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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녀걸5]8녀투강 영웅 안순복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3.27일 15:40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 - 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 (5)

■리 함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70돐을 맞으면서 우리는 항일의 승리를 위하여 싸운 이 땅의 천천만만의 항일선렬들을 심심히 그리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항일련군의 수백명 조선족장병들이 동북의 항일무장투쟁가운데서 희생되였으니 8녀투강의 한 사람이고 항일녀성영웅인 안순복이 그런 렬사들 가운데의 한 사람이다. 안순복은 항일련군 제4군의 재봉대 대장이고 제4군과 5군의 녀전사들로 무어진 항일련군 부녀퇀의 책임자의 한 사람이였다.



1957년 저명한 화가 왕성렬(王盛烈)이 창작한 명화 《팔녀투강》(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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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복(安顺福, 1915-1938)은 목릉현 신안툰(穆棱县新安屯)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신안툰은 조선이주민들이 모여사는 마을로서 1920년대 초반이후 조선인혁명가들이 많이 드나들며 활동하던 유서깊은 고장이다. 이런 마을에서 자라며 안순복은 어려서부터 항일구국의 사상으로 물들어있었다. 순복이는 13~14살때부터 아버지와 오빠를 따라 혁명활동에 열성을 내였다.

1931년 9.18사변후 신안툰에는 중국공산당 기층지부와 공청단, 부녀회, 소선대 등 조직들이 뿌리를 내리며 군중적 항일활동이 활발해졌다. 이해 17살인 안순복은 마을의 안영신(安永信) 소년들과 더불어 소선대에 가입하여 보초를 서고 포스터를 붙이며 나쁜 사람을 가만두지 않았다. 어느날, 마을에 토비가 나타나 물건을 빼앗으며 발광하다가 안순복이를 보자 겁탈하려고 달려들었다. 안순복은 흉악한 토비를 무서워할 대신 결사적인 박투를 벌리며 틈 탈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토비가 총이라도 쏠가봐 겁이 나서 눈물을 머금고 딸애와 말하였다.

《얘, 잘못하면 죽어. 토비가 하자는대로 내버려두면 안되니?》

《안돼요. 난 죽어도 깨끗한 몸으로 죽을거예요.》

그러면서 안순복은 목숨을 걸고 토비와 싸웠다. 나중에 토비는 보통내기가 아닌 순복이를 내버려두고 달아나버렸다. 안순복은 바로 이같은 소녀였다. 혁명활동의 경력은 그에게 굴강한 성격을 심어주었었다.

1933년 1월에 반역자의 밀고로 적들이 신안툰에 달려들어 30여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 혁명자들을 마구 체포하였다. 그중 일곱사람이 생매장당하면서 마을의 당단 조직은 엄중한 파괴를 당하였다. 일찍부터 혁명에 나섰던 아버지와 오빠도 적들에게 피살되였다.

하늘이 무너질것 같았지만 안순복은 넘어지지 않고 이를 옥물었다. 아버지의 원한, 오빠의 원한, 마을의 원한, 민족의 원한은 안순복의 가슴을 활활 불태웠다. 이해 1933년 2월, 안순복은 결연히 공산당원 리연록이 이끄는 항일구국유격군에 가입하였다. 안순복은 재봉대에 배치되였고 인차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항일구국유격군 군장 리연록(李延禄, 1895-1985)은 1895년 4월 길림성 연길현 출생으로서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혁명가이다. 1931년 9.18사변 그때 연길현 옹성라자(瓮声砬子,오늘의 안도현 명월구)에는 왕덕림(王德林)이 영장을 맡은 길림성방군(防军) 제13려 63퇀 3영이 주둔하고있었다. 9.18사변이 터지자 이들 3영의 애국관병들은 영장 왕덕림에게 분분히 항일에 나설것을 바랐다. 이 3영을 《 로3영》이라고 부르는데 이 부대가 돈화역에서 봉기를 단행하고 연길 소영자(小营子)로 와서 중국국민구국군의 기치를 들었다. 중공연길현위에서는 리연록 등 한패의 공산당원들을 왕덕림의 구국군부대에 들여보냈다.

왕덕림의 구국군부대에서 리연록은 구국군총부 참모장을 맡아나섰다. 리연록은 동지들과 더불어 구국군내의 자위군 제1보충퇀을 토대로 1933년 1월에 우리 당이 지도하는 동북항일구국총대를, 1933년 1월과 7월 사이에는 동북항일구국유격군을 조직하고 군장으로 부임하였다. 항일구국유격군은 그 시절의 동만과 북만을 넘나들며 활동하였다. 그럴 때 안순복은 항일구국유격군에 가입하여 재봉대에 배치되였던것이다.

1934년 10월, 안순복 소속 항일구국유격군은 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개편되였다. 동맹군 4군내에는 조선족혁명가들이 아주 많았다. 제4퇀 정위 박덕산(朴德山)도 조선사람이였다. 투쟁가운데서 안순복과 박덕산은 뜻이 맞아 조직의 비준으로 부부로 되였다. 1935년 가을에는 4군의 밀영지에서 복스런 딸애를 보았다. 1936년 2월에 항일동맹군 4군이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개편되자 안순복은 4군 재봉대 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산속에서의 투쟁이 자못 어려운데서 안순복, 허현숙(许贤淑) 등 4명의 녀전사들을 선두로 자기의 사랑스런 9명의 어린 아이들을 밀산의 중국인 루경명(娄景明)과 당지 군중들에게 부양을 부탁하였다.



목단강시 강빈(江滨)공원에 세워진 팔녀투강 조각군상(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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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봄에 일본침략자들은 삼강성(三江省,지금의 흑룡강성 합강지구) 일대에 대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중공길동성위와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에서는 제4군과 제5군의 주력을 근거지를 떠나 오상, 서란 일대로 전이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족 황옥청(黄玉清)이 제4군 정치부 주임 겸 제1사 정치위원이였다. 그는 4군과 5군의 동지들과 함께 목단강지구의 5군 후방기지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병력을 집중하여 서정(西征)을 다그치기로 결의하였다.

1938년 5월에 제4군과 제5군은 북만의 보청(宝清)에서 출발하였다. 7월 2일에 서정부대는 목단강 연안의 삼도통(三道通)을 습격하였다. 이날 그들은 일본군수비대와 경찰분주소를 까부시고 많은 무기와 탄약, 식량을 로획한 뒤 정식으로 서정을 시작하였다.

제4군과 5군으로 구성된 서정부대에는 녀전사들이 적지 않았다. 4군 정치부 주임 황옥청의 안해 허현숙도 그중의 한 사람이였다. 그들은 부대와 함께 풍찬로숙하면서 삼도통전투에 뛰여들었다. 평소엔 선전원, 봉사원이 되여 앞뒤로 뛰여다니며 부대의 사기를 높이였다.

7월말에 서정부대는 주하현(지금의 상지시) 루산진(楼山镇)전투를 벌리였다. 허현숙 등 조선족녀전사들은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다. 아군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얻었으나 적들이 계속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지꿎게 달려드는데서 제4군과 제5군은 두갈래로 나뉘여 행동하게 되였다. 제4군의 녀전사들은 제5군의 부녀퇀에 소속되여 5군 1사를 따라 행동하게 되였다.

5군 부녀퇀은 1936년 봄에 조직된 항일부대이다. 시초 그들은 녕안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목릉일대로 전이하게 되였는데 부녀퇀의 대다수 전사들이 각 련에 소속되다보니 이해 여름 군부를 따라 행동한 부녀퇀의 녀전사는 10여명에 불과하였다. 이 10여명중 책임자 중국인 왕옥환(王玉环, 후에 최용건의 부인으로 되다)을 제외하고는 최순선(崔顺善), 주신옥(朱信玉) 등 모두가 연변의 2군에서 넘어간 조선족녀전사들이였다. 1938년 서정길에서 부녀퇀은 20여명으로 구성되였는데 그중 안순복, 리봉선(李凤善), 허현숙 등 적지 않은 녀전사들은 조선사람들이였다.

서란(舒兰), 오상(五常) 일대에로의 서정길은 피로 얼룩진 생사의 서정길이였다. 안순복, 리봉선 등 녀전사들은 강의한 의력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부대를 따라 오상현 경내에 들어갔다. 부대는 오상현 경내에서 적들의 첩첩한 포위속에 빠지였다.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대거 진공하였는데 낮에는 비행기가 마구 폭격하고 밤에는 포사격을 퍼부었다. 전투는 도처에서 가렬처절하게 벌어졌다.

1938년 8월, 제5군 서정부대 책임자 송일부(宋一夫)가 변절하여 부대의 서정계획이 드러났다. 게다가 5군 1사가 오상 경내에서 5군 2사와 련계를 잃은데서 부대의 처지는 자못 어려웠다. 1사 사장 관수범(关书范, 후에 변절)은 부대를 거느리고 목단강일대로 돌아오는수 밖에 없었다.

왕복 수천리의 서정길에서 5군 1사는 막심한 손실을 당했다. 귀로에 올랐을 때는 병력이 1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부녀퇀의 희생도 막대했다. 조선족녀전사 허현숙도 오상현 경내에서의 한차례 전투에서 불행히 체포되여 무참히 살해당했다. 서정에 참가한 부녀퇀이 그해 10월에 부대를 따라 림구현(林口县) 경내의 우스훈하(乌斯浑河) 기슭에 이르렀을 때는 안순복, 랭운(冷云), 양귀진(杨贵珍), 왕혜민(王惠民), 호수지(胡秀芝), 곽계금(郭桂琴), 황계청(黄桂清), 리봉선(李凤善) 등 8명밖에 남지 않았다.

11월을 앞둔 북만의 10월 하순은 제법 썰렁했다. 강심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한겨울을 방불케 하였다. 5군 1사는 이튿날 새벽에 강을 건너가 제5군 사령부를 찾기로 하고 우스훈강과 목단강 합수목에서 8리쯤 떨어진 우스훈강 기슭의 줘무강(柞木岗,짜작나무)고개에 숙영지를 정하였다.



고요한 오늘의 우스훈하(자료사진)

3

어느덧 부대숙영지 여기저기에 우등불이 타올랐다. 1사 전사들은 주린 배를 달래다 말고 이리저리 쓰러져 굳잠에 빠져들었다. 그 시각에도 안순복, 랭운, 리봉선 등 부녀퇀의 녀전사들은 우등불가에서 밤을 패면서 전사들의 옷 깁기에 여념이 없었다.

허나 여라문개의 우등불은 부대를 로출시켰다. 그날 밤 이 부근 양자구(样子沟)의 특무이고 반역자인 갈해록(葛海录)은 삼가자(三家子)에서 계집질에 등이 달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귀가길에 올랐다. 도중에 이자는 우등불을 발견하고 일본수비대 대장 하시끼한테 알리였는데 이자는 또 저들 두목 구마가이에게 보고를 올리였다. 구마가이는 밤도와 일본군과 위만군 1000여명을 출동시켜 5군 1사의 숙영지를 삼면으로 에워싸고 날 밝기를 기다렸다.

동살이 푸름푸름 밝아왔다. 관서범사장은 1사 조선족 참모장 김석봉(金石锋)한테 안순복 등 녀전사들을 데리고 먼저 도강하라고 지시하였다. 김석봉과 녀전사들이 강가에 이르니 물이 많이 불어 강폭이 넓어진데서 강물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녀전사들의 안전이 걱정되였다. 김석봉은 주저없이 선참 강물에 뛰여들어 대안으로 나아갔다.

바로 그때다. 난데없는 총소리가 고요한 새벽공기를 썰며 귀청을 때렸다. 야단났다. 김석봉참모장은 이미 대안에 닿았지만 강 서쪽기슭에는 아직도 8명의 녀전사들이 대기중이였다.

적들은 삼면으로 1사 주둔지에 공격을 들이댔다. 부대와 1500메터쯤 떨어진 우스훈하가 버드나무숲속에 엎드린 부녀퇀의 전사들은 적들을 자기들한테로 끌고저 안순복과 랭운의 지휘하에 3개 전투소조로 나뉘여져 적들에게 사격을 들이댔다.

적들은 과연 녀전사들의 유인술에 걸려들었다. 미련한 적들이 강기슭에 신경을 쓸 때 1사 주력부대는 인차 떡갈나무골로 전이하였다. 그러나 녀전사들을 남겨두고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들은 다시 원 지점에로 짓쳐왔으나 적들은 이미 그 일대와 강기슭을 전부 통제한데서 어찌할수 없었다.

적들은 강기슭의 병력이 고작 몇명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생포하기 안성맞춤이라 여겼다. 이때 녀전사들에게는 보총과 수류탄밖에 없었다. 그들은 적들의 거듭되는 진공을 련속 격퇴하다가 가까이 다가들었을 때 일제히 수류탄을 뿌리였다. 놈팽이들은 일부 주검을 내고 수림쪽으로 물러섰지만 100여명에 달하는 적들을 막아낸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아침해가 벌써 저만치 솟아올랐다. 적들이 전술을 바꾸어 박격포를 들이대니 버드나무가 송두리채 날아나면서 은페할 곳마저 없었다. 황계청, 곽계금이 부상입고 비칠거리였다. 그들이 강변쪽 둔덕진 곳으로 철거하니 탄알이 거덜났다. 인젠 수류탄도 마지막개이다.

적들은 바싹바싹 다가들었다. 최후를 각오할 때가 되여왔다. 녀전사들이 사품치며 흐르는 우스훈하를 두고 생사결단을 준비할 때 안순복과 랭운이 서로 마주보다가 안순복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우리는 절대 놈들의 포로가 될수 없어요. 우리 함께 물속에 뛰여듭시다!》

《옳아요. 물속에 뛰여듭시다!》

여덟자매는 한결같이 손에 손잡고 강물에 들어섰다. 적지휘관놈은 《빨리 산채로 잡아라 산채로!》 하고 고아대다가 《강변으로 나오면 목숨도 살려주고 상금도 많이 준다》고 희떠운 소리를 질렀다.

적장의 고함소리는 우리 여덟자매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그들은 사나운 격류와 박투하며 계속 강심으로 나아갔다. 물속에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섰다가는 다시 쓰러지는 비장한 장면장면이 이어졌다. 이 비장한 장면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이는 강 대안으로 먼저 건너간 1사 참모장 김석봉이였다. 김석봉은 8녀투강의 최후를 지켜본 유일한 력사의 견증자로 남았다.

적들은 뒤미처야 그녀들을 사로잡을수 없다는것을 실감하였다. 이윽고 기관총이 울부짖고 박격포탄이 련속 강심에서 작렬하더니 부녀퇀 녀전사들의 모습은 물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스훈강에 고요가 깃들었다. 버드나무숲과 언덕에는 적들의 시체로 너저분했다. 이윽고 강심을 바라보던 적들은 아연해지고말았다. 적장 구마가이는 《독한년들!》 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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