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침대에 누워 TV 채널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눈이 확 뜨이는 장면에 리모컨을 쥔 손에 땀이 배었다. 금발의 미녀가 식칼로 튼튼한 무쇠 자물통을 거뜬하게 잘라 버리는 것이 아닌가? 단단한 호박도 잘라 버리고, 두꺼운 책도 썰어 버리고, 심지어는 다른 칼까지 두 동강 내 버리는 놀라운 광경에 서커스단의 차력 시범을 보는 코흘리개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망치로 꽝꽝 내려쳐도 끄덕없는 내구성에 고교 공업수업 시간에도 미처 들어보지 못했던 스테인리스 고탄소 특수강 재질, 거기에 살풍경한 칼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화사한 장미 문양까지….
'켈트족의 청년 백수'였던 아더가 명검 '엑스칼리버'를 손에 넣은 뒤 기사도의 전설이 된 것처럼, 저 칼만 있으면 볕 들 날 없는 따분하고 칙칙한 일상도 보기 좋게 일도양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지금 주문하면 감자 껍질 벗기는 칼까지 포함한 4종 세트를 믿을 수 없는 가격 3만 9천800원에 특별히 모신다고 하지 않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앞뒤 보지 말고 그냥 질러라.' '지름신'의 거역할 수 없는 강림에 리모컨을 놓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며칠 뒤 경비실에서 물건을 받아 왔다. 햄을 잘라 보고, 사과를 깎아 보고, 더 자를 게 없어 휴지통에 있던 애먼 맥주캔까지 썰어 보다 더 이상 '위력 시위'를 해 볼 곳이 없어 싱크대 서랍에 고이 모셨다. 기껏해야 라면에 계란 프라이 정도 부쳐 먹는 단출한 요리 인생에 이 칼을 더 쓸 일이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 닭 잡을 일에 '소 잡는 칼'을 사온 격이다.
집을 둘러보니 그동안 참 많은 '잉여 제품'들을 사들여 놨다. 바닥 걸레질을 하듯 기구를 잡고 앞뒤로 몸을 당기는 복근 단련기구가 자동으로 몸을 일으켜 주는 탄성 복근 운동기 밑에 먼지를 덮어 쓰고 있다.
남자의 품격을 한껏 살려 준다는 명품 재킷 3종세트는 홈쇼핑 광고 당시 매진 임박 순이었던 흑색, 남색, 갈색순으로 옷장에 걸려 있다.
목욕탕의 반신욕 욕조는 청소도구 용기로 제2의 생을 살고 있다. 냉장고에는 탈북 연예인이 목숨을 걸고 갖고 내려 왔다는, 고향의 비법이 담긴 갈비세트와 49년 간잽이 명인이 '한 땀 한 땀' 소금간을 쳤다는 안동 간고등어 팩들이 동거 중이다.
지금 꼭 필요한 것인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인가, 오로지 내 선택에 의해 구매하는 것인가를 자문하자고 매번 다짐하지만, 주변에 타박할 이 없으니 이놈의 폭주를 막을 수가 없다.
그래도 물건을 주문한 뒤 택배가 도착할 때까지 하루하루의 그 설렘만 한, 기분 좋은 자극이 없어서 상품을 사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을 사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박태우 기자 widene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