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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모택동” 유감(有感)/조성일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08.14일 12:55
조성일

우리 문단의 원로 작가 리홍규선생은 연변단풍수필회 회원 수필집 《단풍잎》(2008년 6호)에 “위대한 모택동”이란 글을 발표하였고 그 전에 “진심으로의 충고”란 글(2006년 2월 작)을 “단풍잎”(4호,2006년 8월 출판)에 발표하였다.



필자는 이 글들을 정독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정독한 뒤 여러모로 생각을 굴려보았다. 리홍규선생께서 이 글을 빌어 펴낸 견해에 대해서 필자는 동의되는 점도 있지만 동의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필자의 선배님, 우리 문단의 원로작가가 쓰신 만년의 글인데 후배로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경거망동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필을 들지 않기로 하였다. 이런 처사가 옳을까? 필자는 몇 달 동안 고민하였다. 거듭된 고민 끝에 이 문제에 한해서 침묵을 지키거나 도외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껴져 선배님과 상의하고 싶은 마음에서 드디어 오늘 필을 들게 되였다.

모택동은 “종규(钟馗)”가 아니다



중국 사자성어에 “차조종규(借助锺馗)”라는 말이 있다.

종규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인물이다. 《몽계필담(夢溪筆談)》 에 의하면 종규는 당(唐)나라시기의 사람으로서 과거에 락방하였는데 죽은 후 당현종(唐玄宗)의 꿈에 나타나 천하의 요귀들을 없애 버리겠다고 하였다. 잠을 깬 현종은 화공 오도자를 시켜 종규의 화상을 그리게 하여 그것을 궁중에 걸어 놓았는데 그 때부터 종규를 문지키는 귀신으로 간주하여 민간에서도 그의 화상을 문에 붙였다 한다. 이 성어는 다른 사람의 명의와 위풍을 빌어 사악한 것을 누름을 비겨 이르는 말이다. 또한 이 성어는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성어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즉 남의 위풍을 빌어 자신의 이미지를 아름답게 장식해 보려는 사람들의 얄팍한 심사를 비꼬거나 풍자할 때도 쓴다.

리홍규선생은 “위대한 모택동”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1959년 후반기에 계급의 원쑤라는 영예스럽지 못한 감투를 쓰고 2년동안의 로동개조를 거친후 감투를 벗긴 했지만 그 후의 17년 동안 ‘감투를 벗은 우파’로 출판사, 5.7간부학교, 농촌과 공장으로 몰려다니다가 근 20년후인 1978년에 연길로 돌아왔을 때 나를 반갑게 맞아준 한 얼빤한 친구가 나의 귀에 입을 대고 ‘모택동은 정말 나쁜 놈이지?’하고 속삭이는 것이였다.

이 친구는 내가 근 20년 동안이나 ‘개조’를 당했으니 아마 립장과 관점이 달라져서 자기의 ‘동지’가 되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친구는 ‘항일간부’라고 우쭐대는 로간부의 한 사람이였다. 모택동에 대해서 이렇듯 악담을 한 사실을 보면 중국의 극히 작은 일부분인 연변땅의 일부 인테리들 가운데서도 일정한 사상혼란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에게 모주석에 대하여 악담을 했던 그 친구도 등소평의 말씀과 당중앙의 결의문을 읽었다면 꼭 자기 잘못을 느끼고 돌아섰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그는 진정한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본다”.

이 글에 따르면 “한 얼빤한 친구”-“ ‘항일간부’라고 우쭐대는 로간부의 한 사람”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모택동에 대해 “악담”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리선생은 이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히지 않았다. 오늘의 시점에서 필자가 이 말들을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그 “항일간부”가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타계하였는지? 이른바 모택동에 대한 “악담”은 리선생의 말씀대로 하면 누구도 모르게 “나의 귀에 입을 대고…속삭인”것인데 그 ”항일간부”가 정말 그렇게 말하였는지? 말했다면 어찌하여 일찍 적발하지 않고 3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적발하였는지? “항일간부”가 지금도 건재한다면 리선생의 적발을 두고 강 건너 불보듯 하지 않겠는데 그 “항일간부”가 이미 타계한 상황에서 적발한 것이 아닌지?

아무튼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리선생은 자기를 지난날 “우파”로 되여 17년 동안 “로동개조”를 하였지만 모택동에 대한 존경과 열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은 문인으로 내비치면서 또한 “항일간부”가 자기와는 “동지”관계가 아니며 립장과 견해도 다르다고 하면서 모택동의 위대함을 빌어 그 “항일간부”가 모택동에 대해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몰아부침과 아울러 그 “항일간부”에게 비판의 모닥불을 안기는 것은 어쩐지 바람직한 것 같지 않다. 만약 그 “항일간부”가 이미 타계한 상황에서 그랬다면 더욱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만일 정말로 진리기 있고, 용기가 있었다면 김학철옹의 생전에 이런 글을 써야 했을 게 아닌가?

또한 리선생님은 중앙의 다른 어른의 말을 빌어 “1957년의 반우파투쟁은 역시 긍정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필자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중국에 “인사출동(引蛇出洞)”이란 사자성어가 있는데 뱀을 굴 밖으로 유인해 냄을 이르는 말이다. 모택동은 바로 이 “인사출동”의 전술로 1957년에 “반우파투쟁”을 발동하여 무고한 지식인들을 탄압하였던 것이다. “반우파투쟁”에서 강박에 못 이겨 “우파”감투를 뒤집어 쓴 사람은 55만 2천여명이였다. 23년이 지나 당의 11기 3중전회결의 정신에 근거하여 다시 심사한 결과 진짜 우파분자는 원래의 중앙급 민주인사 5명뿐이고 55만 명은 억울하게 루명을 쓴 것으로 판명되여 명예를 회복하였다. 요즘은 중국의 제1호, 제2호 우파로 불리는 장백균(章伯鈞)과 라융기(羅隆基) 같은 모자를 벗지 못한 우파들에 대해서도 재평가를 하는 책들이 가득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김학철선생의 말처럼 "99.999%가 잘 못된 정치운동”인 “반우파투쟁”을 “긍정해야 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연변의 상황은 더욱 그러하다. 당중앙위원회 제11기3차전원회의 이후 이른바 “우파분자”로 몰아부쳤던 사람들의 진상을 재심사하고 정책을 시달한데 따르면 조선족 간부와 지식인들 가운데는 진짜 자산계급우파분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하기에 연변의 “반우파투쟁”은 그 무슨 “확대화”의 착오인 것이 아니라 100%로 잘못된 정치참안이였다. “반우파투쟁”은 그야말로 빈대 한두 마리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다 태운 우둔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김관웅교수). “반우파투쟁”을 몸소 겪은 또한 연변문예계 후기 ‘반우파투쟁”을 직접 지도한 적 있는 리선생께서는 상술한 상황을 잘 아시리라 믿는데 오늘에 이르러서까지도 “반우파투쟁”의 이른바 “정당성”을 비호해 나서는데 대해 필자로서는 리해가 가지 않는다.

우에서 언급한 “차조종규”의 성어가 시사하다시피 모택동의 위대함 및 다른 어른의 말씀을 빌어 이렇게 하는 것은 옳은 처사라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까놓고 말해서 모택동도 “문화대혁명”기간에 강청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기를 “종규”로 간주하는 것에 분노를 표한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모택동을 자기의 그릇된 사상과 행위를 변호하거나 덮어 감추는 방편이나 혹은 남을 제압하는 방편, 즉 귀신을 쫓는 종규(鐘馗)나 부적(符籍)같은 것으로 리용하던 문화대혁명 같은 시기는 이미 영영 지나가벼렸음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모택동은 위대하다

모택동은 위대한 력사인물이다. 중국 력사, 특히는 지난 한 세기의 중국 력사에서 중국의 운명을 결정한 3대 위인을 꼽으라면 바로 손중산, 모택동, 등소평이다. 그리고 지난 세기의 세계 력사에서도 모택동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인류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인들 중의 한분으로서 한 외국 지명인사가 말했듯이 “모주석이라는 인물을 빼놓고 20세기의 력사를 쓴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필자는 리횽규선생의 생각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20세기 초엽만해도 중국은 봉건주의와 제국주의 모순과 억압에 짓눌린, 볕하나 들지 않는 암울한 사회였다. 로신의 말을 빌면 바로 “사람을 잡아먹는사회”였다. 따라서 19세기 중반-20세기 초엽에 제기된 지상과제는 이런 낡은 사회, 반봉건 반식민지인 구중국을 개조하거나 뒤엎고 새 중국을 창건하는것이였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실패한 때로부터 중국의 선진분자들은 서방국가들로부터 진리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침략은 서방을 따라 배우려는 중국사람들의 미몽을 깨뜨려버렸다. 리상은 실현되지 않았으며 여러 차례의 분투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나라의 형편은 도탄 속에 빠졌으며 환경은 사람들을 살아갈 수 없게 하였다. 이처럼 나라와 민족이 생사존망에 처한 관건적시각에 로시아 10월혁명의 포성은 중국사람들에게 맑스-레닌주의를 가져다주었으며 중국공산당의 창건을 추동하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건된 후 중국을 구할 수 있는 혁명의 길을 모색하였으나 한동안 정확한 중국혁명의 길을 찾지 못했으며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제1차국내혁명전쟁도 장개석의 배반으로 하여 실패의 운명을 만구하지 못했다.

바로 이런 혁명의 저조기에 모택동은 교조주의적으로 도시에서의 폭동을 통한 정권탈취라는 레닌의 길을 걷지 않고 중국의 실정에 부합되는 농촌으로부터의 무장투쟁의 길을 개척하였다. 1927년 10월에 모택동은 새로 창건된 로농혁명군을 인솔하여 정강산에 올라가 중국 력사상 처음으로 농촌혁명근거지를 창설함으로써 혁명사업중심을 도시로부터 농촌에로 옮기고 농촌에서 혁명세력을 발전시키는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았다. 다시 말하면 모택동은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며 조건이 성숙된 때에 도시를 점령하고 무장으로 전국의 정권을 탈취하는 중국식길을 택하였다.

1935년 준의회의에서 좌경적인 그릇된 령도의 지배가 종식되고 모택동의 주장과 실천이 승리하고 모택동의 령도적지위가 확립됨에 따라 당과 홍군은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였고 장정을 승리적으로 완성하여 중국혁명의 새로운 고조를 맞이하게 되였다.

준의회의이후 모택동은 단결하여 항일하는 통일전선정책을 실시하고 “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중국인민을 항일민족혁명전쟁의 궤도에 끌어들였으며 8년동안의 피어린 싸움을 거쳐 항일전쟁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전취하도록 하였다.

모택동을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은 항일전쟁승리후의 국내외정세를 명석하게 예견하고 장개석-국민당과 결전할것을 자립 자주적으로 견결하고도 과단성 있게 결정함으로써 인민해방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전취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였다. 중국인민은 이때로부터 일떠섰으며 자기의 운명을 장악한 사회의 주인으로 되였다. 이것은 중국사회에서 일어난 천지개벽의 변화이며 수천 년의 중국력사발전 과정에서의 근본적인 전변이다. 모택동이 이끈 중국혁명은 그야말로 전세계의 구조를 뒤바꿔 놓은 력사적 사변이었다. 모택동은 인류 력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으며, 인류의 사유방식과 가치관, 세계관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실로 모택동은 중국혁명의 불멸의 기치였고 승리의 기치였다.

모택동은 완인(完人)이 아니다



“금무족적, 인무완인(金無足赤, 人無完人)”이라는 성구가 시사하듯이 세상에는 순수한 금이 없으며 완전무결한 사람이 없다. 모택동도 결코 례외가 아니다.

모택동은 위대한 력사인물이지만 신은 아니다. 그도 인간이였다. 인간으로서의 모택동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과정에서 적지 않은 오유를 범했다. 특히나 중국과 같은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진행한다는 것은 력사상 선례가 없는 일로서 모든 것은 탐색하면서 전진하여야 하였기에 실책을 더욱 피면하기 어려웠다.

모택동과 그 수하의 지도자들은 건국 전부터 사회주의에로 이행하기 위한 탐색을 진행하였다. 그것이 바로 중국에서의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는 두 걸음을 나누어 걸아야 한다는 구상이였다. 다시 말하면 우선 일정한 기간 내에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허용하는 신민주주의 단계를 거치되이 단계는 30년이 걸려야 하며 뒤이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 단계에로 이행해야 한다는 구상이였다. 이런 구상은 이미 모택동의 《신민주의론》(1940년), 《련합정부를 론함》(1945년) 등에서 보이며, 1949년 10월 건국 전후의 시기에도 모택동의 이런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1953년까지 신민주주의 단계를 거쳐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 점진적으로 과도해야 한다는 인식에서는 모택동과 류소기 이 두 당대의 령수인물은 완전히 같았다. 즉 너무 조급하게 과도를 하지 말고 신민주의의 질서를 공고히 하자는 것이였다.

그러나 1953년 이후로 모택동의 이런 구상은 급속하게 변하였다. 1953년 4월, 모택동은 "10년 내지 15년 혹은 보다 긴 시간 내에 국가의 공업화와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 공상업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를 기본 상에서 완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신민주의단계를 30년으로부터 절반 이상이나 단축시켰으며 나중의 실천가운데서 그 시간도 길다고 5,6년 사이에 급진적으로 완수하였으며 뒤이어 사회주의 건설에로 진입하였다. 일련의 승리와 송가 속에서 교만성과 자만심이 자라난 모택동은 주관적의도와 주관적노력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객관적 경제법칙을 홀시하면서 사회주의혁명과 건설 중의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려는 급진적인 좌경적오유를 범하게 되였다.

공업이 락후하고 농민이 많고 다민족의 중국에서 농업의 사회주의적개조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기에 총적 지도사상 면에서 조급히 성공하려 할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적극적이고도 온당하게 점진적으로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자기의 저작 "농업합작화문제에 관하여"와 후에 한 일련의 연설, 지시를 통해 농업합작화운동을 점진적으로 추진해 나가자고 주장한 등자회(鄧子恢)를 "포격(砲轟)"하였고, 조급정서를 반대하고 농업합작화운동을 천천히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우경"이요, "종발아낙네들의 걸음걸이"요 뭐요 하면서 비판하였다. 모택동의 절대적권위에 눌려 류소기, 주은래, 등소평을 비롯한 당중앙의 온건파들은 어쩔 수 없이 모택동의 주장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의 농업합작화와 인민공사화의 실천은 등자회(鄧子恢)의 주장이 백번 옳았음을 증명하였다.

경제사업에서의 모택동의 좌경적오유는 그 후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운동"에서 더욱더 발전되였다. 모택동은 "15년내에 영국을 따라잡는다"라는 구호아래 전개된 "대약진운동"에서 공업생산은 한해에 강철생산량을 배로 증가할것을 제기하였고 기타분야에서도 그 뒤를 따라 지표를 높임으로써 보편적으로 지표가 팽창되였다. 농업생산에서는 당시에 이미 생산량이 수배, 10몇배, 수십 배로 장성되였다고 단언하였다. 실제에 맞지 않는 이런 예견으로부터 출발하였기 때문에 "대약진운동"기간에 기본건설투자액이 거의 배나 늘어나고 종업원대오가 2,000여만 명으로 격증되여 나라의 힘에 부칠 정도에 달했다. 수천만의 농민들이 강철제련에 동원되였기 때문에 농업생산 제1선이 엄중하게 약화되였다. 그 결과 국민경제가 전면적으로 긴장해지고 비률관계가 엄중하게 파괴되였다.

모택동은 고급사가 농촌에서 미처 발을 붙이기도 전에 농촌생산합작조직이 이미 경제발전의 요구에 적응되지 않게 되였다고 단정하고 1958년에 즉시 "인민공사화운동"을 벌려 전국의 74만여 개 농업생산합작사를 2만 3,000여개 인민공사로 합병시켰다. 집단적소유로부터 전인민적소유에로의 이행이 아주 빨리 완수될 수 있으며 지어는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멀지 않아 실현된다고 하였다. 이로 하여 엄중한 평균주의가 나타났으며 로동에 의한 분배원칙이 파괴되였으며 사회경제의 정상적인 질서가 파괴되였다. 그리하여 생산관계의 각개 고리들 즉 생산, 분배, 교환, 소비가 혼란에 빠지고 수억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이 엄중하게 손상되였다.

이런 좌경적인 오유와 더불어 3년 재해가 들고 쏘련정부가 몇 백 개에 달하는 협의와 계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국민경제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의 기간에 엄중한 곤난에 봉착하였다. 관방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농업생산은1959년부터 연속 3년 동안 급격히 하강되였고 경공업도 1960년부터 련속 3년동안 절대적으로 하강되였으며 중공업은1960년까지 겨우 지탱하다가 1961년부터는 련속 2년 동안 대폭 하강되였다. 3년동안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운동"이 초래한 경제손실은 1,2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중국에서의 비정상 사망인수를 2,700만 명으로 보지만 중국에서는 1,700만 명으로 보아 나라와 백성들에 대한 피해는 엄청난 것이다. 이것은 "아비규환(阿鼻叫喚)" 의 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959년 7월에 팽덕회는 상술한 상황에 비추어 모택동에게 편지-"만언서(萬言書)"를 써서 실사구시적으로 1958년 이래의 좌경적오유를 시정할데 관한 의견을 제기하였다. 팽덕회는 이 편지에서 단순한 군중동원에 의해 추진되고있는 “대약진운동”은 실사구시의 정신에 맞지 않는, 열광으로 들떠 하루아침에 공산주의로 진입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좌’경사상은 철저히 극복되어야 하고 "대약진운동"도 하루빨리 개정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8년 동유럽을 순방한 팽덕회는 헝가리폭동은 반혁명분자가 군중의 불만정서를 리용한 점도 있지만 주요원인은 숙청의 확대와 경제사업의 "좌"경 로선에 있다고 진단했다. "적은 결코 무섭지 않다. 가장 무서운 것은 당의 로선이 부정확하고 당의 작풍이 군중을 리탈하는 것이다"라고 직언했다. 이는 모택동을 격노하게 했다. 모택동은 로산회의에서 팽덕회의 의견을 공개화시키고 첨예화시켜 이 편지는 우경기회주의분자가 당을 향해 창궐하게 진공하며 당의 권력을 찬탈하려고 시도하는 강령이라고 비판하였다. 동시에 그후에 소집된 당의 8기 8중 전회에서 "팽덕회 황극성, 장문천, 주소주반당집단"에 관한 그릇된 결의를 채택하였으며 팽덕회의 국무원 부총리 겸 국방부 部長의 직무를 철소하였다. 나중의 실천은 팽덕회가 편지에서 제기한 주장이 완전히 정확하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모택동은 사회주의사회에 있어서의 계급투쟁의 문제에서도 엄중한 오유를 범했다. 모택동은 중국에서 무산계급과 자산계급간의 모순, 사회주의 길과 자본주의 길 간의 모순이 중국 사회의 주요모순이라고 그릇된 론단을 내렸고 "계급투쟁을 잊지 말고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말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해야 한다"는 구호를 제기하였으며 "무산계급독재하에서의 계속혁명"의 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런 사상에 기대어 모택동은 건국후에 "호풍반혁명집단"에 대한 투쟁,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등을 비롯한 각종 정치운동을 발동하여 많은 재난을 빚어냈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직접 발동하고 령도하고 반혁명집단에 리용되여 당과 국가와 인민들에게 엄중한 재난을 가져다준 내란이다. "문화대혁명"은 그릇된 "무산계급독재 하에서의 계속혁명"의 리론에 의해 진행되였다. 모택동은 이른바 류소기, 등소평을 비롯한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는 "주자파(走資派)"와 지식인들을 "계속혁명"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른바 "각성된 대중"과 "혁명을 수행하면서 혁명을 배운다"는 젊은 세대-"홍위병"과 인민해방군을 "계속혁명"의 동력으로 삼았고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계속혁명"의 주요방법으로 삼아 "홍위병"과 대중을 발동하여 이른바 류소기, 등소평을 수반으로한 "자산계급사령부"와 "주자파" 및 지식인을 청산함과 아울러 이른바 "수정주의"와 "자본주의복벽"을 방지하려 하였다. "문화대혁명"은 "혁명"인 것이 아니라 중국의 발전을 파괴한 미증유의 내란으로서 중국을 파탄의 변연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모택동은 자기 운명과의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을 벌였던것이다. "문화대혁명"은 분명 좌경적정치의 실패이며 모택동의 비극이다. "문화대혁명"은 결국 급진적좌경정치의 실패와 붕괴, 그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생전에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은 성과가 7할이고 오유가 3할"이라 인정하였지만 100%로 잘못된 정치운동이였다.

등소평이 주도한 "건국 이래 당의 약간한 력사문제에 관한 결의"는 모택동의 개인숭배와 림표의 발광적인 "조신운동(造神運動)"에 종식을 고한 문헌이다. 이 문헌에 따르면 모택동이 만년에 오유를 범하게 된 주요한 원인은 교오자만정서가 자라났고 실제를 리탈하고 대중을 리탈하고 집체적 령도를 리탈하였으며 개인독단작풍이 날로 엄중하여지고 지어는 개인이 당중앙을 초월한 것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모택동에 대해서 신격화, 우상화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공적도 충분하게 긍정해야 할뿐만 아니라 그의 오유도 기탄없이 지적함으로써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공적만 말하고 그의 오유를 덮어감추거나 또는 그의 오유만 지적하고 그의 오유로 그의 공적을 말살하거나 부정하는 두 경향을 모두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모택동을 평가함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실사구시의 원칙을 견지하여야 한다.

모택동의 오유를 다룬 작품은 독초인가?



리홍규선생이 김학철선생을 "위험한 인물’로 딱지를 붙인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20세기의 신화》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리홍규선생은 "진심으로의 충고"란 글에서 《20세기의 신화》의 정신을 다음과 같다고 하였다.

(1)"한 가지 실례를 들어서 말하면 ‘신화’의 작자는 적대적 립장에 서서 중국공산당을 훼손했다는 그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개인을 썼다’고 변호할 수 있다. 설사 개인이라 해도 진정한 맑스주의자라면 절대로 그런 적대적립장에 설수는 없을것이다. 내가 기억한데 의하면 이 작품에서는 령수를 ‘진정 미치광이’, ‘망나니’, ‘놈’이라 했고 심지어는 히틀러와 상제병론(相提并論)까지 했다. 동무들은 아마 기억하고있을 것이다. 독일의 한 고관이 부시를 히틀러와 상제병론했다가 벼슬자리까지 떼운 일을…서방은 마치 민주가 발달한 것 같지만 그들의 민주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또 중앙의 다른 령도간부들을 모두 체호브의 소설에 나오는 ‘갑속에 든 사람’이라 했고 지방간부(연변의 간부들이라 한 것으로 기억된다)는 하나도 쓸 놈이 없다고 했다. 그럼 결론은 무엇인가? 중공을 ‘재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하조직이 나와서 착오적인 구호(공식)를 선포하는 것을 보고 갈채를 보내며 합류할 동류가 생겼다고 기뻐 날뛰였던 것이다".



(2)"어떤 사람은 김학철선생이 50년대 말에 벌써 대약진의 착오를 보아냈으니 정말 간단치 않다고 말하였다. 물론 김학철선생이 대약진을 바로 본 것은 승인해야 한다. 그러나 그 시기 자본주의국가의 기자와 정객들도 거개가 중국의대약진을 비웃었다. ‘미국의 소리’가 그것을 증명해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영명하고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볼수 있겠는가? 이때 흐루쇼브도 중국의 대약진을 비웃었다. 세 사람이 바지 한 벌을 번갈아 입은 사회주의라고 과장해서 지껄였다. 흐루쇼브의 이 례는 문제를 유력하게 설명해준다. 그는 어떤 사람이였는가? 제20차쏘공대표대회에서 한 비밀보고서에서 쓰딸린을 ‘납작하게 깔아뭉갠 사람’이다. 우리는 이때로부터 쏘련의 해체가 시작되였다(혹은 관련이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흐루쇼브를 위대한 공산주의자라고 보고 존경할 수 있겠는가? 사실 김학철선생은 흐루쇼브를 몹시 경양하였다. 누가 그를 비판하면 ‘반쏘’를 한다고 했으며 중국인민들은 반쏘렬차에서 뛰여내리라고 호소하기까지 하였다".

리홍규선생의 상술한 견해를 종합해보면 《20세기의 신화》는 적대적인 립장에 서서 중국공산당과 모택동 그리고 중앙의 다른 령도간부들을 모독하였으며 김학철이 "대약진"을 비판한 것은 자본주의국가의 기자와 정객들 그리고 흐루쇼브와 합창한 것으로서 대단한 것이 없으며 흐루쇼브가 쓰딸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반대한 것은 틀렸다는 것이다. 하기에 《20세기의 신화》는 엄중한 정치문제가 있는 "독초"이며 따라서 김학철선생은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20세기의 신화》는 "반우파투쟁"으로부터 “문화대혁명”전야에 이르기까지 극좌로선이 살판치던 중국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반우파투쟁","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운동", 모택동의 개인숭배 및 사회주의국가에서의 수령의 우상화와 그로 인해 민주주의원칙이 여지없이 파괴되고 인권이 무참히 짓밟힌 상황 등을 고발하고 비판한 장편 정치소설이다.

김학철은 작가의 량지(良知)와 남다른 용단과 무쌍의 투혼으로 "대약진운동", "인민공사화운동"에 예리한 메스를 댔으며 신랄하게 폭로하고 비판의 비수를 날렸다.

"코끼리가죽 같은 땅거죽으로 뒤덮인 중국의 년로한 대륙이 불시에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와들와들 떨었다. 총동원된 전국의 중, 소학생들이 공부를 제쳐놓고 달라붙어서 만들어내는 높이 80센치, 직경 40센치짜리 풍로식용광로들이 전국 도처에서우후죽순처럼 일떠섰다…"

"우선 혁명성이 박약한 아낙네들이 한숨으로 대약진을 맞이하고 방정맞은 녀편네들이 눈물로 인민공사를 영접하였다. 인민공사에서 30리 폭원에 거주하는 수백 집 어린아이들을 깡그리 중심구역에 설치한 림시 탁아소와 바라크유치원에다 집중을 시켜놓은 까닭에 내 아들 보고 싶고 내 딸 걱정하는 깨지 못한 엄마들이 어두운 밤중에 10리 씩 5리씩 논틀밭틀로 걸어서 내 아들, 내 딸을 보러 왔다…"

"대약진시기란 고양이를 눈에 띄는 족족 잡아먹어서 고양이가 씨가 지는 시기였다. 대약진시기란 시래기를 훔치다가 들켜서 파출소놀음이 나는 시기였다. 히틀러가 망하기 전에 전화(戰火)속의 독일국민은 ‘옥상의 토끼’라는 곁말을 써서 남이 모르게 고양이고기를 사고팔고 했다지만 모택동의 대약진시기에 이르러 마침내 시래기를 자물쇠를 단단히 잠근 광속에서 말려야 하는 것으로 되여버렸다."

"고난의 시기가 닥쳐왔다. 6억 인민은 열에 들떴던 대가를 고스란히 치러야 했다. 썰물뒤의 개펄은 어수선산란하였다. 해는 빈혈증에 걸리고 달은 우울병에 걸렸다…기관에서는 집무를 중지하고 나무껍질을 벗기러 눈길을 헤치며 산으로 올라가야 하였고 또 공장에서는 작업을 중지하고 눈속에 묻힌 락엽을 주으러 들판으로 나가야 하였다. 갖가지 나무껍질과 가지각색 나뭇잎으로 죽 끓이고 떡 만드는 법을 전수하는 전습회들이 도처에서 열렸다. 아이고 어른이고 입은 바지가 자꾸 흘러내려서 혁대에 새 구멍을 뚫느라고 볼일을 못 보았다. 정답게 지내던 이웃끼리 겨 한 되, 비지 한바가지 때문에 척이 져서 서로사이의 래왕들을 끊었다. 대단한분들이 사시는 사택의 담장에서는 시성 두보의 ‘주문주육취(朱門酒肉臭)’ ‘로유동사골(路有凍死骨)’열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용감한 비판자들에 의해 인적이 끊긴 밤중에 씌어지군 하였다."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는 "반우파투쟁", "대약진운동", "인민공사화운동"을 비판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의 당과 모택동에 대한 충언이 반당, 반모택동의 죄악으로 지목되고 팽덕회와 같은 충신이 진실을 말했다가 오히려 역적으로 몰리는 억울한 사건들을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성어와 로신의 수필 ‘립론(立論)"을 빌어 고발하고 풍자하였다.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 량효성(梁曉聲)은 1997년에 김학철선생이 30여년 전에 제기한 사상을 다음과 같이 중복하고있다. "팽덕회가 려산에서 모택동의 개인권위에 대해 도전장을 던진 것은 추호도 고강과 같은 그러한 정치적야심을 내포하고있지 않다. ‘룡과 범의 싸움’은 더구나 아니다. 실제상에서 이 사건은 일부 중국공산당인들의 조기의 ‘공화(共和)’정치사상과 모택동 머리속의 ‘후제왕사상(後帝王思想)’의 한 차례의 겨름이였던 것이다"(량효성 《凝視九七》, "思考毛澤東", 경제일보출판사, 1997년 227페지). 량소성의 이 말은 김학철의 정치적 선견지명을 웅변적으로 반증하고있는 것이다.

김학철의 이런 불의에 도전하는 반골정신과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당시의 자본주의국가의 기자, 정객, 이른바 "반맑스주의자", "음모가"인 흐루쇼브도 "대약진"을 "비웃었다’는 리유로 부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학철은 중국에서 "대약진운동", "인민공사화운동"같은 력사상 미증유의 경거망동이 일어난 것은 개인숭배, 찍어말하면 모택동의 개인숭배로 인한 개인의 독단전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소설중의 일평에게 보낸 심조광의 편지를 통해 단도직입적으로 까밝히고있다.

"개인숭배의 우상의 그늘 밑에서 탐스러운 울금향은 피지를 못합니다. 거기서는 오직 피빛의 독버섯만이 기를 펴고 번식할 따름입니다"

김학철은 《20세기의 신화》의 창작동기와 주제를 말할 때 "중국은 지금 대가리 하나뿐인데 발이 수십억 개나 달린 무슨 거대한 그리마(절족동물)같은 괴물로 변해버렸다. 사고는 내가 혼자 도맡아할 테니 저희들은 그저 부지런히 손발만 놀리면 되느리라. 이와 같이 비양하는 것으로써 ‘태양’의 절대권위에 나는 도전하였다"("최후의 분대장"에서)고 하였으며 "반우파투쟁"이 시작된 후 사람들은 모택동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눈 먼 망아지 워낭소리 듣고 따라가듯 추종하게 되였다고 지적하였다. "20세기의 신화"에서 김학철은 안데르쎈의 "벌거벗은 임금"을 빌어 모택동을 자기의 잘못을 고집하면서 언론을 탄압하는 "벌거벗은 임금"이라고 비판하였다.

김학철은 이 정치소설에서 모택동의 개인숭배와 독단전횡, 민주주의와 인권의 유린 등에 대한 비판의 시각, 다룬 내용 등은 총적으로 타당성을 가진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비판의 메스를 댈 때 일부 분촌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부족점도 보인다. 김학철은 사회주의혁명과 건설 중의 모택동의 오유만을 비판하였다. 그의 신민주의혁명시기와 중화인민공화국창건의 공로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김학철을 모택동과 공산당을 모독한 "위험한 인물"로 몰아 부치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김학철이 타계한 후 이런 정치적"감투"를 들씌우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20세기의 신화》는 지난날 사회주의국가들에서의 우상화문제도 놓치지 않았다. 1956년 2월 쏘공 제20차 당대회에서 쏘공중앙 제1서기 니끼따 흐루쇼브는 유명한 "평화공존"’ "평화적과도"’ ‘평화적경쟁"의 외교로선을 제기하였고 "개인숭배 및 그 후과에 관하여"라는 비밀보고를 하였다. 이 비밀보고에서 흐루쇼브는 쓰딸린의 개인숭배의 여독을 숙청할데 대해 호소하였다. 이 비밀보고는 그 대회에 직접 참가했던 사회주의국가의 대표들 특히는 뽈스가, 웽그리아 등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와 중국, 조선 등 동방의 사회주의국가에 미친 파장은 아주 컸다. 이에 대해 최근 중국 사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있다

"흐루쑈브의 비밀보고는 쓰딸린이 직권을 람용하여 독단전횡하고 사회주의민주와 법제를유린하고 대량의 억울한 안건과 가짜안건을 만들어내고 또 개인숭배를 조작해내고 흔상하고 종용한 엄중한 과오를 폭로하고 비판했다.이는전세계에 거대한 충격파를 형성하여 정면과 반면의 효과를 초래했다. 한 면으로는 서방의 세력들이 ‘비밀보고’를 리용하여 반쏘, 반공, 반사회주의의 물결을 일으키게 되여 뽈스까사건, 특히는 그 후의 웽그리아정치동란이 일어나게 되여 한동안 쏘련과 기타 사회주의나라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였으며 국제공산주의운동내부에 사상혼란과 ‘신앙위기’가 나타나게 하였다. 다른 한 면으로 쓰딸린의 과오에 대한 폭로와 비판은 장기간 국제공산주의운동내부에 지도자에게만 의존하고 서책에만 의존하던 국면을 타파하고 맑스주의사상해방운동을 일으켰다."(류우어 등 "중국 20세기 전사" 제8권(1956-1966), 중국청년출판사, 제8-9페지)

김학철은 중국의 주류 문단이나 인문학계보다 먼저 투철한 인식을 가지고 《20세기의 신화》를 통해 모택동의 개인숭배와 더불어 쓰딸린과 김일성의 개인숭배 및 민주주의와 인권을 무시하는 독단전횡에 대해 고발 비판하였고 그에 저항하는 호소의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에서의 개인숭배가 가심해지고 당내와 전반사회생활에서의 민주주의기풍이 점점 증발되여가고 인권이 날로 유린당하는 당시 중국의 정치생활 속에서 김학철은 개인숭배를 처음으로 반대하고 사회주의권에서의 사상해방의 첫 물결을 일으킨 흐루쇼브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썼으며 당시의 쏘련에 대해서도 동경을 금치 못하였다.

이 기회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픈 것은 1956년 4월 5일 중공중앙에서 "인민일보"편집부의 명의로 발표한 "무산계급독재의 력사적 경험에 관하여"라는 글이 시사하다시피 모택동도 처음에는 흐루쇼브가 쓰딸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반대하는 립장을 취했고 또한 그 후 약 반년 뒤에 열린 중공 제8차 대회에서 진술한 류소기의 정치보고와 등소평의 당규약 수정에 관한 보고가 증명하듯이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지도자들은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흐루쇼브가 령도하는 쏘련공산당처럼 집단령도를 실시하기로 생각을 굳혔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을 미루어볼 때 《20세기의 신화》에서 쓰딸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한 것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20세기의 신화》에서 표현된 흐루쇼브와 당시의 쏘공에 대한 전반적 긍정은 타당하지 못하다. 이것은 김관웅교수가 지적하다시피 "쏘련만 옳고 중국은 다 틀렸다는 식의 견해는 이 소설의 하나의 맹점이 아닐 수 없다".

총적으로 《20세기의 신화》의 주류는 모택동이 직접 발동하고 령도했던 “대약진운동”, “인민공사화운동”, “반수방수(反修防守修)운동”에 대한 부정과 비판이였고 계급투쟁확대화로 인해 억울함을 당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수난에 대한 항변이고 반항의 웨침이였다. 력사와 실천은 김학철의 비판이 옳았음를 증명했다. 즉 “대약진운동”, “인민공사화운동”, “반수방수운동” 등 1957년 “반우파투쟁” 이래의 중국에서의 거듭되는 정치운동은 그릇된 죄경로선의 산물로 오유적인 정치운동임이였음이 아주 똑똑하게 판명되였다. 물론 《20세기의 신화》에는 자기와 중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당했던 억울함을 대변해서 비판을 하다 보니 좀 과격한 언사나 언어적 표현이 있는 것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20세기의 신화》의 주류가 아니다. 그러나 리횽규선생은 이러한 주류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일부 지엽적인 언사나 언어적 표현만 틀어쥐고 "공기일점, 불급기여(攻其一点, 不及其餘)"하는 방법으로 《20세기의 신화》를 전반 부정하고 김학철을 적대적인 립장에 선 "위험한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은 신생아(新生兒)의 몸에 피와 양수가 묻었다고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진배없다.



기타 및 희망사항



김관웅교수는 "김학철의 《20세기의 신화》와 중국, 외국 문학예술 사이의 ‘상호텍스트성’연구"라는 론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중국에서 전제주의나 개인독재는 문화전제주의를 자연스럽게 파생시켰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가 그러했고 주원장의 ‘문자옥(文字獄)’이 그러했고 중국의 ‘반우파투쟁’에서의 지식인탄압, 문화대혁명중의 문화훼멸의 광란이 바로 그러했다. 문화 중에서도 고상하고 아름다운 예술은 언제나 수당기충(首當其冲)-제일 먼저 공격을 당하여 재난을 입는 존재였다.

《20세기의 신화》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채의 비극을 통하여 예술과 예술가들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핍진하게 보여주었다. 채는 예술가들이 자기의 기량을 련마하는데 열중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으로 해서 ‘정치돌출을 반대했다’는 죄명으로 우파감투를 쓰게 되며 마누라로부터 리혼까지 당하고 어린 두 딸까지 요절하게 되며 로동개조농장에 쫓겨 와서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소구유에서 콩깨묵을 훔쳐 먹는 가련한 처지로 되였다.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채는 예술에 대한 추구를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바이올린을 가지고 인적 없는 공동묘지에 가서 자기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바이올린연주를 하기까지 한다."

지난 세기 50-60년대 중국 문예계의 상황을 추적해보면 정치투쟁과 계급투쟁리념에 바탕을 둔 모택동의 "정치적공리주의" 문예사상이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런 문예사상에 의해 건국후 17년과 “문화대혁명”시기에 전개된 문예계의 지속적인 비판운동은 중국문예의 발전에 많은 피해를 안기였다.

모택동은 일찍 1942년 "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바 있다.

"지금 세계상에서 모든 문화와 문학예술은 모두 일정한 계급에 속하며 일정한 정치로선에 속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 초계급적인 예술 그리고 정치와 병행하거나 혹은 상호 독립된 예술은 실제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무산계급의 문학예술은 무산계급의 전반 혁명사업의 일부분이다. 레닌이 언급한 것처럼 전반 혁명기계중의 치륜과 나사못이다. 당의 문예사업은 당의 일정한 혁명시기 내에 규정된 혁명임무에 복종하여야 한다."

모택동의 이 론단은 오늘 보아도 그렇고 이 “연설" 발표 당시에 있어서도 맹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문예의 효용성은 다양한바 그 다양한 효용성의 하나인 정치적공리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정치적효용성만 편면적으로 강조하고 심미적기능, 윤리도덕적인 기능 지어는 오락적인 기능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다. 모택동은 편면적으로 문예를 정치의 부용(附庸)과 도구로 간주한 나머지 "정치적공리주의"문예사상에 기대어 "북국강남(北國江南)"이나 "조춘이월(早春二月)"을 비판하도록 지시하였다. 모택동의 이런 문예사상은 문화대혁명시기에 이르러 문예전제주의로 악성 팽창되여 종당에는 모든 아름다운 문예작품을 타매하였다. 김학철은 《20세기의 신화》에서 이런 문화전제주의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나 리홍규선생은 "간단치 않은 작가의 도-‘책 만권 읽고’ ‘만리길 걷다’"(연변단풍수필회 회원작품집 "단풍잎" 6호 2008년 5월 작)에서 "우리는 우선 ‘모주석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부터 진지하게 학습하고 그 정신실질을 자기의 피와 살이 되게 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은 창작강습반에 온 학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내놓고 ‘나는 ‘강화’를 부정합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강화’는 중국화한 맑스주의 문예리론이다. 오늘에도 그 현실적인 의의를 상실하지 않은 경전적 문헌이다"고 하였다.

"모주석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은 지난날 특히 혁명년대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연설”에서 모택동은 폭로와 가송의 문제, 보급과 제고의 문제, 문예가와 군중생활의 관계문제, 문예의 원천문제 등에서 그 당시에는 물론 오늘에 와서도 그 광채를 잃지 않는 훌륭한 견해들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문예와 혁명의 관계문제에서 문예의 공리주의적인 역할만 편면적으로 강조한 것은 부족점이라 생각한다. 이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개혁개방후 등소평은 문예가 정치를 리탈해서는 안되지만 문예가 정치도구화하는 것은 현실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문예는 무산계급정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구호를 더는 제기하지 않았다. 모택동의 문예사상은 결코 만고불변의 교조가 아니며 더욱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따라서 "모주석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을 편면적으로 절대화하거나 불변의 준칙으로 간주하는 것은 닫힌 생각이라 믿어지며 이른바 작가들이 "책 만권 읽고" "만리 길 걷는" "간단치 않은 작가의 도"를 닦음에 있어서 "우리는 우선 ‘모주석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부터 진지하게 학습하고 그 정신실질을 자기의 피와 살이 되게 하여야 한다"라고 력설한 것은 어딘가 어폐가 있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필자는 이 글에서 어마어마한 문제를 다루면서 제나름의 성숙하지 못한 생각들을 두서없이 피력하였다. 기탄없는 비평과 조언을 바라마지 않는다. 지난날 필자도 모택동을 우상으로 모시고 숭배하였으며 지어 모택동의 말은 "한 마디가 만 마디를 당하고(一句頂一萬句)", "마디마다 진리(句句是眞理)"라고 믿으면서 처사하였다. 그러다가 문화대혁명이 마무리되고 전국적으로 진행된 사상해방운동의 와중에서 점차적으로 개인우상화의 심연 속에서 헤어 나왔다. 하지만 지금도 시대에 걸맞지 않는 사상과 생각에 얽매일 때가 적지 않다. 남은 여생은 길지 않지만 저 하늘에 갈 때까지 "개과천선(改過遷善)하려고 작심한다. 리선배님께 외람된 말씀이지만 우리 함께 낡은 사상관념에서 벗어나 "여시구진(与時倶進)"하면서 지속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세상의 문제를 대하고 처사하였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희망사항이다.

2009.3.17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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