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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의 황실의 발상지 두만강 류역/김관웅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08.14일 12:59
김관웅

함보(函普)는 금나라 녀진족의 “시조”로서 금나라 황실은 함보와 그 형제들의 후예들이다. 그러므로 함보의 력사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서 특히는 함보와 신라, 고려와의 관계는 학술계에서서 아주 주목하여 오고 있는 문제이다.

1. 史書에 기록된 函普의 史蹟

『金史 ․ 本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余矣. 兄阿古乃好佛, 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顔部僕幹水之涯, 保活里居耶懶. 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太祖, 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 盖自謂阿古乃之後.”

이 원문을 조선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금나라 시조의 휘는 함보이다.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는데 그때 나이가 60여세였다. 그의 형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했는데 고려에 남아있으면서 그를 따르려하지 않으면서 “후세 자손들은 반드시 상봉할 날이 있을 터인즉 나는 갈 수 없구나.”라고 했다. 그리하여 홀로 동생 보활리와 함께 고려를 떠났다. 시조 함보는 완안부 복간수의 상류 기슭에 자리를 잡았고 보활리는 야라라는 고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에 호십문은 갈소관에서 태조에게 귀의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할아버지와 형제 3명과 작별하고 찾아왔다고 했다. 스스로 자기는 아고내의 후손임을 밝힌 것이다.

『金史』권59 “宗室表”, 『金史』권66 “胡十門傳”,『金史』권70 “石土門傳” 등에는 모두 상기 인용문과 류사하거나 상관되는 기록이 있다.『三朝北盟會編』권18에서는 苗耀가 편찬한 『神鹿記』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女眞始祖掯浦出自新羅, 奔至阿觸胡, 無所歸, 遂依完顔部, 因以氏焉.

상기 인용문에서 掯浦는 函普에 대한 부동한 漢字 기록이다. 阿觸胡는 바로 按出虎인데, 기실 함보는 먼저 僕斡水 기슭에 있는 完顔部에 자리를 잡았다가 후에 按出虎水 기슭에로 이동하였다.

『松漠紀聞』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女眞酋長函普乃新羅人, 號完顔氏, ……女眞以其練事, 後隨以首領讓之, 兄弟 三人: 一爲熟女眞酋長, 號萬戶, 其一適他國.”

상술한 세 조목의 사료는 동일한 인물과 사건을 기록하였다. 즉 금나라 여진족의 시조인 함보는 형제들과 헤여져서 조선반도로부터 복알수 상류의 기슭에 와서 완안부에 의탁한 사실, 동생 보활리는 야라라는 고장에 자리를 잡았고, 함보의 형 아고내 혹은 그 후손들이 遼東 갈소관에 찾아와서 함보의 자손들과 상봉한 사실, 그리고 이들 삼형제 및 그 후손들이 세 고장의 녀진족의 수령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1117년, 금나라의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고려에 보내는 문서에서 “형인 대녀진 금나라 황제가 동생인 고려 국왕에게 편지를 보낸다(兄大女眞金國皇帝致書于弟高麗國王)”고 하면서도 “고려는 부모의 나라이므로 조심스럽게 섬겨야 한다(高麗爲父母之邦, 小心事之)”라고 말한 것은 바로 상술한 리유에서였다. 또 바로 이런 리유로 금나라는 료나라와 북송을 멸망시키기고 중원에 군림하기까지 한 강대한 무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고려를 괴롭히지 않았던 것이다.

2. 이상의 史蹟에 대한 考證

첫째, 함보가 형제들과 헤여져서 완안부에 들어온 시간

『金史 ․ 世紀』에서 추존한 금나라 건국전의 帝王系譜에 의하면 景祖 烏古乃로부터 명확한 기록이 있다. 烏古乃는 료나라 성종 태평 원년(1021년)에 태여났는데,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로부터 景祖에 이르는 동안에 德帝 烏魯, 安帝 跋海, 獻祖 綏可, 昭祖 石魯 그리고 函普까지 포함시키면 도합 5대를 거쳐 내려 왔다. 한 대를 20년으로 어림잡는다면 약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볼 수 있다. 景祖 烏古乃가 태여난 1021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921년 좌우가 된다. 이 시기가 바로 함보가 형 아고내와 헤여져서 고려(혹은 신라)를 떠나 북상하여 “僕斡水 상류의 기슭”에 도착하여 완안부에 의탁한 구체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조선반도 중부는 후삼국(後三國) 시대로서 “신라의 정치가 피폐해 지고 도처에서 도적들이 봉기하던 란세”였다. 수십년 동안 이어지는 전란으로 생업은 파괴되였고 백성들이 류리걸식하거나 산속으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료나라가 발해국을 멸해 수많은 인구가 이리저리 몰려다니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현재 중국의 동북부는 공허하여 졌는데 이는 함보가 여기로 올 수 있는데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특히 료나라와 신흥 고려의 접합부에 있었던 옛 발해의 령토였던 두만강 류역은 더욱 공허하여 져서 함보 같은 집단이 이동하여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공간이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함보 등이 조선반도를 떠나서 녀진인들이 사는 사회공간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콘텍스트이다.

둘째, 함보는 고려에서 왔는가 아니면 신라에서 왔는가?

『金史』권1 “世紀”에 의하면 함보는 고려에서 왔고,『三朝北盟會編』과 『松漠紀聞』에 의하면 함보는 신라에서 왔다. 앞에서 추정했다시피 함보가 고려(혹은 신라)를 떠나서 완안부의 여진인들 속에 들어온 시간을 대략 921년 좌우로 추정한다면 이 시기는 바로 신라가 거의 망해가던 후삼국시기로서 후삼국중의 왕씨 고려가 918년에 세워져 935년에야 비로소 후삼국(신라, 고려, 후백제)을 통일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함보를 신라에서 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고 고려에서 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10세기 전반기 조선반도의 력사의 전형기(轉型期)에 살았던 60살이 넘었던 함보는 원래는 신라의 백성이였으나 후에는 고려의 백성이였을 가능성이 충분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函普의 族屬에 대한 考證

함보는 비록 조선반도에서 살았고 또 비록 신라 혹은 고려에서 왔으니 신라인 혹은 고려인일 수도 있지만 그 족속은 신라인 혹은 고려인이 아닌 여진인일 가능성이 높다. 주지하다시피 조선반도에는 신라가 통치하던 시기나 고려가 통치하던 시기나 모두 단일 민족이 살았던 것만은 아니다. 즉 신라인 혹은 고려인 외에도 지금의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에는 많은 야인(즉 여진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이나 조선의 사학계에서는 오래 동안 이른바 조선반도에서의 “조선민족의 단일민족설”을 강력하게 주장하여왔는데 이는 력사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사실 조선민족도 장구한 력사발전의 행정속에서 주변의 많은 민족들과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진 민족이다. 이른바 조선반도에서의 “조선민족의 단일민족설”에서 하루 빨리 해탈되여야만 조선반도 남과 북의 사학계에서는 동북아 력사연구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함보의 족속 나아가서는 금나라의 연원을 파헤치는 데 있어서 적잖은 사료들이 있다.

《金史》의 편찬자인 脫脫은 “金人本出靺鞨之附于高麗者.(금나라인들은 고려에 붙은 말갈인이다)”라고 명확하게 지적한바 있다. 이 사료는 아주 중요하지만 장기간 사람들의 중시를 받지 못했다. 이 사료중의 “金人”은 의심할바 없이 금나라 녀진인의 시조 函普 등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말갈은 료나라 이전 시기 녀진인들에 대한 통칭으로서 녀진인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반도의 북부 심지어 중부에도 신라 그 후에는 고려에 붙은 말갈-녀진인들이 적잖게 살고 있었다. 이런 녀진인들은 장기간의 교류속에서 신라인 후의 고려인들과 상호 융합되여 있었다. 그리고 신라나 고려의 력사에서 반드시 북변의 발갈-여진인들의 력사도 포함되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말갈과 녀진인들의 력사가 포함되지 못한다면 그러한 신라사나 고려사는 완정하지 못한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원나라시기의『金史』를 편찬할 때 이미 명확히 지적한 것처럼 금나라 녀진인의 시조인 函普는 王氏 高麗에 복속했던 말갈-녀진인임을 알 수 있다.

넷째, 금나라의 황실의 성씨에 대한 고증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 3형제는 모두 完顔을 성씨로 삼았다. 이에 대해 녀진 曷蘇館 部領인 胡十門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한바 있다.

“吾遠祖兄弟三人同出高麗. 今大聖皇帝之祖入女眞, 吾祖留高麗, 自高麗歸于遼. 吾與皇帝皆三祖之後.”

상기 인용문에서 “吾遠祖兄弟三人”은 바로 “아고내, 함보, 보활리” 이 삼형제를 가리키는 것이고, “今大聖皇帝”는 금나라의 황제 완안 아골타를 가리키는것이고 “今大聖皇帝之祖”는 바로 函普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한 胡十門은 금나라 시조 함보의 형인 아고내의 3대 후손, 즉 손자이다. 胡十門은 비록 료동의 갈소관부에서 살았지만 완안을 성씨로 삼았다. 금나라 건국 전후의 중요한 장령인 석토문은 야라로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대를 이어서 부장노릇을 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바로 금나라 시조의 동생인 保活里의 4대손, 즉 증손자였으며 역시 완안을 성씨로 삼았다. 아고내, 함보, 보활리 형제 세 사람은 수천 리의 먼 거리를 두고 장기적으로 헤여져 살면서 서로 별로 기별이 없는 상화이였지만 모두 녀진족의 完顔이라는 성씨를 자기의 성씨로 삼은 원인은 결코 우연하지 않다. 그것은 바로 이들은 高麗에서 나온 한 형제들이였기 때문이였다.

금나라 황실의 성씨는 완안(完顔)을 한성(漢姓)으로 옮기면 임금 왕(王)이요, 녀진어로 음독을 하면 “알영기야(閼英基雅)이요 청나라시기에는 왕갑(王甲)으로 한역을 했다고 한다. 알영(閼英)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부인이였다는 알영(閼英)이나 신라의 다른 한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이름과 아주 닮아 있는데, 알타이어계의 원시조어에서 알은 금과 통하는 것이다.

넷째, 함보가 고려에서 처음 찾아온 完顔部는 어디에 있었을까?

상기 사적으로부터 보면 함보는 고려(혹은 신라)를 떠나서 먼저 僕幹水 혹은 僕斡水 기슭에 있는 完顔部에 자리를 잡았다가 후에 按出虎水 기슭에로 이동하였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우의 인용문에서 나오는, 함보가 고려를 떠나 처음으로 정착한 고장인 僕干水를 지금의 흑룡강성 목단강으로 보면서 구체적으로 금나라의 시조 함보는 목단강 하류의 의란현 일대에 살았는데 이 일대는 바로 료나라 시기 오국부의 으뜸가는 성곽-五國頭城이 있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僕幹水는 僕斡水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幹자와 斡자가 너무 비슷해서 幹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면 僕斡水는 어느 곳일까?

일설에 의하면 僕幹水 혹은 僕斡水를 布爾葛水(길림성 안도현, 연길시를 거치고 해란강과 합쳐서 두만강에 흘러드는 搏爾哈通河)기슭이라고도 비정한다.

金之始祖諱哈富(函普), 初從高麗來, 居完顔部布爾葛水之側. ……金始祖所居之完顔部, 在圖們江左琿春境西, 今延吉和龍縣境.

상술한 문헌 기록으로 보아서 금나라의 시조 함보가 고려를 떠나서 몸을 의탁한 완안부는 두만강 중류 류역의 보을천, 해란강, 부르하통하 등 수계(水系)를 포함한 지역이였다고 생각한다.

조선 함북 회령군 경내에는 甫乙川이라는 강이 흐르다가 두만강에 흘러든다. 甫乙은 僕斡의 轉寫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 조선조 초기에도 회령부터 지금의 중국 화룡 사이를 甫乙下라고 불렀다.

상술한 문헌 기록으로 보아서 금나라의 시조 함보가 고려를 떠나서 몸을 의탁한 완안부는 두만강 중류 류역의 보을천, 해란강, 부르하통하 등 수계(水系)를 포함한 지역이였다고 생각한다.

힘보가 완완부에서 헤게모니를 잡게 된 경위에 대해 《金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있다.

시조 함보가 완안부에 온지 얼마 안 되어 그 부락의 사람들이 다른 부락의 사람을 죽인 일이 일어났다. 이로 하여 두 부락은 척을 지게 되어 싸움이 끊지 않았다. 완안부의 사람들은 시조에게 “만일 두 부락 사람들이 이 원한을 해소하여 서로 싸우지 않게 한다면 륙십이 되도록 아직 시집을 가지 않고 있는 우리 부락의 현숙한 여자를 당신에게 시집가도록 하고 우리 부락에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청을 들었다. 이에 시조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그 부락에 찾아가서 “한 사람이 죽은 일로 싸움이 끊지 않으면 서로 손상이 큽니다. 만일 란을 일으킨 으뜸가는 사람을 처벌하고 우리 부락에서 당신에게 물건으로 갚는다면 싸움이 멈춰지고 당신은 이득을 챙길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그 원가(怨家)는 수락했다. 그리고는 시조가 “만일 사람을 한 명 죽이게 되면 그 집에서 사람을 하나 끌어다가 농예로 부리고 말 10필, 소 10두 황금 6냥을 살상을 당한 집에 주어 두 집을 갈등을 해소하며 사사로이 싸움은 하지 말자”고 약속하니 그 부락 사람들은 “이약속 대로 하자”고 대답했다. 녀진 사람들 속에서 살인을 하면 소와 말 30마리로 갚는 습속은 이로부터 이루어졌다. 이 약속이 잘 지켜져 가니 부락의 사람들은 시조를 신뢰하고 시조에게 복종하게 도여 검은 소 한 마리와 더불어 60세 나는 그 녀인을 시조에게 시집보냈다. 시조는 그 검은 소를 지참금으로 여기고 받았으며 아울러 그 여자의 재산도 가지게 되었다. 후에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오로라고 불렀고 둘째 아들은 알로라고 불렀으며 딸은 주사판이라고 불렀으며 완부의 사람으로 되었다. 천회 14년 경원황제로 추인되였고 그 호를 시조라고 했다.

3.북송의 두 황제 徽宗과 欽宗은 어디에 묻혀있을까?

고려에서 온 함보와 그의 형제들이 몸을 의탁하여 금나라의 터전을 닦았던 완안부 여진족이 살았던 고장은 분명히 두만강류역이였다. 그러다가 금나라의 근간이 된 완안부 녀진족은 세월이 많이 지난 뒤에 지금의 흑룡강성 아성에 있는 按出虎水에로 옮겨 갔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금나라의 도읍 상경을 회녕부라고 했는데, 썩 후세에 와서 세종대왕이 두만강연안에 륙진(六鎭)을 개척하고 원래의 지명인 오음회(吾音會)를 회령(會寧)이라고 고친 것은 우연한 일치일까?

1115년 녀진족의 수령 완안 아골타는 군사를 이끌어 료나라군사의 주력을 대파하고 지금의 흑룡강성 아성에서 금나라를 세운 뒤 10년 동안의 경략을 거쳐 1125년 송나라와 손잡고 료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신흥한 금나라의 그 다음의 목적은 송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였다. 1126년 금나라군데는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 송나라의 도읍인 汴京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이해 윤11월 25일 변경을 함락한다.

변경이 함락된 후 얼마 안 되어 北宋의 徽宗, 欽宗 이 두 부자는 금나라군대에 의해 생포되여 금나라에로 끌려가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금나라의 호리개로에 있는 고국성에 유폐되여 있다가 휘종은 1135년에 죽었고 흠종은 1161년에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중국에서는 북송의 徽宗, 欽宗이 유폐된 오국산성이 구경이 어느 곳인지는 명확한 고증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이 두 황제가 파묻힌 묘지를 중국의 동북 경내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중국의 일부학자들은 북송의 徽宗, 欽宗 두 황제의 北遷行踪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측하고 있다. 즉 汴京(오늘의 개봉) → 燕京(오늘의 북경) → 中京(오늘의 내몽골 녕성) → 通塞州(오늘의 길림성 사평시 일면성 고성) → 上京(흑룡강성 아성시) → 韓州(료녕성 창도현) → 五國城(흑룡강성 의란현)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한주에서 오국성까지 가는데 46일이란 시간이 걸렸다고 고증하고 있다.『금사』나 송대의 문헌에도 북송의 이 두 황제를 최종적으로 胡里改路에 옮겼다고 기록하였다. 오국성에 도착한 것은 1130년 9월 2일이라고 한다.

天會八年七月, 昏德公 ․ 重昏侯于胡里改路.

建炎四年七月乙卯, 是日, 二帝自韓州移居五國城, 五國城者. 在金國所都西樓之東北千里.

방위의 각도에서 보면 오국성이 있는 곳을 지금의 흑룡강성 의란현으로 보는 것이 옳고 호리개로도 흑룡강성 의란현에 있은 것은 옳기는 하지만 아주 이상한 것은 조선 함북도 회령 甫乙면에 접해 있는 雲頭山에도 五國山城이 있고 거기에는 宋帝陵, 女眞塚이 있다는 점이다. 오국성에 유페된지 휘종은 5년만에 죽었고 흠종은 26년 만에 죽었으니 흑룡강성 의란현의 오국성으로부터 조선함북의 회령에 있는 오국성에 옮겨와서 유페되였다가 죽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조선 함북 회령의 오국산성에 12세기 초 靖康之亂으로 金나라의 포로가 된 북송의 황제 徽宗(1082-1135), 欽宗(1100-1156)을 유페했다고 전하여 지며 宋帝陵은 바로 북송의 徽宗, 欽宗의 陵寢이라고 전해진다.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민족(원래는 속말말갈에 속했으나 그 선조들은 숙신이였고 그 음이 변하여 여진으로 되었다.)은 압록강 연안에 있는 여진은 숙녀진이라고 하고 두만강 연안에 있는 여진은 생녀진이라고 하였다.

고려가 흥기한 뒤 지금의 함흥이북은 두만강 녀진의 령역이였으며 함흥이북의 땅을 두고 고려와 두만강 녀진 사이에 마찰이 많기는 했지만 완안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운 뒤로부터 지금의 조선반도의 함경남북도 지방은 금나라의 령역으로 되였다. 그러므로 회령은 북송의 徽宗, 欽宗이 북천되여 유폐되였던 회령 땅은 당시에는 분명히 금나라의 판도속에 포함되여 있었으므로 회령이 포로로 이 두 된 황제의 유폐지로 되었을 가능성은 십분 많은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조선 함북 회령 오국산성에 있다는 송제릉에 대한 발굴을 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 력사의 미스터리는 후일의 숙제로 남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만 북녘땅의 어디엔가 묻혀 있을 북송의 徽宗, 欽宗의 망령을 생각하노라면 부지중 이들 부자가 북녘 땅으로 끌려오면서 주고 받았다는 사(詞)가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중경으로부터 통새주로 가던 도중 워낙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던 풍류황제 徽宗은 마음속으로 괴어오르는 비애를 눅잦힐 길 없는지라 “眼兒媚”라는 詞牌에 詞를 붙여서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고 한다.

玉京曾憶舊繁華, 萬里帝王家.

瓊樓玉殿, 朝宣絃管, 暮列笙琶.

花城人去今蕭瑟, 春夢繞胡沙.

家山何在? 忍聽羌管, 吹徹梅花.

(도읍의 번화함 기억이 새로운데 제왕가는 만리나 멀어졌구나

전각들에서는 조석으로 풍악소리 요란했는데

꽃 같은 궁궐은 주인 없어 쓸쓸하고 춘몽에 오랑캐 땅의 황사만 감도네

가산은 어디에 있느뇨? 오랑캐의 피리소리 듣노라니 매화가 속절없이 지는구나.)

이에 欽宗은 더욱 비감하여 다음과 같이 화답을 했다고 한다.

宸傳三百舊京華, 仁孝自名家.

一旦奸邪, 傾天折地, 忍聽琵琶?

如今在外多蕭瑟, 迤邐近胡沙.

家邦萬里, 伶仃父子, 向曉霜花.

(왕업이 3백년 전해온 도읍지였고 인효가 넘친 명문대가였소이다.

간사한 무리가 일조에 일어나 하늘땅이 뒤번져졌는데 비파를 듣는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은 밖에서 떠도는 신세라 쓸쓸함이 그지없고 오랑캐당의 황상만 짓궂게 감도는구만요.

집과 나라 만리나 떨어진 외톨이 두 부자는 새벽 서리 맞은 꽃과 같사옵니다.)

“이긴 자는 왕이요 진 자는 역적”이라는 것은 무정한 력사의 론리이고 또한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것 역시 무정한 력사의 론리임을 우리는 북송의 두 황제 휘종과 흠종의 말로에서 보게 된다.

4. 단어와 어순이 비슷한 거란어, 녀진어와 조선어

남송 때의 유명한 문인 홍매(洪邁, 1123-1202)는 소흥 말년에 한림학사의 신분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간적 있다. 금나라에서는 그를 강박하여 그가 올린 표(表) 중에서 남송을 신하의 나라라고 고치라고 하였으나 그가 거절하는 바람에 금나라의 사관에 억류되여 있다가 겨우 풀려나서 남송으로 돌아온 적 있다. 그 때의 체험으로 바탕으로 하여 저술한 잡록집『이견지(夷堅志)』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사실을 기록했다.

契丹小兒初讀書, 是以俗語顚倒其文句耳習之, 至有一字用兩, 三字者. 頃奉使金國時, 接伴副使秘書少監王補, 每爲與言以爲笑. 如“烏宿池邊樹, 僧敲月下門.”兩句, 其讀時則曰:“月明里和尙門子打, 水底里樹上老鴉坐.”. 大率如此. (《夷堅志》 第卷十八, “契丹誦詩)”

이를 조선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거란족의 아이들이 서당에 가서 글을 읽기 시작할 때에는 습관적으로 그네들의 말로 원문의 어구들을 거꾸로 놓고 익혔는데 원래는 한자인데 결국에는 두자, 석자로 늘어났다. 이전에 내가 어명을 받들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비서성 부장관 왕보라는 사람이 나를 배동하는 부사로 있었다. 우리들이 함께 있을 때 왕보는 늘 나에게 이러한 우스개를 들려주었는데, 이를테면 “조숙지변수, 승고월하문”이라는 두 구절의 시구를 읽을 경우에 거란사람들은 “달이 밝은데 중이 문을 두드리고 물밑의 나무우에 까마귀가 앉아있네”라고 읽는다고 했다. 대가 모두 이러하였다.

한족인 홍매가 한어의 자대로 거란어나 녀진어를 가늠해보니 거란어나 녀진어는 한어와 다른 두 가지 점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첫째, 단음단자단의(單音單字單義)인 한자한어와는 달리 거란어나 여진어는 다음절어라는 점이다. 그래서 홍매는 “원래는 한자인데 결국에는 두자, 석자로 늘어났다.”고 기록하였다.

둘째, 일반적으로 “주어→술어→보어”의 어순을 가진 한어의 어순으로 일반적으로 ““주어→보어→술어”의 어순을 가진 거란어를 바라보면서 홍매는 “ 그네들의 말로 원문의 어구들을 거꾸로 놓고 익혔다”고 기록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한어의 개사, 련사들은 흔히 앞에 놓이나 개사(介詞)나 관련사(關連詞)들과 비슷한 문법적기능을 갖고 있는 거란어의 조사들은 뒤에 놓이니 홍매 같은 한인들이 바라보니 자기네의 한어와는 어순이 전도되였다고 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거란어나 녀진어는 는 분명히 조선어와 비슷한 어순을 갖고 다음절어를 위주로 하는 점착어로서의 알타이어계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거란인들은 중국 동북경내에서 활약했던 고대 민족 동호(東胡)에서 발전된 민족이였다. 동호와 숙신의 중간에 위치하여 살았던 조선민족의 조상인 예맥(濊貊)은 혈통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홍매의 이상의 문자기록은 아주 짧은 기록이지만 상당히 소중하다.

당나라시기의 시인 가도(賈島)의 “烏宿池邊樹, 僧敲月下門”이라는 이 시구를 조선어로 번역해도 “月明里和尙門子打, 水底里樹上老鴉坐.”와 어순이 거의 완전히 같아진다. 즉 “까마귀는 못가의 나무우에 깃들고, 중은 달빛아래서 문을 두드리네.” 라고 번역을 하겠으니 역시 거란족의 아이들이 가도의 이 시를 어순을 전도하여 읽은 것과 꼭 같다.

사실 고려조나 조선조 시대의 사대부문인들이 동북경내에 사는 거란인이나 녀진인, 만족 등 유목, 수렵족들을 야인, 야만이라고 폄하하고 깔보았지만 사실은 같은 족속에 속했음을 이 한 단락의 기록에서 분명히 보아 낼 수 있다.

조선반도의 후세의 고루의 사대부문인들은 자기도 “오랑캐”이면서 자기는 “소중화”라고 자부하면서 루루 수백년 동안 자기와 같은 족속들인 거란, 녀진, 만족들을 오랑캐, 야인, 야만이라고 폄하하고 질시했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특히 함경도 사투리나 지명 같은 데는 녀진어의 요소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사례를 몇 개만 들어보기로 하자.

첫째, 함경도 사투리에서의 만주어의 요소

㉠ 순대는 만주어의 셍지두하(senggi - duha)에서 왔는데, 만족들이 많이 살았던 동북지역에는 지금도 혈장(血腸)이라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다. ㉡ 부스깨는 만주어 부스쿠(fusku, 鍋臺)에서 왔다.

㉢ 쌔씨개(미치광이)는 만주어 사스헤이(sashei, 畜生)에서 왔다.

㉣ 배재(울타리)는 만주어 바산(basan)에서 왔다.

㉤ 버들과 만주어의 보드(fodo)능 어원이 동원일 가능성이 높다.

㉥ 어시(어버이)는 만주어의 어시(exi)에서 왔다.

둘째, 지명, 산명, 강명 등에 보이는 만주어의 요소

㉠ 두만강은 만주어의 두만(수자 萬 또는 많다는 뜻)에서 왔음.

㉡ 나단산(함북 경원에 있는 살바우산의 별칭)은 녀진어 나단(일곱이라는 뜻)에서 왔는데, 나단산은 봉우리가 일곱개이다.

㉢ 함북단천과 성진과 마천령은 원래는 이판령이라고 했는데 이판은 여 진어로 소라는 뜻이다.

㉣ 함북 회령의 두만강지류인 보을천(甫乙川)의 만주어 보을에서 왔는데 보을은 버들이라는 뜻이다.

㉤ 지금 중국 경내의 두만강 수계에 속하는 가야하, 해란강, 부르하통하, 연지하 등 강명은 모두 만주어에서 왔고, 훈춘, 화룡, 왕청, 연길, 화룡 등 지명은 모두 만주어에서 왔다.

4. 마무리는 말

“개천에서 룡이 난다”는 말은 두만강 녀진족을 두고 말할 때 완전히 부합된다.

동부아세아의 오지이고 변두리였던 두만강류역에서 발원한 금나라의 녀진족은 중국 력사에서 두 번이나 패업을 이룩하였었다. 한번은 기원 12세기 초에 북송을 멸망하고 중원에 군림하여 연경에 도읍을 정하고 大金國帝國을 세워 회하이북의 광활한 땅덩어리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동북의 산림과 초원에서 힘을 기른 다른 한 세력 몽골족의 영웅 칭키즈칸의 군대에 의해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된다. 그러나 녀진족은 한 번의 좌절에서 영원히 주저앉는 그런 약골이 아니였다. 13세기 초반에 몽골에 의해 멸망된 후 지리멸렬되였던 녀진족은 다시 한 번 궐기하여 세인을 놀라게 한 패업을 이룩하였다. 즉 16세기 말 13필의 말과 13개의 갑옷을 가지고 녀진부락을 통일한 누루하치와 그의 후손들은 17세기 또 한 번 중원에 쳐들어가 중국을 통일하고 大淸帝國을 세워 270여년이나 중국을 통치했다.

그런데 이러한 大淸帝國의 기반을 처음으로 다진 만족의 핵심부분은 원나라 시기의 斡朶里部와 胡里改(兀良哈)이였는데 이 두 녀진부락이 모두 두만강 녀진이였음은 결코 력사의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다음 호에 상세하게 이야기하기로 한다.

아무튼 두만강 류역은 분명히 중국 나아가서는 동북 아세아의 력사에서 수많은 영웅과 제왕들이 배출된 興龍之地인 것이다. 숱한 천자가 나고 왕이 나고 장상(將相)들이 난 명당자리인 것이다.

2009년 4월 27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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