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재발견
장충동 관우 사당 ‘관성묘’
소설 삼국지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관우는 죽어서까지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이자 용맹한 장수였다. 이런 관우를 모신 사당이 서울에 있다. 사진은 중구 장충동에 있는 관성묘(關聖廟)의 내부. [서울 중구청 제공]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장수 관우(關羽)는 소설 '삼국지'에서 최고의 무장으로 꼽힌다. 그가 휘두르는 청룡언월도에 적군의 목이 후드득 떨어져 나간다. 남다른 충성심으로 죽은 뒤에도 혼령으로 나타나 주군 유비를 찾아 나라를 걱정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난 뒤에는 관왕(關王)으로 불렸고, 나아가 관성대제(關聖大帝·성스러운 황제)로 추앙됐다. 중국 도교에서는 그를 신으로 추앙하기도 한다. 관우에 대한 이런 예우와 경외심은 우리나라에도 전파됐다.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온 명나라 군대에 의해서다.
중구 방산동에 있는 또 다른 관우 사당인 성제묘(聖帝廟)의 모습. 7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동호로 30길. 차들이 달리는 대로변 옆에 오래된 기와 대문이 나왔다. 관우를 받들기 위해 세워진 관성묘(關聖廟·서울시 민속문화재 제6호)다. 계속 안으로 들어가자 맞배지붕 모양의 작은 집이 있다. 사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18세기 화풍으로 그려진 관우 부부상이 좌우로 있다. 녹색 전투복에 금빛 견장을 붙이고 투구를 쓴, 긴 수염을 늘어뜨린 삼국지 속 관우의 모습이다. 옆에는 녹색과 붉은색으로 꾸며진 옷을 입은 관우의 아내가 있다. 심재승(65) 관성묘관리위원회 회장은 "관리 문제로 평소엔 문을 닫고 참배하겠다는 사람이 오면 열어준다"고 말했다. 관성묘관리위원회는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를 포함해 네 차례 제사를 지낸다.
관성묘는 조선 말 고종의 비(妃)인 엄귀비(嚴貴妃)에 의해 지어졌다는 설이 전해진다. 임진(1592)·정유(1597)왜란 때 명(明)나라 장수 진린(陳隣)이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평소 관우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진린이 울산 전투에서 중상을 입자 완쾌를 기원하기 위해 이 사당을 세웠고, 실제로 완치됐다는 것이다. 관우 사당은 관성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 중구 방산동의 성제묘(聖帝廟), 동작구 사당동의 남묘(南關王廟·남관왕묘), 종로구 숭인동의 동묘(東廟) 등도 있다. 지금은 동묘와 합쳐진 북묘, 서묘도 관우사당이었다.
그렇다면 왜 관우사당이 한국, 서울 땅에 만들어진 것일까. 관성묘를 세운 진린처럼 많은 명나라 병사가 관우의 신령이 도와서 왜군을 물리쳤다고 생각했다. 이에 조선도 보답으로 동묘를 세웠고, 조선 말까지 서울 곳곳에 관우 사당이 세워졌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나각순 연구강사는 "관우가 주는 의미 때문"이라며 "관우는 군신이기도 하지만 토속신앙과 맞물려 재물을 풍성하게 해주는 재신(財神)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관우 사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갈공명을 기리는 사당이 중구 예장동과 용산구 보광동에 있다. 그러나 유비·장비·조조 등을 기리는 사당은 서울엔 없다. 중구문화원 김동주 학예사는 "충의(忠義)를 중시하는 유교의 영향이 나라를 걱정하는 관우와 제갈공명의 사당을 서울땅에 만들게 한 것"이라며 "지금은 동묘와 합쳐진 북묘도 고종임금이 '관우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키려고 세웠다'는 설이 있다"고 말했다.
최모란 기자 < moranjoongang.co.kr >
서울의 관우 사당
- 관성묘 관우와 관우부인 상을 모심 (중구 장충동·서울시 민속자료 제6호)
- 동관왕묘 또는 동묘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주창 등을 모심 (종로구 숭인동·보물 제142호)
- 성제묘
관우 사당 (중구 방산동·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호)
- 남관왕묘 또는 남묘
관우 사당 (동작구 사당동)
- 서묘·북묘
현재 동묘와 합쳐짐
중앙일보 최모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