 모택동의 절대적 권위를 수립하는 면에서 커다란 기여를 한 사람이다. 바로 그러했기에 류소기는 제7차대회 이후부터 모택동의 커다란 신임을 받았고 50년대 후반까지도 모택동의 가장 신임을 받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모택동은 바로 이런 신임을 토대로 하여 류소기를 자기의 계승자로 지목하였다. 1950년대 말, 영국의 원수 몽고메리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누가 당신의 계승자입니까?”하고 모택동에게 물었을 때 모택동은 “아주 명확합니다. 바로 그 사람(류소기)입니다. 그 사람은 당의 제1부주석입니다. 내가 죽은 후에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명쾌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약진, 인민공사화 운동이 실패한 후 모택동과 류소기의 관계는 미묘해지고 차츰 버성겨지기 시작했다. 1960년, 모택동은 자기가 발동한 대약진, 인민공사운동의 실패로 하여 자기는 부득이 제2선으로 물러나고 류소기가 제1선에서 중국을 경제건설을 이끌어가게 되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직위를 양도하여 나라의 경영을 류소기에게 맡기게 되였다. 1960년, 류소기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직무를 넘겨받은 바로 이튿날 《인민일보》에는 모택동과 류소기의 커다란 사진이 나란히 제1면 톱에 실렸다.

중국에는 “산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있을 수 없고, 하늘에는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고훈(古訓)이 전해져 내려왔다. 한고조(漢高祖)시절의 재상 장량(張良)처럼 제2인자는 언제나 제2인자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제1인자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였지만 류소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또 그래서 죽음을 자초했던 것이다.

1962년 1월에 북경에서 열렸던 7천인대회에서 류소기는 대약진, 인민공사화의 실패를 “3할의 천재(天災)에 7할의 인재(人災)”라고 총결하였다. 이 말은 대약진, 인민공사화의 실패로 하여 자존심이 크게 자극을 받은 모택동에게 있어서는 마치도 아픈 상처에 소금가루를 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로부터 모택동은 류소기를 잘못 보기 시작했으며 실제상에서 모택동과 류소기의 치당(治黨), 치국(治國)의 총적 로선과 방략은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류소기와 기타 다른 정치국위원들이 동의한, 농촌에서 땅을 농호에 떼여 맡기는 호도거리 정책에 대해서 모택동은 견결히 반대했고, 사청(四淸)운동에서 중국의 농촌과 도시에서의 모순을 파악하는 면에서도 량자 사이에는 커다란 편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로부터 모택동은 후일에 미국기자 스노와의 담화에서 솔직하게 회고한 것처럼 류소기를 자기의 가장 큰 적수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정치상에서 없애 버리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자기가 지목했던 계승자인 류소기를 “우리들의 곁에서 잠자고 있는 흐르쇼브”, “중국에서 제일 큰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로 보기 시작했으며, 류소기를 타도하기 위해전 중국의 수억 인민대중을 동원한 “문화대혁명”이란 전대미문의 당내의 계급투쟁을 발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류소기는 모택동이 1965년부터 문화대혁명을 발동하기 위해 상해에서 요문원을 시켜 《신편 력사극 〈해서파직〉을 론함》을 발표해도 자기를 겨냥하고 하는 짓이라는 것을 몰랐고, 심지어 1966년 모택동이 “사령부를 포격하자”는 척 장의 대표보라면 직접 류소기를 겨냥한 글을 발표했을 때까지도 “정치적으로 자기를 없애치우려고 하는” 모택동의 진정한 동기를 몰랐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벌써 류소기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나서 부인 왕광미는 홍위병들의 갖은 모욕을 당하다가 루에는 진성감옥에 갇혀서 12동안이나 옥살이를 하고 얼없는 자식들마저도 중남해에서 쫓겨나 헤맸다. “문화대혁명”중에서 류소기네 가정에서는 4명이 목숨을 잃었고, 6명이 옥살이를 하였다. 류소기는 1969년 8기 12중 전회에서 “반역자, 내부간첩, 공인역적”이란 억울한 죄명을 쓰고 “영원히 당적을 철소당하고 당내의 모든 직무를 철소당하고 만다.”

잔혹한 비판과 투쟁을 당하면서 류소기의 육체는 형편없이 망가졌고 생명이 경각이 달린 류소기는 림표의 “제1호 소산(疏散) 명령”으로 1969년 11월에 하남성 개봉으로 옮겨졌고 거기에서 한 마리의 개만도 못하게 처참하게 죽어갔다.

물론 이러한 구팽(狗烹)에 대해 중국의 고위급간부들이 모두 “나 잡아 잡수” 하고 순순하게 목을 들이대고 있은 것만은 아니였다. 그 단적인 사례를 문화대혁명이 가장 치열했던 1967년 2월에 일어났던 이른바 “2월역류(二月逆流)”를 들 수 있다. 1967년 2월 16일, 중남해 회인당에서 중앙 고위급 간부회의가 열렸는데, 이 날 회의에서 진의, 염검영, 서향전, 리부춘, 리선념, 담진림, 여추리 등 로일대의 건국원훈들은 장춘교, 요문원, 사부치, 왕력 등 중앙문혁소조의 “좌파”들과 날카로운 설전(舌戰)을 벌렸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떨쳐나선 국무원 부총리 담진림(譚震林, 1902-1983)의 용기는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담진림은 “문화혁명”중에서 “개국원훈”들을 비롯한 수많은 로간부들을 타도하는 문호혁명에 대해 여지없이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책상을 치면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냥 할라면 너희들이나 해라. 나는 안 하겠다! 머리가 잘리고. 옥살이를 하고, 당적을 철소당할 지라도 난 너희들과 끝까지 싸우겠다. ……난 일생 동안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첫째는 오늘까지 살지를 말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모택동을 따라 혁명을 한 것이다. 셋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것이다……”

격노한 담진림의 이 말은 구팽(狗烹)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였다. 모택동은 중노난범(衆怒難犯)이라고 여러 건국원훈들이 격노하는 데는 섣불리 일망타진을 할 수는 없어서 중용적인 립장을 취했다. 그러므로 이른바 “2월역류”의 주요한 멤버들을 류소기를 타도하듯이 그렇게 잔혹하게는 처리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부정하는 것만은 용허하지를 않았다. 만일 그때 담진림이나 진의(陳毅) 같은 개국원훈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리고 좀 더 깊이 파악했더라도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10년이나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4. 에필로그- 정치문화는 절대 력사를 초월할 수 없다

영국의 저명한 박물학자이며 진화론의 선구자인 다윈은 그의 일기에서 자기가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우둔한 일”을 했음을 기록한 바 있다.

19세기 중엽, 다윈은 세계일주를 하다가 아프리카에서 한 원시부락을 발견했다. 이 부락의 원시인들은 산속 동굴 속에서 살면서 풍 뿌리나 캐어 먹거나 들판의 열매를 따 먹거나 야수를 사냥해서 연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여 먹을 것을 찾을 수 없게 된 경우에는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병이나 잔폐가 있는 사람들을 잡아서 나누어 먹었다. 그 리유는 잡아먹는 사람들은 일한 능력을 상실해 모두 쓸 모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였다.

세계가 이미 문명시대에 들어섰는데 이 부락의 사람들은 이처럼 야만스럽고 잔인한 것을 보고 다윈은 너무나 한심한 나머지 꼭 무슨 방법을 대여 이 부락의 사람들을 개조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다윈은 많은 물건을 주고 당지의 한 사내애를 사서는 그 애를 영국으로 데려와 현대문명의 교육방식으로 이 아프리카 혈통의 사내애를 “문명인”으로 교육해내려고 생각하였다. 그런 다음에 다시 이 “문명인”으로 그의 고향의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食人)의 악습을 개조하려고 궁리했던 것이다. 16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 이 사내애는 “문명한 청년”으로 자라났고 다윈은 잘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그 사내애를 아프리카로 돌려보냈다.

1년이 지난 뒤, 다윈은 다시 아프리카에 가서 17년 후의 원시부락에 얼마나 변화가 생겼는가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그 “문명한 청년”이 보이지 않으니 그 영문을 물었더니 당지의 토착민들은 다윈에게 자기들은 그 청년을 잡아먹었다고 알려주었다. 다윈이 크게 놀라서 “그렇게 착한 젊은이를 왜 잡아먹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 젊은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 남겨두어서 뭘 하는가?”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윈은 비록 위대한 진화론자이지만 가장 치마의 진화의 법칙마저도 위배했던 것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부락을 아주 짧은 동안에 고도의 문명사회로 전변시킨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야만 사회로부터 문명사회에로의 진화하는 과정 중에는 필연적으로 장구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며 한 사람이나 몇 사람의 “문명인”으로 그 전변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인류의 진화도 바로 이러하니 이것을 널리 다른 분야에가지 미루어서 생각해 본다면 그 어느 일인들 이러한 진화의 법칙을 떠날 수 있으랴?

정치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정치문화는 절대 력사를 초월할 수 없다!

1949년 중공중앙 제7기 2중 전회에서 농민봉기군의 두령인 리자성의 전철을 밟지 말자면서 자성, 자률 의식을 높이자고 그렇게 경각성을 높였던 모택동이였건만 해방 후의 만년에 전제주의와 개인숭배, 개인미신 그리고 이로 인해 파생되는 장기집권의 블랙홀에서 스스로 헤여 나오지 못한 것은 모택동 개인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전당, 전국의 비극이기도 하며 나아가서는 전반 중국문화의 비극이기도 하였다. 개인숭배, 개인미신, 장기집권이라는 이 다분히 봉건적 요소를 갖고 있는 정치문화는 필연적으로 “구팽(狗烹)”이라는 이 중국 고대 정치사에서의 순환률이 중국 당대 정치사(政治史)에서도 계속 재현될 수 있는 제도적인 토양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해방 후 바로 이런 굽은 길을 오래 동안 걸었기에 지금은 그 경험교훈을 총화하여 다시는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개혁개방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고, 중국공산당은 수령의 종신제를 타파하고 정기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해주고 중국공산당 최고 결책 층에서는 집체령도를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점차 “구팽(狗烹)이라는 이 몇 년 동안 지속되여 왔던 순환률에서 벗어나고 있다.

《로자(老子)》에서 “복속에 화가 숨어있고 화속에 복이 숨어 있다”고 한 말은 천고불변(千古不變)의 진리임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요즘이다.

2009년 2월 13일 장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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