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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朝 王室의 발상지 豆滿江 유역을 이야기한다/김관웅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08.14일 13:02
朝鮮朝 王室의 발상지 豆滿江 유역을 이야기한다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조선조 왕실의 肇祖 穆祖의 來歷

조선조 왕실의 肇祖는 穆祖이다. 목조는 조선조의 건국주의 태조 리성계의 고조부이다. 본관은 全州, 이름은 安社이다. 장군 양무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李씨로 상장군 康齊의 달이라고 한다. 리성계가 즉위한지 3년이 지난 1394년에 4대조를 추존할 때 德을 베풀고 義로서 행하였다고 하여 穆祖로 追尊했다.

그러면 목조는 조상들은 어떤 사람들이였는가?

한국의 최고의 권위적인 백과서전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중의 “穆祖” 조목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성계의 가계가 력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경부터이다. 이때 武臣亂을 주도한 李義方의 동생 李隣이 李穡이 지은 ‘李子春神道碑’에 나오는 이성계의 6대조인 같이 보이므로 전주 이시 일족은 적어도 무신란 직전부터 무반직에 올라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의 인용문에서 보다 시피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며 실증적인 증거를 없다. 사실 목조인 안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래도 신빙성 있는 력사상에서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의 건국서사시인 『龍飛御天歌』에는 조선왕조 왕실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몇 마디로 소개하였다.

처음에 穆祖가 全州에 살았다. 관가의 妓生 일로 知州와 틈이 생겼다. 知州가 모해를 하여 穆祖는 강원도 三陟縣으로 옮겨가 살았다. 백성 가운데 따라서 옮기려고 한 집이 1백 70여 가구가 되었다. 후에 새로 안렴사가 왔는데 穆祖와 오래된 혐의가 있었다. 穆祖가 장차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가족을 끌 바다로 해서 함길도 덕원부에 이르러 살았다. 1백70여 가구가 또 모두 따라갔다. 이미 천하가 원나라에 들어갔다. 알동(斡東, 오동)지방으로 옮겨 갔다. 원나라는 穆祖를 5천호의 다루가치로 삼았다. 동북 지방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부터 붙좇았다. 왕업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였다.

穆祖는 혼자 몸도 아니고 가솔과 170여 호에 달하는 全州의 토착인들을 거느리고 全羅道 全州→江原道 三陟→咸吉道 德源→ 斡東(지금의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 일대)에 이르는 복잡한 이동 경로를 거쳤지만 그 과정에 대한 소개가 너무 疏漏하여 釋然치 않은 점이 많다. 더구나 전라도 남부에서 살던 사람이 종당에는 여진인들의 집거구역인 알동에 최종적으로 정착을 했을 뿐만 아니라 말 타고 활 쏘면서 사냥을 위주로 하는 强勇하고 쟁투적인 여진인들을 다스리는 “5천호의 다루가치”로 되어 20여 년 동안 알동에 거주하면서 자기의 세력기반을 아들 행리에게 넘겨주고는 바로 알동에서 죽었다. 그는 죽어서 두만강의 입해구와 맞붙은 경흥에 묻혔다. 이상 사실의 신빙성에 대해서 의심하는 이들이 아주 많다. 전라도 사람으로서 여진말도 잘 몰랐겠는데, 어떻게 여진인 5천호를 다스리는 다루가치 노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정말로 앞뒤의 사개가 잘 맞지를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아래와 같은 대담한 가설을 해보기도 한다.

穆祖 安社도 좋고 그를 다라서 전주에서 두만강 하류까지 이동해왔다는 170여 호의 流移民 집단도 좋고 모두 전라도 全州의 토착인 출신이라기보다는 두만강하류 유역의 女眞人들이 아니었을까? 倭寇를 물리치는 싸움에서 에서 수차 혁혁한 戰功을 세우고 고려왕조의 버팀목 같은 존재가 된 여진족출신의 리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조선의 왕권을 손안에 넣은 후에 자신의 통치를 순조롭게 하고 역성혁명이 몰아올 사회적 여론을 撫摩하기 위하여 자기의 家系를 꾸며낸 것은 아닐까? 혹은 李芝蘭이처럼 高麗에 귀화한 여진인이 아닐까? 물론 력사연구는 假說에만 의존할 수 없으므로 이 점에 대해서는 마땅히 앞으로 더 깊은 연구와 考證을 해야만 할 것이다.

『龍飛御天歌』를 보면 全羅道 全州로부터 咸鏡北道 豆滿江 하류의 斡東까지의 穆祖와 그를 따르는 流移民 집단의 移動過程과 定着過程에 대한 소개가 아주 疏漏한데 반해서 斡東에서 女眞人 5천호를 다스리는 다루가치 노릇을 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그래도 비교적 상세하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斡東 지방을 포함한 두만강 하류지방은 누누 수백년 동안 세세대대로 여진인들이 모여사는 고장이였다. 穆祖 安社와 그의 아들 翼祖 行里가 여진족의 5천호 다루가치를 지내면서 여진인들과 아주 친근하게 지내여 온 사실은 조선왕조의 건국서사시인『龍飛御天歌』에 자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狄人 사이에 가시니 狄人이 침범하거늘 岐山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뜻이니, 野人 사이에 가시니 野人이 침범하거늘 德源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듯이니, 오랑캐와 같은 곳에 살았다는 얘기는 앞에 있다.

穆祖가 斡東에 살 때 女眞의 여러 천호들이 사는 곳에 가면 저들은 언제나 소와 말을 잡아 며칠씩 향연을 베풀었다. 여러 천호들이 斡東에 穆祖도 역시 그와 같이 데접하여 드디어 자주 서로 연회를 열었다. 翼祖도 이것을 어 받아 그대로 했다.

많은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穆祖는 고려 이주(宜州, 지금의 조선 강원북도 안변군 북쪽)의 병마사로서 고원(高原, 지금의 조선 함경남도 영흥)에 살면서 몽골의 산길대왕한테 의탁하였다고 한다. 李安社는 散吉대왕의 파견을 받고 開元路南京(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길시 城子山城)의 관할 하에 있는 알동(斡東, 지금 조선 함경북도 慶源郡 일대)에서 5천호로 부임되여 다루가치(達魯花赤)의 관직도 겸하였다.

그러므로 연길시 동쪽에 있는 城子山城에도 穆祖의 발자국이 찍혀있으리라. 성자선성은 우리 등산팀의 주요한 등산 코스인지라 나는 이 산성에 적어도 열 번 이상은 올라갔다 온 적 있다. 역사는 알고 보면 이처럼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다.

두만강 하류 流域을 떠나게 된 翼祖

翼祖(생졸년 미상)는 조선조 건국주인 리성계의 증조부이다. 이름은 행리(行里)이다. 부친인 목조 안사가 죽은 이듬해인 1275년 알동 지방의 천호 및 다루가치의 직을 그대로 세습하였다.

穆祖도, 翼祖도 모두 考慮를 배반하고 모두 元나라에 붙은 세력이었다. 1300년에 翼祖가 원나라로부터 승사랑의 벼슬을 받은 것은 附元세력으로서의 확고한 지반을 닦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뒤로 익조는 점차 다른 女眞부락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때 元나라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원나라의 장군 散吉의 영향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이 점에 대해서『龍飛御天歌』는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후에 翼祖의 위엄과 덕이 점점 커지자 여러 천호가 이를 싫어하여 모해하려고 다음과 같이 속여 말했다.

“우리가 북쪽에 사냥을 갔다 올테니 청컨대 모임을 20일 동안은 하지 맙시다.”

익조가 응낙하였다. 그러나 기일이 지나도 오지 않으므로 익조가 몸소 해관성(奚關城)으로 갔다. 길에서 머리에 물통을 이고 손에 밥그릇을 들고 오는 한 노파를 만났는데, 익조가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려 하자 노파가 그릇을 닦아 물을 담아 올렸다. 그러면서

“공께서는 모르고 계십니까? 이곳 사람들이 사실은 군대를 부르러 간 것입니다. 당신의 위엄과 덕이 아깝기 때문에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라고 말했다.

익조가 황급히 돌아와 집안 식구들에게 배를 타고 두만강을 좇아 내려가 赤島에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孫婦人과 함께 경흥 뒷언덕에서 알동의 들판을 바라보았니 적병이 들판에 가득하고 선봉 3백여 인은 이미 가까이 왔다. 익조와 부인이 말을 달려 바닷가 언덕에 이르렀다. 해안으로부터 적도는 6백보쯤 되였다. 본래 여기는 밀물, 썰물이 없고 깊으므로 건널 수가 없는 곳이였다. 그러나 약속한 배는 아직 오지 않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물이 빠져 1백여 보 정도만 물이 남았다. 익조와 부인이 백마 한필을 같이 타고 건넜다. 따르는 사람들이 다 건너자 물이 다시 크게 일어 건너지 못하고 돌아갔다. 북방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하늘이 한 일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익조가 드디어 움집을 만들어서 살았는데 그 터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알동사람들은 익조가 적도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붙좇아 왔다. ”

이상의 인용문에서 나오는 奚關城이 바로 명청시기에는 裴優城으로 이름이 바뀐 그 성이다. 즉 익조는 바로 지금의 훈춘 삼가자향 고력성촌에 있는 여진인들이 자기를 모해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재빨리 이곳을 탈출하여 두만강하류의 赤島로 피하여 화를 면했던 것이다. 이상의 사건은 그 지점, 장소가 모두 진실한 장소이고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도 아주 자상하게 소개했다.

翼祖는 한 동안 적도에서 살다가 배 10척을 만들어 지금의 함경남도 남도 德源부에 옮겨와 살 때 斡東사람으로 따라온 사람들이 시장에 오는 것 같이 많았다고 한다. 이 翼祖를 따라 德源으로 온 이 斡東 사람들 중에는 女眞人들도 많이 섞여있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穆祖와 翼祖가 두만강 河口의 斡東지방에서 女眞人들 사이에서 5천호 다루가치로 있으면서 女眞人들과 朝夕으로 코 맞대고 같이 산 시간은 어림잡아도 반세기 이상은 된다.

고려의 동북면에서 기반을 닦은 리성계의 부친 李子春

『龍飛御天歌』에서는 목조와 익조 이후의 리성계의 가문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穆祖가 죽자 翼祖가 이었다. 翼祖가 죽자 度祖가 이었고, 度祖가 죽자 맏아들 子興이 이었는데, 오래지 않아 죽었다. 아들 천계가 나이가 어리므로 원나라에서는 桓祖에게 이을 것을 명하였다.

度祖(?-1342)는 翼祖의 넷째 아들로서 모친은 斡東百戶 朴光의 딸이다. 이름은 춘(椿)으로서 元나라로부터 부친의 千戶관직을 계승하였다. 1394년 李成桂가 4대조를 추존할 때 度祖로 추존했다. 桓祖(1315-1360)은 리성계의 부친으로서 이름은 子春이다. 조카 咬住가 장성할 때가지 잠정적적으로 형인 李椿의 千戶 관직을 襲職하였으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독자적인 체제를 굳혔다. 李子春은 元明교체기에 대세를 빨리 파악하고 1355년에 反元政策을 추진하고있는 고려의 공민왕에게 몸을 의탁하여 그이듬해에 동북면에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流移民(여진인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을 것으로 사료된다)들을 이끌고 99년 만에 東北面으로부터 원라 황제의 황후로 된 奇皇后를 등댄 親元 奇氏세력을 제거하는데 큰 功을 세웠다. 동시에 자기가문에서 자기와 크게 대립하는 형수 趙氏세력을 동시에 제거하여 그야말로 一石二鳥의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이때의 戰功으로 高麗 朝廷으로부터 大中大夫大僕卿이라는 큰 벼슬을 제수 받아 오래 동안 자기의 기반이었던 東北面을 떠나 開京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李子春을 開京에 붙잡아둔 것은 많은 朝臣들의 제의에 좇아 동북면의 그의 세력기반과 격리시키기 위함이었지만 1년이 지난 뒤에 恭愍王은 李子春이 아니면 東北面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朔方萬戶兼兵馬使로 임명하여 다시 영흥으로 돌려보냈다.

그 뒤 東北面에 돌아온 李子春이 4년만에 病死하는 바람에 당초 朝臣들의 염려는 잠시는 杞憂로 끝났다.

리성계의 조선건국의 세력기반 동북면의 여진인들

그러나 고려 朝臣들의 염려는 결코 杞憂는 아니였다. 王氏 高麗를 뒤집어엎고 李氏 朝鮮으로 바꾸어버린 易姓革命은 그 뒤로 30여 년 후에 바로 李子春의 아들 李成桂(1335-1408)에 의해 이루어졌다.

1361년, 李子春이 죽은 뒤 그 아들인 李成桂는 通議大夫金吾衛上將軍東北面上萬戶되여 弱冠으로 정3품의 중앙무관직과 先祖의 기반인 上萬戶의 두 가지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는 리성계가 동북면의 토착기반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의 세력기반이 되기도 했다.

李成桂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內亂 평정과 북방의 오랑캐와 倭寇를 몰아내는 수많은 싸움판에서 용맹을 떨치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고려의 社稷과 江山을 튼튼히 받혀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러나 獨不將軍이라고 李成桂의 이러한 戰功을 받쳐준 것은 그의 세력기반인 동북면의 토착군사세력이었다. 그 토착군사세력에서의 핵심적 요소는 말 잘 달리고 활 잘 쏘는 女眞族의 용맹한 將兵들이였다. 그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 청나라의 肇祖로 追尊된 童猛哥帖木兒(?-1433)와 李芝蘭(1331-1402)을 들 수 있다.

童猛哥帖木兒는 젊은 시절에 리성계의 招撫를 받아 倭寇 소탕에 참가하여 軍功을 세워 鏡城萬戶로 책봉 받기도 했다. 그러나 1406년 明나라 조정에 의해 建州衛의 도지휘사로 책봉 받아 조선을 배반한 것 같았지만 어려움에 봉착하면 다시 조선에 찾아와서는 李成桂와의 이전 날의 친분을 빙자하여 식량과 거주지를 해결해 달라고 청을 들기도 했다.

……나는 젊은 시절에 태조(리성계를 가리킴)의 招安을 받았고 그분으로부터 農牛, 農器, 식량, 의복 같은 것을 지급 받았었고 阿木河에 살 수 있도록 允許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금면 6월 초 이튿날 자는 제가 관할하는 백성 523호를 이끌고 또 阿木河에 찾아왔습니다. 식량을 지급하여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여기에서 나오는 阿木河는 지금의 두만강하류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 함경북도 慶源郡이다. 童猛哥帖木兒가 조선에 향해 이런 요구를 제기한 것은 1423년 6월 2일의 일이였다. 그때 童猛哥帖木兒는 자기부락의 1천명의 장졸을 거느리고 명나라의 지령을 받들어 韃韃人들을 정벌하려 출정하였었다. 그러나 韃韃人들의 보복이 두려워 명나라 황제에게 다시 두만강 동쪽 유역에 가서 살겠다고 요구하여 明나라 朝廷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 童猛哥帖木兒가 거느린 斡朶里부락의 인구는 正軍 1천명과 婦女子와 아이들을 합치면 도합 6,250명이였다.

阿木河는 童猛哥帖木兒의 斡朶里부락 사람들의 고향이였고 동시에 리성계의 조상인 목조, 익조가 오래 동안 살았던 고장이기도 하였다. 한 고장에서 발원한 사람들중에서 天子도 나오고 王도 나왔으니 慶源 땅은 말 그대로 興龍之地이다. 그러나 天子의 조상도 한 때는 궁색하게 조선의 왕인 리성계의 후손들에게 궁한 사정을 해야 했던 것이다.

고향 阿木河에 다시 돌아와 정착하게 된 童猛哥帖木兒는 고향의 옛 친구인 慶源千戶 金光秀를 보고 반가워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정말 오늘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생각 못했네! 전하의 덕분에 다시처자들을 거느리고 찾아왔네. 나라에서 먼저 식량과 종자를 주었으니 너무나 감사하고 기쁘네. ………우리들이 중국에서 사는 곳은 達達과 가깝네. 황제님께서는 達達이 시끄럽게 굴까봐 각가 자기들이 살던 고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했어. 우리부락의 온 500여 호가 먼저 왔고 아직 도착하지 못한 게 500여 호가 되네. 경인년에 조선을 배반하고 중국에 의탁한 것은 부득이한 거였네. 우리가 어찌 조선의 은덕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금년에도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을 얻어가졌으면 하네.

이 해인 1423년 6월 19일에는 童猛哥帖木兒의 모친 및 동생 沙哈, 凡察과 女眞千戶 楊木答兀도 阿木河에 도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과 女眞 사이의 관계는 아주 원활했다. 女眞을 이처럼 懷柔하고 보듬을 수 있은 것은 리성계의 조상으로부터 女眞人들과 세세대대로 긴밀한 유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李芝蘭은 조선동북면의 녀진인출신으로서 원래의 이름은 古論豆蘭帖木兒이고 漢姓은 佟씨로서 閼朶里부락의 성씨이다. 즉 淸皇室의 조상들과 성씨가 같다. 李芝蘭의 출생지는 조선 함남 北靑이고 젊은 시절에 李成桂와 결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부친의 벼슬을 이어받아 千戶가 되었으며 1371년에 부하들을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여 北靑에 거주하면서 李씨성과 본관 靑海를 하사 받았다. 그러므로 靑海 李씨의 뿌리는 女眞이다.

1380년, 李芝蘭은 李成桂의 偏將으로 阿其拔都가 이끄는 왜구를 무찌른 황산대첩에서의 이 두 사람의 긴밀한 협력을 『龍飛御天歌』에서는 아주 상세하게 묘사했다.

賊將 가운데 나이가 15-16세 되는 자가 있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데다가 용감하기가 비할데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말 달려 돌진하면 향하는 곳은 모두 쓰러져 감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我軍에서는 阿其拔都이라고 부르며 다투어 피했다. 태조(李成桂)가 그 용기와 날카로움을 아껴 李豆蘭(즉 李芝蘭)에게 사로잡으라고 명했다. 李豆蘭은 죽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다칠 것이라고 말했다.

阿其拔都는 甲冑, 護項, 面甲을 썼으므로 활을 쏠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꼭지를 쏘아 벌길 테니 너는 바로 쏴라.”

라고 하고는 드디어 말을 달려 활을 쏘아 꼭지를 정통으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 투구가 비스듬히 벗겨졌다. 阿其拔都는 급히 투구를 바로했다. 태조가 다시 쏘니 또 꼭지에 맞아 드디어 투구가 떨어졌다. 李豆蘭이 쏘아 죽였다. 이에 적의 기세가 꺾였다.

李芝蘭은 왜구를 무찌르는 전투들에서만이 아니라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참가하였고 李成桂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공훈으로 回軍一等功臣, 開國一等功臣 靑海君으로 봉해졌다.

리성계의 조상대로부터 오래동안 길러온 동북면의 세력기반이 李成桂의 易姓革命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李芝蘭을 통해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군대 내부만이 아니라 동북면의 백성들과 女眞人들 중에서 李成桂의 威望이 아주 높았음은 『龍飛御天歌』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동북면의 백성과 종군하지 않은 여진 사람들 가운데 태조가 回軍하였다는 말을 듣고 晝夜로 급히 달려온 사람이 1천여 명이 되었다.”

우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리성계의 회화도 회군은 “동북면의 백성과 종군하지 않은 여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이요, 두 번째는 “從軍하지 않은 女眞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아서 리성계의 군대에 종군한 女眞人 將兵들이 아주 많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수렵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여진인들은 생업자체가 군사흔련이었기 때문에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族屬들보다는 騎馬術과 弓術 같은 군사기술과 전투력이 비할 바 없이 높았던 까닭이었다. 리성계의 군대들은 바로 이런 女眞人 將兵들을 根幹으로 하여 조직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龍飛御天歌』에서는 “동북쪽 지방은 본래 나라가 비롯된 곳”이라고 했던 것이다.

李成桂의 가장 중요한 군사 및 정치적 자본으로 되었던 동북면의 세력기반이 이미 공민왕시절부터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음은 1383년에 9년간에 걸친 유배,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의 도지휘사로 있었던 리성계를 찾아가 그와 인연을 맺은 그 당시에 鄭道傳(1337-1398)이 감탄하면서 은밀하게 한 말과 소나무에 새긴 시에서 잘 나타난다.

정도전이 일찍이 태조를 다라 동북면에 와서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의대오가 정 제된 것을 보고 은밀히 말하기를,

“이 군대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안 될 일이 없겠습니다.”

라고 했다. 태조가 무슨 말이냐고 하자 정도전은 둘러대서 말하기를

“동남쪽의 倭를 친다는 말뿐입니다.”

라고 했다. 군대의막사 앞에 老松 한 그루가 있었는데, 정도전이 그 소나무에 시를 쓰겠다고 했다. 소나무를 깎아내고 거기에 시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있어

靑山에서 거듭거듭 얼마나 자랐나

잘 계시오. 다른 날 서로 만날 수 있겠지요.

굽어보고 올려보는 사이에 문득 옛 자취가 되는구료.

이것은 대개 하늘의 命이 태조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재촉하는 것이다.

정도전 같은 변혁을 갈망하는 선비들만 아니라 崔塋(1316-1388), 李穡 (1328-1396)같은 기성세력들도 李成桂를 社稷과 江山을 지킬 수 있는 한 때는 支柱로 생각했다. 물론 위화도 回軍 후에 崔塋 같은 이들은 李成桂한테 목이 잘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늙어빠져 기력이 쇠진한 고려왕조를 李成桂가 지금의 시체말로 하면 쿠데타를 통해 뒤엎고 조선왕조를 세운 것은 역사발전의 법칙에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易姓革命을 武力으로 지지한 세력 중에서 그 핵심적략량이 바로 女眞人들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9년 5월 4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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