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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호령했던 중국 女황제들의 영욕과 술수

[온바오] | 발행시간: 2014.09.01일 23:04
전통적인 중국 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해서 남자가 다스렸다. 반면 여인은 가족과 사회의 틀 안에서 억압을 받는 매우 낮은 지위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봉건사회의 궁중에서 여인이 득세한 경우도 결코 적지 않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권력을 얻은 후로는 몇 년, 몇 십 년에 걸쳐서 조정을 주재한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왕조를 교체하거나 개국 황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은 중국 역사상 제일 강했고 오랫동안 황제 혹은 실질적인 황제 역할을 했던 3명의 여인, 즉 한나라 유방 이후 중국 역사상 최초로 8년간 실질적인 황제 역할을 한 여태후,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이었다가 나중에는 아들인 고종의 황후가 되고 무려 50여 년간 천하를 호령한 측천무후, 중국 봉건시대의 마지막에 무려 40년간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철권녀 자희태후에 대해 얘기해 보기로 한다.



▲ 여태후 삽화

우선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자 황제로 불리고 있는 한나라 유방의 황후, 여태후(吕太后)에 대해 알아 보자.

한나라의 개국 황제 유방은 사실 건달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마을 정장이라는 미관말직의 관리였으나, 집안일은 내팽개치고 동네 한량들과 어울리며 동가숙 서가숙 하는 이른바 건달이다. 이런 유방에게 그래도 유방보다는 여유로운 집안 출신인 여치(여태후)가 시집 온 것은 장인 어른의 관상 결과라고 하는데, 여하튼 유방은 결혼 후 안정된 가정의 배경을 바탕으로 천하를 통일하였다.

자, 그럼 여치는 어떻게 중국 역사상 실질적인 최초의 황제가 되었으며, 후세 역사가들은 그녀를 어떻게 평가하는 걸까?

첫째, 여치는 여자로서 체계적으로 학문을 배운 바는 없지만 천성적으로 배짱이 두둑하였고 위기에 대응하는 임기응변 능력이 뛰어났다.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 중 유방은 척희라는 부인을 특히 사랑하였으며, 그가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하려 했다. 위기에 처한 여치는 개국공신인 장량과 기타 충신들에게 온갖 수단을 다하여 간곡하게 부탁하고 설득하여 결국 본인 소생 아들인 유영(혜제)의 태자 지위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둘째, 그녀는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처절하리만큼 교활하고 잔인했다. 자신의 아들인 혜제는 유약하고 심성이 착한 황제였는데, 여태후는 혜제가 등극하자 제일 먼저 자신의 연적인 척희부인을 냉방에 가두고, 이어서 그녀의 팔다리를 자르고 코를 베어 돼지 우리안에 가두는 등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행동을 자행했다. 아울러 한나라 최고의 개국공신이며 유방마저도 두려워하는 한신을 유방이 자리를 빈 사이에 모반이라는 사유로 체포하고, 정상적인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직접 처형해버리며, 아울러 모반으로 몰려 귀양가던 양왕 팽월마져도 억울함을 풀어 줄 듯 장안으로 불러들인 후 역적 모의를 씌워 삼족을 멸해 버린다. 이는 초기 한나라 입장에서는 입안에 든 가시를 제거하는 결과였지만, 결국 유방이 죽은 이후 여태후의 강한 정권 쟁취의 발판이 된 셈이었다.

셋째, 그녀는 정권 유지를 위해 철저한 공포 정치와 철저한 외척 정치를 했다. 그녀는 혜제를 유명무실한 황제로 만들어 본인이 직접 정치의 전면에 나서서 내노라 하는 개국 공신들은 공포와 회유로 꼼짝 못하게 했으며, 유씨 아니면 황제가 될 수 없는 유방의 유언을 무시한 채 자신의 처갓집 동생, 조카들을 대거 왕 책봉 및 군권을 확보의 주요 보직으로 임명하여 여씨 천하를 꿈꾸었다.

여태후는 유방이 죽고 난 후 8년간 황제의 명분은 갖추지 못했으나 황제의 실속은 챙겼으니, 중국 역사상 첫 여성 황제라 불릴 만 하다. 그녀에 대한 중국 역사가의 평가는 그녀가 대권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 가혹한 공포 정치로 정적을 제거하는 등 독재정치로 나라의 손실만 끼쳤다는 극단적인 평가도 있고, 그녀가 집정하는 동안 갖 천하를 통일하여 피곤해 져 있는 나라의 백성에게 휴식을 주는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어느 정도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이뤘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 측천무후 삽화

자, 다음은 중국 역사상 실제 황제가 되었던 측천무후(则天武后) 얘기다. 무측천은 명실상부하게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황제다. 그녀가 죽은 뒤 건릉에 중국에서 유일하게 무자비(無字碑)가 세워 졌다. 그녀는 또한 중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황제와 합장한 여인이다. 실로 무측천이 차지한 '유일한 것'은 아주 많다.

고대의 무수한 영웅 호걸 중에서 이렇게 돌출된 인재도 드문 일인데, 하물며 여자로서 남자의 메달까지 획득한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무측천에 대한 평가는 본인이 세운 '무자비' 처럼 다양하며 한마디로 결론 내릴 수 없다고 한다.

일단 무측천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고 우선 그녀의 정치적 생애와 인생의 여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무측천은 당태종 이세민의 장손황후가 죽고 나서 14살에 후궁으로 궁중에 들어왔으며, 그녀의 가정은 수나라, 당나라 시대에 걸쳐서 목재상인 출신으로서 상서(尙書)까지 하는 비교적 부유한 명문 집안의 출신이나, 당시 시대의 최고급 성골 출신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당차고 총명했으며, 어린 나이에 궁중에 들어와서도 여러 가지 행동이 특출하여, 당태종 이세민은 병이 들어 본인이 죽을 즈음에 한나라 여태후의 전횡을 생각하고 그녀를 독살시키려 하였으나, 그녀는 스스로 절의 비구니가 되겠다고 자청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태종이 죽고 뒤를 이은 당고종은 무측천을 다시 불러 들였으며, 그녀를 후궁에서 황후까지 삼게 된다. 황후가 되는 것은 무측천의 최종 꿈이 아니다. 그녀는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결국 중국에서 유일무이한 본인의 나라를 개국하며 여성 황제가 되는 것이다. 그럼 그녀의 무엇이 이런 공전절후의 성공을 가져온 것일까?

무측천이 비구니에서 환속하여 궁중에 들어온 후 황후, 황제가 되기까지, 그녀의 정치적 술수는 가히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예술적 경지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궁녀들간의 시기 질투와 뇌물 공여를 이용하여 정적(情敵)을 제거하고, 정치인들의 미묘한 세력 다툼을 활용하고, 상대의 약점과 단점을 이익과 공갈로서 철저히 유린하며 눈앞의 큰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장기적인 계획과 치밀한 음모 술수로 결국 상대를 무너뜨리며, 힘이 부족하면 철저하게 상대의 눈치를 살피다가 힘이 생기면 야수처럼 상대를 분쇄시키며, 본인의 목적을 위해서는 소인과 악인을 동원해서 상대를 제거하고 목표를 달성하면 악인을 처단하여 하루아침에 정의의 황제가 된다.

그러면서도 정국의 흐름을 양꼬치 꿰뚫어 보듯이 파악하여, 본인에게 순응하는 자 혜택을 주고, 반항하는 자 철저히 분쇄하고, 기존 보수 세력에 불만을 가진 신진 세력에게 과거 시험 정책으로 인재 등용하여 기득권 세력의 물갈이를 시도하며, 기존 세력의 이권을 탈취하여 신진 세력과 일반 백성들에게 분배하는 새로운 토지 정책을 과감하게 시행하여 일반 백성들에게 사랑 받는 황제로 군림한다.

무측천은 말년에 지나친 정적 제거, 문란한 생활과 외척, 혹리 총신들을 통한 정치의 혼란으로 타락하여 '천고의 忍人'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어서 결국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형태로 생을 마무리 한다. 이러한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무측천은 기나긴 봉건 역사에서 하늘에 흔적을 남긴 눈부신 유성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녀의 공과는 그녀의 '무자비' 만큼이나 후세들에게 무한한 사색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 서태후

자, 다음은 지금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시대의 여성 황제 서태후(慈喜太后) 얘기다.

청나라 말기 개국과 쇄국의 논쟁, 끊임없는 외침의 위기, 의화단 민란 등 내우외환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무려 40년 간이나 정권을 좌지우지 한 사람이 여성인 자희태후다. 그녀 역시 함풍황제 시절 궁녀로 들어 와서 세 번째 황후가 되었으나, 워낙 총명하고 권력욕이 강하여 함풍황제는 임종시에 일부 대신에게 그녀가 정치에 참여하면 죽일 것을 암암리에 지시 하였으며, 절대 정치에 참여 시키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그녀는 권력욕이 강할 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용기와 지혜, 뛰어난 정치 감각을 지닌 여성으로서, 소수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권을 탈취하고 오히려 조정의 기존 대신들을 철저히 분쇄하여 처형한다. 그녀는 정권을 쟁취한 후 자신에게 도전하는 자식까지도 철저히 분쇄하고 나라의 발전이나 백성들의 고충은 관심이 없고 오로지 본인의 정권 유지에만 총력을 기울인 실질적인 여자 황제다.

그녀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비교적 냉혹하다. “오로지 본인의 영화와 권력욕을 지키기 위해 나라와 백성들에게 재난을 가져다 준 것 외에는 별다른 공로가 없다”라고 평하고 있다. 즉 무측천 만큼의 상대에 대한 치열한 권모술수와 음모 계략, 총명함과 지혜를 갖췄지만, 그녀는 나라의 발전이나 백성의 고충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권력 유지에만 목숨 거는 욕심 많은 할머니 일뿐이었다.

옛말에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고 한다. 분명히 3명의 여성 황제는 여성이라는 깊은 골에서 불쑥 솟아 오른 높은 산일 것이다. 수천년 내려온 긴 역사의 과정 중에서 여성이 황제가 되기는 어렵고 희귀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긴 봉건 남성의 역사 중에서 백성을 위한 황제는 불과 20%가 안되며, 30%는 역사의 죄인, 혼군(昏君)이며 나머지 50%는 그냥 그렇고 그런 평범한 군주라고 했다.

과연 상기 3명의 여성 황제의 평가는 어디쯤 해당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녀들은 황제 시절 훗날 역사의 평가에 대해 관심이나 있었을까? (jgkim122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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