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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에 흐르는 문화다양성과 잃어버린 10년

[기타] | 발행시간: 2015.10.04일 18:04
구로구에 흐르는 문화다양성과 잃어버린 10년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대표/편집국장

(본문은 10월 3일 구로문화재단 주최 2015 문화다양성 가치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지원사업 "담(談)쟁이 프로젝트 구로 문화다양성 라운드테이블 시간에 배포해준 자료집에 수록한 글입니다)



한국사회는 문화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 농경사회, 제조업을 위주로 한 산업사회 그리고 90년대 들어서 서비스산업 사회로 탈바꿈하면서 3D업종을 기피하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자리를 메꾸는 외국인근로자가 늘어나면서 한국사회는 타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있다.

2015년 올해만 보더라도 추석명절을 앞두고 여기 저기서 중국동포뿐만 아니라 외국인과 함께 하는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고, 10월달에도 다문화 재외동포 관련 행사들이 곳곳에서 개최되는 것을 보면 시대가 확실히 변하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갖는다.

180만 외국인주민 시대이다. 그리고 외국인 관광산업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외국인관광객을 유치하는데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관광산업은 지방경제뿐만 아니라 한국경제의 중요한 축(軸)이 된 것이다. 특히 지난 6월 한달동안 불어닥친 메르스사태를 통하여 최근 2년 사이에 중국인관광객이 한국경제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구로구도 예외는 아니다. 구로디지털단지(舊 구로공단)를 산업관광지역으로 육성발전시킨다는 계획이 나와 중국인관광객을 유치하는데 관심이 높다. 45만 구민가운데 10%인 4만5천명이 외국인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 중국동포들이다. 재개발 늪에 빠져 있던 가리봉동은 이제야 중국동포와 상생하고자 마을소통마당이 생기고 한중문화행사가 열리기까지 한다. 이는 필자가 15년전 구로구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을 때와의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 필자는 지난 15년동안 구로구에서 활동을 하며 느낀 나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 이야기는 “구로구에 흐르는 문화다양성과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로 압축표현하게 되는데 그 이유를 나의 입장에서 설명해보고자 한다.



○ 구로구의 문화다양성

먼저 구로구는 문화다양성이 있는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64년부터 1974년까지 한국의 수출산업단지로 조성된 구로공단은 지방 각 지역에 있는 젊은 노동자들이 모여들게 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노동문학의 산실이 되었다. 구로구는 어찌보면 ‘이주와 노동’이라는 두 단어로 축약되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난 문화다양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거주하며 활동해온 가리봉동은 난민촌으로 시작해서 노동자 집성촌, 먹자골목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고향을 떠나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키워 가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그린 소설과 영화의 배경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1989년 출시한 영화 「구로 아리랑(원작 이문열, 감독 박종원)」, 1997년 양귀자 소설집 「원미동 사람들」에서는 비오는 날이면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가리봉동으로 가는 막일꾼의 이야기가 나오고, 신경숙의 단편소설 「외딴집」은 1980년대 초 구로공단 여공들의 가리봉동 쪽방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그렸다. 시인 박노해는 「가리봉시장」이란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시를 노래하였다. 이처럼 1970~1980년대 가리봉동은 공순이 공돌이로 불리우던 한국의 젊은 노동자들이 ‘서울의 꿈’을 꿈꾸던 곳이었다.


1990년대로 들어서 가리봉동은 또 다른 노동자들의 생활 모습을 담기 시작하였다. 중국 동북 3성, 곧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에서 온 중국동포들의 ‘코리안 드림’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중국동포의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알려졌다.



○ 왜 잃어버린 10년인가?


2003년 가리봉동이 균형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되고 재개발 프로젝트가 본격화된 2005년말부터 2014년말까지 이르는 기간을 필자는 구로구가 잃어버린 10년이라 생각한다. 구로구는 가리봉동을 디지털단지로 탈바꿈한 구로공단의 배후도시로 상업 비즈니스 복합 도시, 일명 첨단동으로 만들 복안을 갖고 재개발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2005년부터 곧 시작한다 해놓고 청사진까지 제시하며 마을 주민들에게 홍보하고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보상문제 등으로 10년간 시간만 끌다가 백지화되고 말았다. 사상누각을 지으려 하다가 10년을 허송세월한 안타까운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왜 잃어버린 10년라 하는가?



필자는 2000년초 구로구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구로구에 첫발을 내딛게 된 배경을 이 자리를 빌어 잠깐 소개한다면, 한국사회의 80년대 민주화운동 시대였다면 90년대에는 노동·환경운동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필자는 환경운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면서 남북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90년대 후반 환경운동의 주요화두였던 강원도 영월 동강댐 건설, 시화호, 새만금호 문제 등을 보면서 환경문제에도 한국사회 고질병인 보수와 진보 좌우진영 간의 이념싸움이 있었다. 그러면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남한으로 오려는 탈북자들이 늘기 시작하고, 황장엽 북한노동당비서가 망명하는 일도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시대가 1991년 12월경 소련의 붕괴로 종식되어 이념싸움도 끝이 났다고 생각되었지만, 한반도에서만은 여전히 냉전과 이념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90년대 말부터 북한의 핵무기개발이 국제적으로 이슈가 되고 미국의 MD(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중요한 관전포인트가 되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종이호랑이’라 불리우던 중국이 2000년 새해를 앞두고 WTO에 가입하면서 21세기 새시대에는 국제질서의 지각변동을 예고하였다. 국제정세는 급변하고 있었고, 중국은 먼 이웃이 아니라 가까운 이웃국가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본 한국사회는 우물안의 개구리마냥 보수와 진보라는 평행선을 그리며 남북문제로 이념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DJ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찬반논쟁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필자는 구로구 구로동에 위치해 있는 서울조선족교회에서 활동하는 어느 부목사님을 통해 조선족동포를 접하게 되었다. 조선족동포를 위한 신문을 만들려고 하는데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남북문제와 국제관계 등 시사종합 월간지를 만들고 있던 필자는 매일 나오는 신문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두 차례 나오는 신문이었기 때문에 부목사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서울조선족교회에 가서 중국동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썼다. 그 내용은 주로 한국에 어떻게 해서 오게 되었고 불법체류하면서 건설현장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인데 일을 하다 임금도 못받았다 다쳤는데 오야지가 연고만 발라주고 아무 보상도 없다. 그리고 여성들의 경우 딸이 한국에 결혼으로 왔는데 남편이 일도 안하고 맨날 괴롭혀서 도망나올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야 되냐 등등 너무나 안타까운 사연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울조선족교회 쉼터에는 오갈데 없는 그런 사람들이 먹고 자며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 탈북자들을 돕기 위한 피난처라는 곳이 있었는데 내가 본 서울조선족교회는 오갈데 없는 중국동포들의 피난처였던 셈이다.

필자는 그때 한국에 와서 어려움에 처하고도 도움도 못받고 괄시와 냉대,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중국동포들이 한 둘이 아니라 몇 만명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2002년 법무부 자진신고 통계에 따르면 불법체류중인 중국동포 수는 10만명이 넘었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110층 건물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이슬람 테러분자가 납치한 4대의 민항기에 타격을 받고 붕괴되는 생생한 장면이 TV화면을 통해 전세계에 전달되었다. 이것은 필자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필자는 한국에 온 중국동포들을 위한 신문을 만드는 일에 매진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무모한 결심이었다고 생각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 판단이 10년 뒤를 내다본 결심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필자는 가리봉동을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보았다. 통일실험마을, 한중교류의 마을,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중국동포들은 북한에 친척을 두고 왕래했던 사람들이라 남한 사람들보다 더 북한에 대한 이해심이 깊다. 한국사회는 영어공부는 많이 하고 미국 등 영어권 국가에서 유학을 한 인재들은 많았지만 중국어도 잘 모르고 중국 본토에서 공부해본 사람도 많지 않았다. 중국동포들은 한중교류에 있어서 그동안 한국사회가 준비하지 못한 것을 대신해줄 수 있는 인적자원이다. 한국에 나와 3D업종에서 일하는 중국동포들은 가정을 살리고 자녀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나왔다. 이들이 한국에 와서 겪은 일들은 고스란히 자녀들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할아버지의 나라 가고싶은 나라 모국이 아니라 이미 동포들 마음 한켠에는 반한(反韓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누구의 말마따나 남과 북이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에 원자폭탄을 터뜨리고 싶다는 말까지 심심찮게 나돌았다.

가리봉동은 어느 지역보다도 한국인 주민과 중국인 동포들이 서로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필자는 가리봉동에 와서 지역주민 상인들의 성금을 모아 2004년 설맞이 중국동포 위로잔치, 추석맞이 노래자랑 등을 개최하고 가리봉동 거리를 화합과 공존의 거리로 선포하며 동포들이 지켜야 할 10계명도 선포하였다. 2005년 추석때에도 중국동포와 지역민이 함께 하는 가리봉축제를 열었다. 그러나 이런 화합마당은 2006년도부터는 갖기 어려웠다. 가리봉동의 재개발 문제로 지역민들은 보상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고 곧 떠날 곳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심난했다. 그런 가운데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중국동포들도 가리봉동을 떠났다. 이렇게 10년간 가리봉동이 재개발 늪에 빠져 있는 동안 영등포구 대림동, 광진구 노유동(현 자양동)은 양꼬치 거리가 활성화 되고 지역경제에 활력이 붙었다. 한때는 어두컴컴했던 거리가 휘황찬란한 거리로 탈바꿈하면서 한중수교 이래 최대의 관심을 받고 있는 지역으로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중국동포들이 첫발을 내딛었던 구로구 가리봉동은 2014년 말 재개발이 완전 백지화 되고 난 후 이제야 서서히 중국동포와 함께 공존공생하는 마을가꾸기로 나아가고 있다.

필자는 생각한다. 만약 10년 전처럼 지역민과 중국동포들이 함께 어울려 문화마당을 열어갔었더라면 한국인 지역민과 중국동포의 관계는 훨씬 더 좋아졌을 것이고, 가리봉동은 대표적인 다문화 성공사례 마을로 손꼽히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2015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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