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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길 - 내몽골초원에 핀 아름다운 진달래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09.11.24일 10:23
내몽골자치구 아영기 신발조선족향 향장 윤창길을 만나본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치치하얼에서 장거리뻐스를 타고 두시간 달리면 내몽골자치구 후룬베르지구의 아영기에 도착한다. 여기 아영기에는 내몽골자치구의 유일한 조선족향인 신발조선족향(阿荣旗新发朝鲜族乡)이 있다.

아영기 신발향은 대흥안령 남쪽기슭의 아룬하강반에 오붓하게 자리잡고있었다. 《아영》이란 말은 만족어 《아룬》에서 본딴 말인데 만족어에서 《아룬》이란 말은 《청결하다》, 《깨끗하다》는 뜻이다.

여기 아룬하강반에는 민족사업을 발전시키고 향내 촌민들의 행복한 생활과 경제수입을 보장하기 위해 고심하고 혼신을 사업에 바치는 코기러기가 있으니 그가 바로 아영기 신발조선족향 향장 윤창길이다.

내몽골자치구당대표인 이 토배기농민출신은 올해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개인으로 선발되였다. 향장으로 부임된 지난 8년시간에 윤창길은 아영기에서 면적이 제일 작고 인구가 제일 적으며 경제발전수준이 제일 낮은 신발향을 일약 사회경제발전의 각항 지수가 제일 높은 향으로 발전시켰다.

소개에 따르면 1948-1949년 흑룡강성 목단강과 길림성 통료 일대의 30여호 조선족들이 3차 이주하여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4개 조선족마을을 형성하여 1956년 8월 6일에 신발조선족향을 설립하였다.

현재 향 산하에 행정촌이 7개 설치되여있는데 신발촌과 동광촌 두 촌이 조선족촌이다. 신발향에는 조선족이 제일 많을 때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후 조선족인구가 해마다 조금씩 줄어들어 목전 인구는 700여명으로 전 향 총인구(9545명)의 8%좌우를 치지한다. 향에는 조선족외 기타 한족, 몽고족, 다워족, 어룬허족, 만족, 회족, 시버족 등 7개 민족이 함께 단란하게 모여살고있다.

향정부 건물은 윤향장의 노력으로 정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금년에 촌민들과 가까운 동광촌에 2500여평방메터 되는 새 건물을 락성, 건물설계는 특별히 연변에 가 민족특색이 다분한 풍격으로 보기좋게 3층건물로 이루어져있다.

향정부 1층 대홀에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 민족오락문화를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 한폭이 걸려져있다. 민족복장을 차려입고 손으로는 굉가리를 치고 상모춤을 추는 남성과 치마저고리를 곱게 입고 북춤을 추는 녀성이 그려진 그림이다. 동북3성에 비해 조선족인구가 보다 적은 내몽골에서 민족특색이 짙은 건물과 그림을 볼수 있다는것은 생각밖의 일이였다.

향장사무실에 들어서면 윤향장이 앉는 책상 뒤면에는 《낙수물이 대돌을 둟는다》는 표어가 씌여진 액틀이 걸려져있다. 이오로지 향의 민족사업과 촌민들의 치부발전이란 목표를 향해 달려온 윤향장의 꾸준한 사업스타일을 보여주는듯 하다.

윤창길향장이 설계한 조선민족풍정거리에 세워진 남녀로소의 네 얼굴(四面) 사면팔방에서 오는 손님들을 웃는 얼굴도 환영한다는 의미가 담겨져있다.

조선말을 다시 배우는 향장

올해 45세나는 윤창길은 동년생활을 신발향농촌에서 지냈다. 학창시절 학습성적이 우수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고중을 졸업한후 부대에 입대해 공부를 견지했다. 3년후 제대한 그는 시험에 뽑혀 아영기법원에 배치받아 16년동안 사업했다. 말단 서기원으로부터 조리심판원, 심판원, 부정장(庭长), 판공실주임, 당조성원으로까지 발탁한 그는 전도가 양양했다.

그러던 2001년, 조직부문에서는 신발조선족향에 소수민족간부가 모라자다며 그를 3년동안 설득하다 못해 그해 아예 대리향장으로 조동시켰다. 갓 조동되여왔을 때 윤창길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사업환경도 그렇고 모든것이 법원에 비해 조건이 차했으며 향에 자금이 없어 사업을 전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한해한해 지나면서 그는 《우리민족은 우수한 민족이며 지혜롭고 문화정도가 높으며 깊은 문화적 내함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차츰차츰 느끼고 민족에 대해 리해심이 깊어졌고 민족의식이 강해졌다》고 말한다.

그는 기자에게 《이전에는 민족의식마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족령도간부로서 이렇게 훌륭한 자기민족을 위해 일하는것은 너무나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였으며 상급부문에서 믿고 조선족향에 조동시킨만큼 조직의 심임에 어긋나지 않게 꼭 잘해보겠다고 결심했다.》고 그때를 회고한다.

마음의 정리가 되면서 그는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민족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조선어문교육을 5년밖에 받지 못한 그는 민족에 대한 리해를 더 깊게하기 위해서는 조선말부터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짬이 있을 때마 조선족간부가 있는 문화소사무실에 찾아가 조선노래와 조선무용을 배웠으며 조선글을 자습하여 조선말을 완벽하게 배워냈다.

조선말공부에 대해 향지도부의 한 한족간부는 기자에게 《윤향장이 처음에는 조선말이 서툴러 웃음거리를 많이 만들었지만 끝내 자기민족말을 류창하게 할수 있게 되였다. 이에 대해 우리 한족간부들은 모두 윤향장을 탄복하고 따른다.》고 평했다.

윤창길은 또 향의 기타 민족 간부들을 이끌고 조선족 언어문자를 배우게 하여 향간부들이 조선족의 민속풍정과 전통문화를 진일보 료해하게 하여 민족향의 각항 사업을 잘하는데 토대를 닦아놓았다.

령도간부로서 윤창길은 어디서 사업하던 학습을 매우 중요시했다. 2001년 신발향에 조동되여 사업하기 시작한 그는 자기의 리론수준과 지식면을 넓혀 민족향의 사업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당의 민족정책을 학습하고 행정관리사업에 적응하기 위해 토지, 림업, 수리, 축목, 재정, 산아제한, 민정 등등에 관한 정책과 업무지식을 학습하고 실천을 통해 자신의 소질을 전면 제고시켰다.

민족향에서 사업을 하면서 그는 민족사업의 중요성을 깊이 알게 되였다. 《전 내몽골자치구의 유일한 조선족향으로 민족사업을 잘하고 민족단결을 수호하는것은 모든 사업을 잘할수 있는 출발점이다》고 그는 늘 말한다.

몇년전 력사적 원인과 사회적 여러 원인으로 하여 5개 촌의 몇백호가 논을 재배하는 관수구의 시설이 차하고 장기년 수리하지 않아 별작용을 못했다. 윤창길향장은 민족사업부문, 재정부문을 찾아가 정황을 반영하고 자금을 신청하여 500여만원의 상급 재정자금을 조달받았다. 하여 1만무 논 관개구의 물절약공사(衬砌工程)를 실시해 관개능력을 효과적으로 제고함으로써 조선족농호들이 수입을 증가할수 있도록 이끌어냈다.

윤향장은 가뭄방지와 논우물 건설, 논길과 다리 건설을 위해 재정자금을 1000여만원 신청해놓고있다.

동광촌에 만들어진 문화장랑과 과학기술장랑인데 총길이가 80메터이다. 신발향의 력사와 문화풍속과 일상생활과 과학기술로 경제를 진흥시키고있는 상황을로 한눈에 안겨오게 만들었다.

민속관에 저장된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사용해왔던 생산, 생활용품. 이민당시 조선반도로부터 갖고온 장농 두개가 보인다.

네 개 날개를 달고 경제가 도약



윤창길향장은 조사, 좌담, 외지고찰을 통하고 신발향의 162.2평방킬로메터 되는 산과 강을 돌며 전 향의 기본정황을 료해하고 《4개 우세를 발휘하여 민족향의 경제를 촉진하자》는 전략적 구상을 제출하였다.

2006년 그는 《공업으로 향을 강하게 하고 목축업으로 부유하게 하며 과학기술로 진흥하게 하고 관광으로 활력있게 하며 문화로 명성을 날리게 하는 전략》을 제출하였으며 2008년에는 전 향의 산업구조를 1원(一园,공업원구), 1촌(민속촌), 남쪽촌에서는 남새를 재배하고 북쪽촌에서는 과일을 재배하고 아룬하강변의 촌에서는 벼를 재배하고 전 향적으로는 젖소를 사양하고 감자를 재배하기로 하는 등 산업구조를 조절하것을 제출하였다.

신발향은 아영기에서 제일 큰 벼농사생산기지이다. 조선족 또한 벼농사전통이 유구하다. 록색벼농사기지 건설을 강화할 발전구상을 제출, 전 향 1.5만무 벼재배면적을 확보한 기초상에서 《아영기조선족록색농업발전연구회》 설립해 량질록색쌀을 발전시키고 보급시킬것을 제의하였다.

2007년 그는 향농업봉사중심의 친히 사업일군을 데리고 흑룡강성 수화시에 가 벼재배를 참관하고 대비시험을 통해 생산량이 높고 품질이 좋으며 항병성이 강한 룡갱15, 사사니, 공육131 3개 품종을 선택하여 보급시켰다. 목전 이 3개 품종의 재배면적은 1.2만무에 달하며 무당 200근이상을 더 수확한다.

이와 동시에 그의 노력하에 《아영기신발미업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아룬신미》이란 량질록색쌀 상표를 성공적으로 등록해 통일적으로 가공하고 통일적으로 포장하고 통일적으로 판매하여 《아룬신미》의 영향력을 부단히 확장하여 멀리 내몽골 후룬베르시(해라얼) 등 대중도시에 판매되여 소비자들의 각광을 받고있다.

동시에 룡두기업에 의거하여 젖소업을 돌출히 발전시키고 젖소업발전 우대정책을 조직해 제정하였다.

그의 호소아래 근 2년간 신발향에서는 젖소를 705마리 사들였으며 농업과 축목업을 결부하는 농호가 부단히 늘어나 전 향적으로 축목출란마리수가 8.89만마리, 흰게사니가 11.2만마리에 달한다. 젖소는 주로 한족들이 사양하는데 조선족도 사양하는 집이 있다. 젖소를 사양하는 집마다 10여마리를 사양하는데 한 마리에 1만여원에 파는데 수입이 가관이다.

그는 신발향의 지역특점에 따라 《나이룬(奈伦)》, 《서설(瑞雪)》 등 점분룡두기업에 의거하여 적시적으로 《감자에 립각하여 향의 경제를 일떠세우는 전략》을 제출하여 《기업+기지+농업》의 산업사슬을 형성하였을뿐만 아니라 부단히 심화시켰다.

이 기초하에 몇년내 주문농업을 18만무 락착하고 누에를 880바(把)를 재배하였으며 잎담배를 1500만무 재배하여 가정마다 1년수입이 7만-8만원에 달해 농민들의 수입이 1600여만원 증가되였다.

민족풍정관광항목으로 유명 선진향에 부상

신발향은 《노래와 춤의 고향》이란 미칭이 있으며 조선족 또한 찬란한 민속문화와 독특한 음식문화로 유명하다. 그의 인솔하에 민족특색의 자원우세를 충분히 발휘하여 민족특색문화를 깊이 발굴하고 제3산업을 대대적으로 강화하였다.

하여 민족풍정관광업과 음식봉사업, 로무송출업이 신속히 발전되였다. 동광촌만 하더라도 민족식당이 이미 아홉집으로 늘어났으며 올해 또 네집에서 《농가락》가정관광호를 개업해 영업, 년간 관광객 접대능력이 근 5만명에 이르며 년간 영업액은 20여만원에 달한다. 동광촌의 명화조선족식당은 규모가 크고 조선족집모양으로 식당을 짓고 앞을 몽땅 투명한 유리로 설계하여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농가락》조선족가정관광안내호의 영업집조는 아영기관광국에서 발급했으나 안내호의 표지설계는 윤창길향장이 나무로 민색이 다분한 그림으로 직접 설계했다. 가정관광호들은 이 한가지 수입만해도 1년에 지어 3만원까지 된다. 그러나 하는 조선족이 많지 않아 대규모를 형성하지 못하는것이 안타깝다고 윤향장은 말한다.

동시에 조선족 언어, 문화와 친척관계를 활용하여 대대적으로 로무송출업을 발전시켜 매년 연인수로 120여명이 한국에 로무가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바 년간 평균수입이 1000여만원에 이른다. 민족음식업과 로무송출업은 이미 전 향의 경제발전을 이끄는 새로운 증장점으로 되였다.

이상 네가지 우세를 발휘하고 몇 년간 꾸준히 노력한 끝에 신발향의 농촌생산생활환경은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2008년말 조선족의 인당 년간 순수입은 6200원에 달하여 빈곤인구가 대대적으로 줄어들었으며 촌민들의 생활수준이 전 향 평균수준보다 높아 평균 수입증장이 제일 빠른 군체로 되였다. 전 향 농민의 순수입은 이미 아영기의 평균수준을 초과하였으며 경제발전속도는 선진향의 행렬에 들어섰다.

한때 북적이던 조선족학교가 지금은 문화활동중심으로 되었다. 3년에 한번씩 진행되는 아영기 운동대회와 해마다 한번씩 진행하는 신발향운동대회는 여기서 진행된다. 문화활동중심의 운동장마당에 세워진 그네, 전통체육문화를 고스란히 지켜가고있는 신발향사람들의 소중한 마음이 묻어있다.

동광촌조선족집거구 새농촌건설 시점으로

윤창길은 새농촌건설의 절호의 기회를 잡고 조선족집거구인 동광촌을 새농촌건설의 시점촌으로 추천했다.

그는 항목을 도입하고 자금을 조달받아냈으며 또 전 향 간부들을 인솔하여 새농촌건설의 현장에 가 군중들과 함께 홈채기를 파고 길을 닦았으며 나무와 풀을 심어 환경을 아름답게 꾸몄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선후하여 동광촌에 2050메터 되는 세멘트길 수건공사, 46개 가로수등 안장공사, 302평방메터 되는 촌지도부 종합건물항목, 1200평방메터 되는 영빈광장항목, 부지면적이 8000평방메터 되는 조선족음식거리 건설항목, 140평방메터 되는 민속관 건설항목, 470평방메터 되는 민족경로원 항목과 50동 초가집 개조항목 등등을 실시하였다.

현재 민속관은 촌급이지만 명년에는 향급으로 격상되며 따라서 전시면적도 350평방메터로 확장된다.

그의 노력하에 또 농민문화오락실을 건설하여 각종 서적을 꽂아놓고 농업농사부문의 전문가를 청하여 촌민들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하고 전문가의 가르침에 따라 치부의 길에 들어서는 비결을 찾도록 했다. 동광촌의 거대한 발전변화와 건설성과는 아영기와 후룬베르시, 내몽골자치구 령도들의 호평을 받았다.

아영기조선족학교(교장 윤영건 좌1)를 돌아보는 윤창길(중)향장

업여배우들로 무어진 조선족민간가무예술단

어떻게 하면 조선족의 민간문화예술과 전통체육사업을 계승하고 번영시킬수 있겠는가 하는것은 줄곧 윤창길의 마음속에 내려가지 않는 점이였다. 그의 창의와 노력하에 2005년 초여름, 민족특색이 독특한 조선족민간가무예술단이 설립되였다. 상상하기 힘든것은 이 가무단은 신발향의 농민, 개체공상호, 기업과 사업단위의 30여명의 업여배우들로 구성되였다는 점이다.

예술단은 설립이래 배우들은 각자 자기의 사업을 완수한 나머지 시간을 짬짬이 리용하여 련습하고 연출했다. 어떤 새색시들은 젖먹는 갓난애기를 걸상에 재워놓고 춤련습을 하였다. 그때 윤향장은 마음이 아팠지만 민족향과 민족문화의 발양을 위해 어쩔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또 향에 경비가 모자라 예술단 배우들은 의무로 공연하였으며 처음에는 통일적인 민족복장이 없어 남의것을 빌려다 입고 공연에 나섰으며 찬밥을 먹으며 공연하러 다녔다.

배우를 찾기 위해 그는 전 향 촌마다 다니며 입이 닳도록 사상공작을 하고 이웃정, 민족정을 나누며 민족문화를 만구하고 계승해야 하는 의무를 나누었다. 배우들은 민족사업을 발전시키려는 그의 드높은 열정에 감화되여 너도나도 예술단에 참가하였다.

동시에 그는 자금을 적극 신청하여 예술단에 복장, 음향설비, 도구 등 기본설비를 구입해주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그가 민족문화를 만구하려는 열정과 완강한 의지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예술단은 설립후 향에서 조직하는 경축행사공연, 단오절공연, 아영기에서 조직하는 행사에서 공연 등 각종 대형 공연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동시에 아영기를 대표하여 2006년 후룬베르시 음력설야회와 2009년 나다무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룬베르시를 대표하여 내몽골자치구에서 주최한 전국북방지구 관광문화절에 참가하였다.

2006년 예술단은 내몽골자치구 10대 농촌극단으로 선정되였다. 찬란하고 눈맛을 돋구는 민족가무는 사회각계의 호평을 대단히 받았다.

초창기와 달리 지금은 사흘만 련습하여도 어렵찮게 70-80명이 참가하는 공연 한창을 완수할수 있을 정도에 달했다.

지금은 또 한족간부들도 조선춤공연에 동참한다. 처음에 향에 배치받아온 한족간부들은 조선춤 배우기를 꺼려하고 거부감을 나타내나 2년이 지나면서 일단 적응만 하면 그렇게 적극적이고 잘출수가 없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민족전통체육사업의 발전을 십분 중시했다. 2005년 전시 소수민족 그네뛰기 선발경기를 맡아 치르고 2007년에는 아영기조선족체육협회를 설립ㅎ고 3년에 한번씩 아영기조선족운동대회를 신발촌의 원 조선족학교 운동장에서 조직한다. 운동회는 여러 민족 지간에 상호 료해와 단결을 증간시켰으며 전 향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진하였다.

부유함과 안정을 상징하는 조선족풍정거리에 세워진 환영표시판, 윤향장의 소개에 따르면 나무가지처럼 보이는것은 말뚝, 말뚝은 부유를 상징, 가운데세워진 북은 평안북인데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상징하며 북안에 그려진 태극문양은 조선족을 의미한다.

나라의 효자 백성이 효자 가정의 효자

바로 이와 같은 몇가지를 위해 그는 남보다 너무나 많은것을 할애해야 했다. 그는 신발향에 와서 사업하며 《전에 나는 법원에서 법률이란 천평의 공정을 위해 사업했고 신발향에 와서는 신발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사업한다》고 소박한 말을 한바 있다.

사업을 위해 그는 바쁠 때 하루에 한때밖에 먹지 못하고 이튿이고 사흘이고 잠도 못잘 때가 있다. 촌에 내려가 사업할 때는 일주일씩 집도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실 그의 집은 촌에서 10여리 길밖에 안되지만 특히 재해가 들 때면 그는 맨앞장에 서서 제일 위험한 전선에 나서 간부들을 조직하여 군중들과 함께 재해구제에 뛰여들었다. 화재가 났을 때 그는 자기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감히 나서 개인의 안전을 마다하지 않고 향간부들과 함께 불을 끄기도 했다.

그는 외상으로 하여 요추간판돌출과 요추간판골질증생에 걸렸다. 어떤 때 병이 도질 때는 허리가 아파 절뚝거리면서도 사업일터에 났다. 지어 촌에 내려가 사업할 때는 군중들 집에 가 점적주사를 맞으며 사업을 견지했다.

그는 사업을 부지런히 할뿐만 아니라 집에서는 효자이다. 그는 막내아들이나 제대후 줄곧 부모와 함께 살고있으며 부모가 늙어 병이 잦아지자 집에서 쉴 때면 옷을 빨아주고 밥을 짓는 등 가무일을 않하는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혈압을 재고 경맥주사를 놓고 안마호리하는 기술을 배워 부모에게 효성을 다했다.

아버지가 몇 달동안 앓으며 일어나지 못했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밥을 먹이고 약을 먹였으며 오줌과 똥을 받아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병이 위급할 때도 그는 하루도 사업에 지장을 준적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뜰 때 그는 곁에 없었다. 그때 그는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지의 후사를 다 처리하고난 뒤 그는 또 온갖 마음을 사업에 바쳤다.

그는 남을 감동시킨 일들이 많고도 많다. 토요일, 일요일 쉴 날이 없이 하루 3-5시간밖에 취침하지 못하며 부지런히 일하고 또 일하고있다. 그는 사업을 열애하는 붉은 마음으로 령도와 동사자들을 감동시켰으며 자기의 언행으로 한 민족간부와 공산당원의 낙언을 지켰다. 그것은 바로 백성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며 어려운 일을 풀어주는것을 사업을 출발점으로 삼은것이다.

/길림신문



윤창길 프로필:

1964년 출생, 내몽골자치구 아영기 나지툰 제2중학교 졸업;

1982년-1985년 중국인민행방군 51312부대 복역 , 입당

1986년-2001년 아영기인민법원에서 사업, ;

2001년부터 지금까지 아영기 신발조선족향 대리향장, 향장

2000년 내몽골 후룬베르시 법원계통 개인3등공 기입;

2008년 아영기 우수령도간부로 평의;

2008년 후룬베르시 민족단결진보모범개인 영예칭호 수여;

2008년 내몽골자치구 소도시건설 선진개인 영예칭호;

2009년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개인 영예칭호.

1988년-1991년 전국법원간부 업여법률대학(전문대학과정)

2002년-2004년 치치할시 방송대학서 대학공부(법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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