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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처럼 나타난 중국조선족 영화인- 장률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0.01.27일 10:26

장률 프로필:

영화감독. 1962년 생

중국 길림성 연변대학 중문학부 졸업

주요 영화작품: 11세 (2000), 당시 (2004), 망종 (2005), 이리 (2007), 중경 (2008) 등

주요 수상: 부산국제영화제,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페사로영화제 베소울국제영화제 시네마누보 필름페스티벌 등 다양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

현재 북경에 거주. 중국 포탈사이트들의 검색창에 장률이라고 치면 거개가 이런 프로필이 뜬다. 그리고 프로필에는 특별사항이 하나 곁들여져 있다.

특별사항: 중국조선족

그렇다. 그는 중국조선족으로서 영화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존재였다.

불혹을 앞두고 영화와 연애에 빠지다

장률은 문화대혁명 전야인 1962년 5월 30일 중국 길림성 변강의 소수민족 도시인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당 간부였던 아버지는 그 전례없던 동란시기에 돈화로 추방되어 5년 넘게 옥살이를 했다. 그런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가 세 누이와 장률을 데리고 감옥부근의 한족마을에서 살았다. 다른 지역, 다른 언어환경에서 사춘기의 장률은 말더듬이 증상까지 보이는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즐겼던 그는 문학을 탈출구로 삼고 연변대학 중문계 문학창작반에 입학했다. 1987년 문학창작반을 졸업했고 연변대학 교원으로 취직했다.

대학가 교원경력까지 가진 그가 불혹을 앞둔 38세라는 나이에 영화를 시작하게 된 것은 교원직을 그만두고 교정을 떠나면서부터 였다. 1989년 그는 고향을 떠나 당시 모든 이들이 선망하는 도시였던 개혁개방의 전초(前哨)― 북경으로 떠났다.

막상 북경까지 들어왔지만 아무런 연줄도 없었고 직장도 구할수 없었다. 무가내로 안해의 로임에 기대여 아이 키우고 장보며 살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어언 10여년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하루 평소 알고 지내던 영화감독이 찾아와 그에게 씨나리오 한편 써볼 의향이 없냐고 집필을 의뢰했다. 백수로 내내 안해와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지내던 장률은 무언가 할 일이 생겼다는 의무감에 다시 한번 열심히 씨나리오를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친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장률의 씨나리오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친구가 미안쩍은 마음에 술 한잔 샀고 친구와 설전을 벌인 술자리에서 장률은 술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한마디를 버럭 내뱉았다. 그 한마디가 바로 그의 인생을 바꾸어 버린 한마디었다.

《영화가 뭐 그렇게 대단해? 내가 한번 찍어볼란다!》

숙취에서 깨던 다음날 아침 자신의 오기를 후회했지만 《영화를 찍겠다》던 그 말만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장률의 머리속에 남아있었다. 한번 뱉은 말에 타협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그의 군자적인 성품이었다. 그래서 그는 팔자에도 없었던 영화를 찍기로 했다. 영화를 찍겠다며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모두들 《영화공부도 못해 본 네가 이제 와서 영화는 무슨 영화냐?》고 조소를 흘렸다. 그런 그에게서 어떤 진정을 보아냈던지 친구 하나가 기왕 해보고 싶다면 먼저 단편 영화를 찍어보라고 일러주었다. 그게 성공하여 명성도 나고 돈도 모이면 다시 장편을 시도해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장률은 친구들에게서 빌린 돈으로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때가 바로 2000년 새 세기의 첫해, 그것이 한 조선족영화감독의 벅찬 첫 걸음마이기도 했다. 장률은 첫 단편 영화로 《11세》라는 씨나리오를 찍기로 했다. 오기처럼 시작하게 된 영화 《11세》의 촬영 첫날, 장률은 떨리는 소리로 스탭들 앞에서 《액션!》을 웨쳤다. 촬영하는 내내 헤매고 버벅대던 장률은 차츰 전렬(냈죗)을 가다듬었다.

《영화만의 흐름과 리듬은 무엇일까? 쓸데없는 이야기는 버리고 정서만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못나게 허둥대며 영화를 완성해가면서 장률은 천천히 자신만의 대답을 찾아갔다. 어떤 명작 영화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는 완전히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기준으로 영화를 찍고 있었다. 이렇게 장률의 첫 영화 《11세》는 아무런 대사도 없이 이야기도 모호하지만 간결한 문체, 풍부한 감정을 담은 영화적 의미로 꽉 차 있는 영화가 되었다.

데뷔작에 관해 화제를 꺼내면 장률은 《나는 그때 영화를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나 자신은 이미 그 영화에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그의 영화는 그렇게 그만의 진심을 담고 있었다.

단편으로 영화에 어섯눈을 뜬 뒤 장률은 여태껏 자기가 꿈꾸어왔던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맹렬한 흥분과 친근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서른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또 그것이 세속적인 미래가 보장되는 일도 아니었지만 장률은 영화의 특별한 힘을 믿었고 그 매력에 매료되어 버렸다.

그는 두번째 영화를 만들기로 작심했다. 《당시》라는 제목의 당시의 리듬을 모방하는 형식의 영화 한편을 만들고 싶었다. 2003년 4월 그는 북경의 어느 자그만 술집에 촬영기사와 조명기사를 청했다. 그때는 세상을 놀랜 사스가 한창 기승을 부려 인심이 흉흉하던 때였다. 하지만 공포의 전염병도 영화에 심취된 그의 정열을 막을수 없었다.

초저예산으로 35mm, 87분 분량의 영화 《당시(唐詩)》는 그렇게 나왔다. 촬영 기사의 집에서 11일동안에 만들어낸 영화 《당시》. 영화의 형식은 간결하지만 문체가 풍부한 당시의 표현처럼 영화는 육체적으로는 살고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한 소매치기군의 일상을 통해 저하층 인간들의 무의미하고 초라한 삶을 그려보이고 있다.

막상 만들었지만 후반작업을 할 여력도, 돈도 장률은 없었다. 그는 몇해 전 중국에 들렸을 때 만난 한국의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리창동을 머리에 떠올렸다. 당시에는 소설가라는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리창동은 영화로 전향해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등 작품으로 세계영화제에서 련이어 우수상을 수상했고 한때 한국 문화부 장관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었다.

리창동을 믿고 장률은 무작정 한국으로 필림통을 들고 들어왔다. 리창동은 이렇게 대책없이 오면 어떡하냐고 기가 막혔지만 그에게서 정열과 끼를 보아내고 한국에서 영화의 후반작업을 할수 있도록 도와줬다. 영화에 대한 한 중국조선족의 정열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2003년 《당시》는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지원작으로 당선되었다.그렇게 장률의 열정과 끼를 담은 영화는 고마운 이들에 의해 베니스영화제에까지 추천됐고 어느날, 기적같게도 단편 경쟁부문에 선정됐다는 답변이 왔다.

첫 장편영화 《당시》 포스터.

《망종》, 뿌린대로 거두어 들이다

이때 장률은 한국에서 또 한 사람의 한국영화인을 사귀게 되었다. 한국영화진흥위원에서 색보정 기사로 일하던 최두영을 만난 것이다. 2000년 겨울, 이전부터 장률감독과 평소에 알고 지내던 감독 한 사람이, 중국동포가 만든 단편의 후반작업을 도와달라고 그에게 부탁했고, 《11세》의 비디오 편집본을 처음 봤는데 느낌이 좋아서 꼭 완성을 돕고 싶어 나선것이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서로 미래를 맡기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한 중국조선족 초짜감독을 믿고 최두영은 덜컥 제작자로 나서버렸고 장률도 덜컥 두번째 장편영화 《망종》을 찍어버렸다. 제목 《망종》은 곡식을 거둬들이는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의 한 대도시에서 김치를 팔며 어린 아들과 함께 사는 조선족 녀인의 삶을 담은 영화는 농경사회에서 공업사회에 당착한 이들의 곤혹을 보여주고 있다. 《망종》은 2005년 제10회 부산영화제에 참석하는 행운을 지녔고 영화제는 이 조선족 감독에게 뉴커런츠상을 안겨줌과 동시에 그의 세번째 장편 《두만강》을 부산프로모션플랜 지원작으로 선정했다. 영화는 이어 칸영화제 비평가부문에서 상영되었고 프랑스독립영화배급협회(ACID)상과 이탈리아 피사로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며 호평을 받았다. 또한 베소울국제영화제, 시네마누보 필름페스티벌 등 다양한 국제 영화제에서도 수상을 거듭했다. 데뷔작 《당시》를 거쳐 역시 조심스럽게 내놓은 《망종》.

장률은 조용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한국 영화계의 시선을 끄당겼다. 그들은 한국 영화계에 꾸준히 등장하는 한 조선족 감독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은 장률의 영화를 보며 한국영화의 외연과 내포를 점검해야 할 시점이라고 평했다.

《아세아 네트워크》의 연장선 상에서, 그리고 한국영화를 재사유하는 개념틀을 구체화하는 차원에서 재외 동포감독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영화 《망종》 포스터.

조선민족의 정체성에 앵글을 맞추다

뒤늦게 시작한 장률의 영화인생은 그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영화계의 묵직한 시선을 받으며 장률은 주마가편으로 네번째, 다섯번째 영화들을 만들어 냈다.

2007년에 제작한 영화 《경계》는 인간과 뿌리 뽑힌 삶에 대한 근본적이고 예리한 시선으로 경계가 보이지 않는, 사막화 되어 가는 초원에서 숨쉬는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그해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으로 선정되었으며 향항국제영화제, 빠리시네마,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되었다. 2008년에는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손탁 넓게 두편의 영화를 동시에 만들었다. 《중경》과 《이리》. 《이리》는 1977년 이리(현재의 익산)역 폭발사고를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한국 전역을 놀래운 사건을 재현하는 영화를 한 중국 조선족 감독에게 맡긴 것은 그에 대한 신뢰와 그의 독특한 영상세계에 매료되어서였다. 《이리》는 한국에서 호평을 받으며 상영된 후 이탈리아 로마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올해 5월 부산에서 중국 감독 2인의 영화특별전이 개최되었다.

중국 감독 가장극과 장률의 특별전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영화제로 세계 유수(有數)의 영화제에서 널리 알려진 부산에서 열린 중국감독 2인의 영화전은 한국 내지 아세아에서 찾아온 영화팬들의 각별한 주목을 끌었다. 가장극감독은 중국 독립영화의 《대부(代父)》격으로 널리 알려진 감독이다. 특별전을 조직한 관계자는 중견 감독으로 발돋움한 두 사람이 《 소신있게 지켜온 소중한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수 있는 기회를 한국관중들 앞에 마련》하고자 기획했다고 그 의도를 밝혔다.

장률은 이제 13억 중국관중 나아가 베니스 등 세계 정상급영화제에서도 이름 쟁쟁한 거장과 어깨 나란히 특별전까지 펼치게 되었다. 또한 2007년 서울 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고 젊은 감독들의 프로듀서로도 활동하는 등 진짜 영화인으로의 인생길을 걷고 있다. 장률은 이전보다 더 웅숭 깊은 소리로 끊임없이 액션을 외치고 있다.

중국의 소수 민족감독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은 조선족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그를 세상에 알린 영화 《망종》에서 여주인공은 다른걸 팔수도 있었을텐데 굳이 김치를 팔게 만들었다. 김치를 팔 때 그가 조선족이라는것이 첫눈에 드러나고 조선족만으로서의 어떤 울림을 가질 것이라느 생각에서였다.

《망종》에서뿐 아니라 《경계》는 몽골과 중국 경계에 사는 조선족 모자, 《두만강》은 조선족 소년의 우정을 담고 있다.

이렇게 첫번째 데뷔작부터 일관된 철학과 민족적 스타일을 우직하게 밀어붙인 흔적이 력력한 영화들은 조선족의 삶을 통해 그들의 애환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담아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문자답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영화나 한국영화와는 또 다른 조선족영화인의 나름의 감수와 탄탄한 시선이 그 영화들에 깃들어 있고 민족에 대한 근심과 배려, 세상의 동향에 민감한 예술가의 예민한 령혼이 드러나있다. 애초에 영화감독이 될 운명이 없었다고 모두가 정평을 내렸던 그는 어느새 중국과 한반도에서 촉망받는 영화감독이 됐다.

술김에 시작한 《어이 없는》 감독 데뷔 계기에 비하면 그 결과가 눈부시다. 늦깍이로 시작했지만 세상을 어루만지는 예술적 그릇인 영화의 농밀한 롱탕질의 기쁨과 단맛을 그는 알게 되었다.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장률은 《첫사랑을 하는 심정으로 계속 영화를 찍을것》이라고 했다.

거기에는 삶에 대한 높은 추구와 집요한 어루만짐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특별 사항으로 기록되는 한 조선족 영화인이라는 신분이 주는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

/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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