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 빗장 풀리자 '검은돈' 대이동]
정치 안정되고 법 집행 엄격… 투자자 개인정보 철저히 보호
스위스 정부가 금융비밀보호법 개정 방침을 밝히고 유럽 국가들이 해외 계좌를 타깃으로 탈세와 전쟁에 나서면서 '검은돈'의 대이동이 시작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지난 31일 보고서에서 공식 확인된 2012년 역외자산(법적 거주지 또는 납세 거주지 이외 지역에 등록한 자산) 규모가 전년보다 6.1% 늘어난 8조5000억달러(약 9600조원)라고 발표했다. 전 세계 역외자산의 25%인 2조2000억달러(2500조원)가 스위스 비밀계좌에 묻혀 있다. 하지만 스위스의 비밀주의 빗장이 풀리면 이 돈은 새 피난처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영국 런던의 리서치회사인 '웰스 인사이트'는 2020년에 싱가포르가 스위스를 제치고 세계 최대 역외자산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싱가포르는 역외자산을 포함해 고액 예금자의 자산을 관리해주는 프라이빗뱅킹(PB) 규모가 2000년 500억달러(57조원)에서 2011년 5500억달러(620조원)로 11배 늘었으며, 앞으로 더 급격히 성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반면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역외자산은 2016년 현재 규모의 3분의 1 정도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수퍼 리치(최상위 부자)들이 싱가포르를 스위스를 대신한 조세 피난처(tax haven)로 주목하는 것은 정치가 안정적이고 법 체계가 투명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리콴유 전 총리가 약 25년간 통치한 데 이어, 그의 아들인 리셴룽 총리가 2004년부터 집권하고 있다. 정권 교체에 따른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의 가능성이 그만큼 작다. 또 싱가포르는 엄격한 법 집행으로 유명하다. 싱가포르는 합법적 투자자의 개인정보는 철저히 보호한다. 조세 회피 목적의 기업 설립과 차명 계좌도 허용한다. 또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도 유럽 투자자에겐 큰 장점이다.
최근엔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부호들이 급증한 것도 싱가포르가 조세 피난처의 중심으로 떠오른 이유 중 하나다. 최근 보스턴컨설팅이 발표한 국가별 백만장자(자산 100만달러 이상) 가구 수는 미국(590만), 일본(150만), 중국(130만) 순이었다. 올해는 중국이 일본을 능가할 전망이다. CNN 방송은 중국과 인도, 인도네시아에서 백만장자가 증가하면서 아시아의 조세 피난처로 자금이 움직인다고 보도했다. 이탈리아 투자회사인 메디오방카의 금융 분석가인 크리스 휘슬러는 "비밀주의 측면에서 스위스가 가진 많은 장점이 줄어든 반면, 싱가포르는 아시아 개인 자산가의 욕구를 잘 맞춰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싱가포르도 법률상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이 범죄 수사를 이유로 투자자의 정보를 요구할 경우 이를 제공해야 한다. 이 때문에 불법 자금은 미국·유럽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러시아 등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분석도 나온다.
[파리=이성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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