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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고맙습니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0.10.22일 15:14
● 글 김태욱(화룡)

룡두사미(龙头蛇尾)란 룡의 머리에 뱀의 꼬리란 말인데 제목은 요란하나 내용이 초라한 글역시 룡두사미라 불러도 무방할것같다. 지난겨울 모 잡지사의 편집으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고 밤잠을 설치며 쓴 인생담에 제목을 《문학과 예술, 그리고 나의 인생》 이라고 그럴듯하게 달고 한 문우에게 보였더니 머리를 설레설레 젖는다. 그건 제목이 너무 아름차게 《크다》는것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발표한 작품중에서 문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어느하나 돋보이게 쓴것이 없으니까. 그래도 다행스러운건 나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남들이 《인생을 헛되게 살지 않았다》고 평가하니 마음은 늘 편하다.



내가 쓴 그 《큰》 작품속에 소학교 6학년때 담임선생님과 나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많은 편폭에 담았다. 성격이 활달하시고 말씀을 하실때에는 청산류수같이 거침없는 열변을 토해내시던 박선생님은 내가 가장 숭배하는 선생님이였다. 박선생님은 우리가 중학교입학시험 준비가 긴장할때 위병으로 고생하셨다. 그 선생님도 인제 80고령이 넘는데다 워낙 병약한 체질에 혹시나 저세상으로 가지 않았나하고 애타는 심정으로 《선생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생전이라면 단 한번이라도 만나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습니다.》하고 그부분을 매듭지였다.


사람이 살다보면 한치 앞도 내다 볼수 없는것도 인생인가본다. 7월 5일 볼일로 현성에 갔다가 문우들을 만나 점심을 먹고 한담하다보니 늦어서야 집에 도착하였다. 우체통에는 신문과 함께 편지 하나가 꽃혀있었는데 발신지는 도문시, 성명은 박길웅이였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선생님께서…》 활랑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퇴마루에 앉아 겉봉을 떼고보니 원고지 여덟 장에다 꽉 박아 쓴 속지가 나왔다. 한장한장 읽으면서 팔십이 넘으신 은사님께서 로년에 제자들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시는 사랑의 마음을 진하게 느꼈다.


선생님은 편지의 두번째 페지에는 이렇게 쓰셨다. 《6월 20일 아침 7시, 연변텔레비방송 〈고향의 아침〉프로의 아나운서 리영화의 맑디맑은 음성으로 들려오는 〈화룡시 서성진 서성촌 과수기술원 김태욱 할아버지를 소개합니다.〉라는 그 〈김태욱〉이라는 이름 석자에 주의를 돌렸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저 73살나는 백발 늙은이가 〈내 제자 태욱이 옳은가?〉 이리보고 저리보고 따져 보다가 〈옳구나 틀림없는 내 제자 태욱이구나.〉》 이렇게 선생님은 20분간 진행되는 프로를 끝까지 지켜보시고 지나간 세월을 더듬으시며 나에게 너무나도 감격적인 편지를 보내게 된것이다.


선생님의 편지를 읽어가면서 저도모르게 1953년도의 어느 여름날밤에 있었던 사연을 떠올렸다. 우리 졸업반 21명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밤을 자면서 중학교입학시험 준비를 할때였다.

그날밤은 칠흙같이 어둡고 침침한 밤이였다. 학생마다 책상앞에 석유등잔을 켜놓고 자습을 하고있는데 이웃교실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강구고 들어보니 박길웅선생님과 박춘섭선생님이셨다.

하지만 두 선생님의 진지한 대화는 한마디도 알아들을수 없었다. 그건 다름아니라 조선말도 아니고 중국말도 아닌 일본말로 하는 대화였기때문이였다. 박길웅선생님의 격한 일본어가 중단되고 목메인 흐느낌소리가 들렸다. 그당시 극심한 위궤양에 시달리며 교학을 견지하시던 선생님이시였다. 학교의 교장과 선생님들 사이에 깊은 알륵이 존재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박길웅선생님이 교장과의 갈등과 무가내한 현실을 참을수 없어 고향집에 돌아가 장기휴양한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선생님의 흐느낌소리를 들은 우리 21명의 학생들은 처음에는 쿨쩍쿨쩍 눈물을 흘리다가 아예 목놓아 집단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책상에 엎드려 울고있는 학생들을 둘러보시던 두 선생님은 아무말없이 자리를 떴다. 우리는 그날밤 자습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불을 끄고 당금 퍼부을 소나기를 예고하듯 저기압에 시달리며 온밤을 설쳤다. 우리는 그처럼 선생님을 신뢰했고 선생님 또한 우리학들을 아끼고 정성다해 가르쳤었다.

이튿날 박길웅선생님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교단에 오르셨다. 그때 나는 선생님께서 우리와 마지막인사를 하시려나부다하고 가슴을 옥죄였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선생님은 별다른 말씀이 없이 예전대로 산수문제를 풀면서 교학을 계속하셨다. 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휴ㅡ》 하고 내쉬였다.

이렇게 선생님은 치료를 받으시며 우리들이 중학교입학시험이 끝날때까지 견지하셨다. 선생님은 우리들이 시험이 끝나자 고향집으로 돌아가 장기휴양하였는데 그때 선생님이 애쓰며 가르친 보람으로 전반 21명학생중 13명의 남학생과 4명 녀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여 80%가 승학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당시 5대1의 비례로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니 이 아니 놀라운 수자인가!


박선생님은 내가 살던 시골소학교에 몸담고 있을때 교학뿐만아니라 마을청년들을 조직하여 설명절때마다 문예연출을 조직하여 시골마을 문화생활의 이채를 돋구어 주었다. 아마 내가 선생님을 나의 우상으로 모신것도 그것때문이였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이 손수 각색하고 연출을 보면서 친히 무대에 오른 작품만해도 여러편이다.


선생님께서는 어린 나에게서 무대예술의 싹수가 보인다고 하면서 1952년 음력설에 연극 《류호란》에서 민병역을 맡겼고 이듬해 1953 년도 6.1국제아동절 기념행사때에는 전 서성구(지금은 서성진) 2000여명의 사생들앞에서 연극 《깨여진 유리조각》에서 할아버지역을 맡겨 성공적으로 연기를 펼치게끔 인도하여주셨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가 농촌문화생활과 건설에서 주력군으로 성장하고 도 문학창작에서 일정한 성적을 거둔 이 모든것은 박길웅선생님이 나에게 몰부은 뜨거운 사랑과 갈라놓을수 없다. 실로 선생님은 《인간령혼의 기사》로 천직을 다하신 분이시다.

박길웅 선생님은 편지에서 내가 반세기 남짓이 과수원예에 종사한것을 극구 치하하고 높이 평가하였는데 제자인 나로서는 실로 감지덕지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다. 그 어떠한 직업도 마다하고 외줄기인생 과수원예를 사랑하고 견지해온것은 거기에 사랑이 있고 투쟁이 있고 예술이 있고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것으로 인하여 나는 삶의 희노애락을 맛보며 반세기를 살아왔다.

안해와 함께 복분자를 따고있는 저자


하나의 묘목은 자식같은 존재이고 사랑이 슴배인 생명체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안해 먼저 과수나무와 결혼한 사람이라 말하는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10년전에 나는 중병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모대기며 의사선생에게 《선생님 나는 아직 죽어서는 안됩니다. 과일나무 새품종재배실험이 끝나지 않았는데 내가 죽으면 누가 총결서를 쓰겠습니까.》 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니 과수원예란 나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존재이자 생활의 무대이기도 한가보다.


박길웅선생님은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생동안 다섯번이나 수술대에 올라 수술을 받으며 인생고를 겪었고 지금은 요추간판돌출로 마을돌이도 지팽이에 의지한다고 하였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나의 눈시울은 뜨거워졌고 눈물이 두볼을 타고 흘러림을 걷잡을수 없었다. 선생님이 그처럼 극심한 육체적 고통속에서 삶을 지탱하며 인생 80을 넘게 살아온줄도 모르고 제나름대로 살아온 나 자신이 제자로서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선생님은 실로 강인하고 자상한 분이시다. 선생님은 편지에서 직장생활 수십년간 정치풍운이 휘몰아칠때마다 《금방망이》 《은방망이》 《구리방망이》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활달하고 락천적인 개성을 소유한 선생님은 용케도 엄혹한 그 시절을 넘겼고 그래서 더없이 존경하게 되는가부다.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전화도 걸고 선생님의 목소리도 들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80이 넘으셨지만 아직도 박력으로 넘쳤다. 당장 달리는 뻐스에 몸을 담고 달려가고 싶건만 과수원의 자질구레한 일때문에 몸을 뺄수 없다. 뜨락의 작업이 정리되는대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수십년간의 회포를 풀련다. 내손으로 빚은 복분자술과 복분자 《엑케이스》, 산머루 《엑케이스》를 선물로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상상해 본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하나의 인생 드라마이다. 20대의 청년교원 박길웅과 재롱을 떨던 10대의 천진한 소학생이 아닌, 80대의 은사와 70대의 제자가 반세기를 넘어 간직해온 그리움과 추억과 희열을 나누게 될것을 생각하면 벌써 마음은 10대의 소년으로 돌아가 두근두근 한없이 설레이기만 한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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