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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지산》 지명은 《천불붙이 》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7.02일 13:11

원래 연변의 산 강 그리고 마을 지명들은 순수한 고유어로 다양하게 불리여왔다. 그런데 지명이 지금처럼 3∼4자의 한자어로 고착되여버린것은 일제강점기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많은 이름들이 와전된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천불지산동쪽, 삼합진 북쪽에 자리 잡은 《증봉산》을 《덴노후지산》(天皇富士山)이 라고 외곡되여 불리여왔고 천불지산 서남쪽에 위치한 《큰 쓰레산》, 《작은 쓰레산》 지명도 원래 함경도 방언 《쓰레》 (쓰레라는 말은 빗물 따위에 쓸리어나가 경사가 진 비탈을 가리키는 말이다.)라는 말에서 비롯된것이지만 지난 시기 연변의 많은 잡지 신문들에서는 《큰 쓰레산》을 한자어표기에 따라 그 지명을 《공사령》(孔石列 ) 혹은 《쿤스레》(昆石列)라고 잘못 적어왔다.

천불지산 지명도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다. 현지에 살고 있는 토박이들은 오래 전부터 천불지산을 천불붙이라고 불러왔다. 여기에서 천불은 스스로 일어나는 산불을 말하고 천불붙이는 산간 지대에서 천불로 하여 풀과 나무가 불살라진 자리에 밭을 일구는 땅을 뜻한다.

일찍 일제식민지 시대에 고유지명인 천불붙이 지명을 한자로 행정서류에 적는 과정에 천불지산 (天佛指山)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지여 옛 간도지도에 天佛指山으로 표기된것으로 보인다. 1985년 룡정현 지명지 해석에 따르면 하늘의 법사가 옥황상제의 성지를 받고 이곳으로 내려왔다기에 《천불지산》(天佛指山)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적고있다.

천불지산이 국가급 자연보호구로 선정되고 룡정시 천불지산송이문화관광절을 펼쳐가고있는 오늘날에 와서도 국내외 각종 신문 방송 언론매체들에서는 여전히 이런 잘 못된 지명풀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확대 재해석하고있다.

일부 학자와 문인들은 리성계, 김종서, 무학대사, 지장보살 등 성인들의 설화까지 억지로 꾸며가며 《천불붙이》 지명을 천불지산으로 왜곡하고있다 . 이런 현실속에서 원래의 《천불붙이》 지명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있다. 이는 비록 의도적인것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이 땅을 개척해온 선조들의 후손으로서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명은 사회문화적인 존재다. 지명에는 그 지역의 력사와 문화와 전통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100여년 세월을 훨씬 뛰여넘어 뼈아픈 력사가 묻혀있는 연변. 그리고 그 땅우에 아로새겨져 있는 지명들을 이제 하나 둘 우리 력사에 올바르게 기록해가야 한다.

천불지산 지명도 그동안 연변 각 현, 시 지명지(地名志)와 연변대학 교수들의 론문과 자료에서 적지 않게 언급되여 왔다. 하지만 이런 책과 론문들에서는 모두가 한자의 뜻에만 몰입하여 기존 자료를 바탕으로 되풀이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아직도 천불지산 지명에 대한 조사 연구는 미흡한 점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천불지산이 어떤 력사를 가지고있는지, 어떤 계기로 이름이 지어진것인지, 기타 지역 지명과 어떤 상관성을 가지고있는지를 밝혀내지 못하고있다. 당지에 살던 토박이 로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있는 오늘날 이에 대한 조사사업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일본어에서 밭을 《畑》라고 쓰는데 화전은 오래전부터 동북 아세아지역에 널리 분포되여 있었다. 조선반도에서는 화전의 시초를 북방변경에서 생활하고있던 재가승들이(在家僧) 산간벽지에 은거하여 화전경작을 한데서 찾는다는 주장이 있다.

함경도에는 심산의 원시림을 불태우고 개간하여 만든 화전(火田)을 리용하는 이른바 화전농법이 다른 어느 도에 비해서도 가장 많은 편이다. 1928년의 화전민을 지역분포별로 볼 때 북부지방이 80.1만, 중부지방이 37.5만, 남부지방이 6.3만이며 그 가운데 북부지방은 전체의 70% 이상을 점유하여 화전경작의 집중지역으로 알려지고있다.

사실 화전은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선택할수 있는 최후의 수단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시대부터 학정에 시달린 백성은 산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였고 그들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림꺽정같은 소설이 되였다. 함경도 사람들은 화전을 부대기 부대밭을 일군다고 말한다.

천불지산 북쪽에 자리잡은 지신 성남의 《불붙이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옛날 그곳에 살던 로인들은 부대밭을 불대기(부덱이 火德)밭으로 풀이하여 왔다고 전해지고있다. 대체로 봄에서 가을에 이르는 시기에 불을 지르거나 혹은 가을에 벌채해 두었다가 이듬해 해빙기에 개간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에 사람들은 꽉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파종의 경우 주로 꽉지로 대충 골을 만들고 씨앗을 뿌리고 묻는데 이것을 포지라고 말하며 이런 골 지명을 《포지골》이라고 불러왔다. 그때 이런 밭에서 모기가 극성부리기에 쑥대를 길게 묶어 허리좌우에 뻗쳐 차고 두 끝에 불을 태워 모기를 피하군 하였다.

민초들 가운데 북빼기집(농막의 일종)을 짓고 여름 내내 부대밭을 일구며 농사짓는 떠돌이 날농군들이 많았다. 화전 밭은 숙전과는 달리 밑거름으로 투입하지 않고 나무나 풀이 타서 남긴 재와 낙엽이 쌓여 생긴 부식토로 지력을 지탱해 주기 때문에 몇 년간은 경작하다가 떨어진 지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여 휴경한다.

이렇게 몇년간 밭을 묵혀두었다가 다시 일구는 이런 밭을 묵밭을 일군다고 말한다. 화전농업은 이런 단계가 반복되다가 차츰 소와 쟁기를 사용하여 경작하는 경우가 늘게 되고 따라서 계곡 경사면이거나 산기슭에 있는 농지를 경작하면서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 된다. 이렇게 화전에 의거하여 농사짓는 사람들을 화전민이라고도 불렀는데 최초의 함경도 이주민들을 화전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옛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산비탈 군데군데 화전 밭을 일구어 가며 낯선 땅에서 새 삶을 일구어야만 했던 함경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천불지산에 고스란히 묻혀있다. 의식주 해결과 겨울이면 폭설로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천불지산은 그래도 개척민에게 있어서 세상에 둘도 없는 무릉도원이 되여 왔다. 그리고 그 땅에서 수확한 보리 메밀과 감자로 차려진 밥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산세가 부드럽고 조망이 좋은 천불지산 정상에 서면 오봉산, 큰쓰레 노름바위 등 두만강의 이북 산봉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뭇봉우리들이 마치 두만강 물결처럼 굽이굽이 정상에 흘러와 뉘연한 평지를 이루고있다. 천불지산 정상은 북쪽의 오봉산과 서남쪽의 큰쓰레산과 달리 산세가 급하지 않고 부드럽다.

산정상의 뉘연한 릉선사이로 여러 갈래 내물들이 숲속으로 흘러내려가는 곳에 크고 작은 산길들이 뻗어나있다. 그 중에서 서래골로 뻗은 경우가 가장 많고 서남쪽 릉선을 타고 중마래, 하마래로 내려갈수도 있다. 북으로는 노름바위와 노루메기, 작수동, 범동 등 마을을 거쳐 달라자로 가는 길이 있고 서북으로는 동쪽골로 원동 덕수로 이어지는 길들이 뻗어있다.

천불지산 화전민의 취락은 음달진 북면이나 서면의 산허리보다 해볕이 잘 드는 남면이나 동면의 지역이 더 발달되여 있다. 여전에는 삼합 공암동에서 서래골을 따라 올라가면 석마골어귀, 돌루게골, 동경장, 버므장고래, 하촌, 중촌, 상촌, 싸리밭데기, 수영자 등 자연부락을 단위로 마을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아있었다.

1880년 서래골 농막수가 50호- 60호로 적혀있고 1894년에는 346명으로 기재되였으며 20세기 30~40년대에는 농가 300가구 넘게 산재해있었다고 력사는 서술하고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산비탈에 귀틀집, 땅막집을 짓고 화전밭을 일구며 살아왔다. 40년대초에 접어들면서 산골이 깊어 비적무리들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부분적인 산재호들이 이주한적도 있었다.

해방후 1958년도에 이르러 마을들을 통합하면서 교통이 불편하고 학교가 먼 서래골 마을들에서는 차츰 학교가 있는 청천 혹은 공사마을과 수전이 있는 타지방으로 이사하는 집들이 많아 61년도에는 10여호로 급격히 줄어들었고 70년대초에 와서는 마을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90년대에 청천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서래골마을 흔적은 서서히 력사속에 깊숙이 파묻혀 들어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와닿지 않은 서래골, 마래골 계곡 구석구석을 온종일 누비며 헤쳐보아도 이젠 그 옛날 화전민이 일구었던 화전밭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만고풍상에 시달린 로송아래 파란 이끼가 두텁게 내려앉은 바위우에 앉아 땀을 들이노라면 희미한 꿈결처럼 저 멀리 구불구불 길게 뻗어간 오솔길로 지게를 지고 함지를 이고 하얀 옷을 입은 화전민들이 당금이라도 나타날것만 같다.

아득히 먼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불지산은 원시림으로 빼곡이 들어선 망망한 림해였을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원인불명의 천불을 계기로 농토를 빼앗긴 함경도 이주민들이 서래골, 마래골로 밀려들어와 화전밭을 일구면서 천불지산의 력사가 시작되였을것이다. 그때로부터 치렬한 삶을 살아왔던 함경도 화전민들의 파란만장했던 력사는 아니러니하게도 오늘날에 와서는 모든것을 꽁꽁 숨기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신비한 천불의 발생기원과 마찬가지로 력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있다.

연변 력사는 어느 한 위인에 의해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서있는 연변 땅 곳곳에서 땀 흘리며 살아왔던 평범한 백성들의 흔적 하나하나가 가로세로 촘촘이 엮이면서 이루어진것이고 그우에 연변의 문화가 소박하게 이름 없는 꽃으로 피여 나온것이다 . 보잘것 없고 초라하고 하찮다고 생각한 민초들이 천불지산에 흘린 땀의 기록은 진실성을 갖고있기에 진실한 력사로 기록되여 남아야 한다.

오늘날에 와서 우리가 적어도 《천불붙이》란 이 진실한 지명에 의지하고 또 적어도 이 진실한 지명을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고 나간다면 선조들의 원초적인 삶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이 지명은 많은 연변 사람들의 살과 뼈에 녹아들어 똑마치 그 옛날 천불붙이 화전밭에 심었던 감자, 메밀, 보리의 씨앗처럼 우리 삶속에 새로운 희망의 싹으로 움터 자라날것이다.

천불지산의 력사는 화전민이 개척해온 피눈물의 력사이며 천불지산 지명은 함경도 이주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아로새겨놓은 이름이다. 연변지명에서 이처럼 이주민들의 가장 원초적인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지명이 과연 또 몇이나 될까. 그리고 이처럼 너무나도 쉽게 잃고있거나 이미 까마아득히 잃어버린 소중한 지명유산은 얼마나 될까 ...

지금 천불지산은 똑 마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흘러보내고 담담해진 년로한 할아버지처럼 너그럽게 모든것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두만강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을뿐이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그한테 다가가서 그의 진실한 이름을 불러주기를 애타게 바라고있는것은 아닐까?!

/ 허성운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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