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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가 한국에만 있나, 음식의 특수성에 대한 착각

[조글로미디어] | 발행시간: 2016.09.05일 10:53
거짓말을 읽어드립니다 <11> 세계 어디나 있는 발효식품



각 지역의 발효 식품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새우젓, 하몽(스페인), 마스카르포네(이탈리아), 하퇴(중국), 느억맘(베트남), 리코타(이탈리아).

中ㆍ日부터 유럽 국가들까지

세계적 보편성 가진 요리법

‘한국만의 특징’ 생각은 잘못


피순대 꼭 닮은 佛 ‘부댕’ 등

선지ㆍ내장도 널리 퍼진 음식

‘고착’된 시야 깨야 발전 여지


이웃 요리사로부터 들은 일화이다. 이탈리아에서 일할 때, 이탈리아인 주방장이 묻더란다. “한국 요리의 특징은 뭐야?” 이 요리사가 반자동으로 대답했다. “발효!” 그러자 주방장이 픽 웃더란다. “세상에 발효 없는 요리도 있어?”

앞뒤 없이 “발효” 해버렸으니 “한국에서는 음식 할 때 칼을 씁니다, 불을 씁니다” 같은 소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한식 세계화 정책의 수준도 이와 다를 게 없었다. 이것은 음식 문화의 지역성과 특수성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초와 술은 대표적인 발효의 산물이다. 초와 술이 없이 사는 지역, 민족은 없다. 아시아와 유럽 곳곳의 요구르트, 크림, 치즈는 한국의 장 못잖은 발효 문화사와 내공을 쥔 식품이다. 이웃나라 중국이나 일본의 개성 있고 섬세한 두장(豆醬) 문화를 모른 체할 수 없다. 동남아시아 사람은 물고기를 써 어장(魚醬)을 담는다. 어장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젓갈과 젓국 문화는 한국만큼이나 다채롭다. 소, 양, 산양, 염소를 치며 살아온 사람들은 가축의 젖을 발효시킨 음식을 발전시켰다. 마스카르포네, 치즈, 리코타에 이르는 섬세한 구분과 쓰임을 보고 있으면 한국의 장 못잖은 두터운 발효 문화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중국의 화퇴, 유럽의 햄과 하몽 또한 한국인이 힘써 배울 만한, 발효를 낀 고기 음식이다. 중국 또는 몽골식 화퇴를 배워 축산물을 활용하자는 제안은 이미 18세기에 등장했다.

여기서 수수께끼를 하나 낸다. 맞춰 보시라. 사진 속 음식은 무엇인가?



피순대와 흡사한 프랑스 음식 ‘부댕’. 권기봉 제공

보자마자 용인 어디쯤, 또는 천안이며 예천을 떠올리는 분이 있을 듯하다. 또는 전주 시장 통의 어느 골목이 떠오르는 분도 있을 듯하다. 평안도, 함경도, 속초의 ‘아바이’가 빠져도 섭섭할 것 같다. 맞다, 그 음식이다.

돼지 한 마리에서 얻을 수 있는 온갖 부위의 고기를 알뜰히 갈무리한다. 고기뿐인가, 돼지의 힘줄이며 근막이며 먹을 수 있다 싶으면 잡히는 대로 그러모은다. 집집마다 좋아하는 채소며 곡물 등의 부재료를 더해 소를 마련한다. 선지도 빠질 수 없다. 선지는 소의 질감과 맛을 좌우하는 화룡점정이자 함량으로 보더라도 주재료 급이다. 준비된 소를 돼지 창자에 채워 넣고 잘 삶아 낸다. 온 한국인이 즐겨 먹는 음식 하나가 이렇게 태어난다.

순대, 부댕, 블랙 푸딩, 하기스, 관창

정답은 ‘순대’일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재료를 얻는 방식, 재료를 대하는 태도만 놓고 보면 순대이다. 그런데 사진 속 음식을 정확히 집어내 말하면 ‘부댕(Boudin)’이라는 프랑스 음식이다. 부댕은 삶거나 쪄도 좋고, 국물에 띄우거나 채소를 더해 구워 먹기도 한다. 선지를 듬뿍 쓰는 방식에 주목하면 영락없는 피순대다. 마르세유, 리용,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본토에서 먼 섬인 레위니옹에서도 대중이 즐겨 먹는다.

프랑스의 이웃 영국에도 비슷한 음식이 있다. ‘블랙 푸딩(Black pudding)’은 돼지 창자에 돼지 선지를 듬뿍 채워 만든다. 선지 때문에 색깔이 거무튀튀해서 “블랙”이다. 비슷한 음식은 대서양 건너 북미에도 있다. 노예 노동에 시달리던 흑인들에게, 돼지의 뼈, 내장, 발끝, 귀, 꼬리, 선지는 고마운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이 흔적은 오늘날에도 미국 흑인의 “소울 푸드(Soul food)”에 남아 있다.

이탈리아 사람도, 스페인 사람도, 독일 사람도, 러시아 사람도 네발짐승의 선지와 내장을 허투루하지 않는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양의 자투리 고기와 내장을 알뜰히 써 그네의 대표 음식 ‘하기스(Haggis)’를 만든다. 헝가리 사람들에게 사슴 선지는 최고의 소시지 재료다. 중국의 관창(灌?) 또한 선지와 내장을 두루 활용한 순대의 사촌이다.

네발짐승의 자투리 고기, 내장, 선지를 알뜰하게 활용하고, 창자에 채소와 곡물을 섞은 소를 넣기는 마찬가지라지만, 세부는 지역마다 다르다. 예컨대 한국인에게는 쌀이나 조가 순대의 재료가 되는 곡물이다. 최근에는 전분 국수인 당면이 중요한 재료로 부상했다. 하지만 한국 순대에는 귀리나 렌틸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재료는 어떤가. 유럽과 북미는 이 계통 음식에서 여전히 숙주를 모른다. 한국인은 돼지의 소창과 대창까지 두루 쓰지만 반추동물의 위에 소를 다져 넣은 적은 없다. 지역마다 향신료와 술, 조미료를 쓰는 방식도 다 다르다.

살코기만 골라 먹는 넉넉한 시대

역사 이래 지구상 어느 지역 어느 민족도 네발짐승의 살코기만 골라 먹을 만큼 넉넉하게 살아온 적이 없다. 살코기를 덩어리째로 구워 저마다 한 접시씩 먹어 치우는 식생활이 등장한 것은 최근이다. 선지내가 역하다, 내장 보는 것이 징그럽다는 감각 또한 최근에 새로이 태어난 감각이다.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강대국 미국도 그랬다.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선 공화당 후보 허버트 후버는 이런 공약을 외쳤다. “휴일에는 모든 가정의 냄비에 닭을, 모든 집의 차고에 자가용 승용차를!” 1920년대에도 강대국이었던 미국의 정치인이 풍요로운 미래를 약속할 때, 닭 한 마리는 승용차 한 대와 맞먹었다.

동물성 단백질은 귀한 식재료였다. 선지는 선지대로, 내장은 내장대로, 자투리 고기는 자투리 고기대로 알뜰하게 고맙게 먹어야 했다. 인류는 오랜 요리 경험과 미각 판단을 통해, 주어진 재료를 남김없이 끝까지 먹어 치울 방법을 찾았다. 그 분투의 흔적이 순대, 부댕, 블랙 푸딩, 하기스, 관창 등에 아로새겨졌다.

이 계통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선지 특유의 피비린내, 자투리 고기와 내장의 누린내는 재료와 음식의 개성과 특징을 압축해 드러내는 반가운 풍미다. 피비린내와 누린내가 짙어야 “제대로” 요리되었다며 손뼉을 치고, 대도시 음식점이 이른바 “잡내”를 애써 가린 요리를 내 오면 엉터리라고 손사래를 친다. 이 감각은 민족과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내 것만 특별하다는 착각 버려야

발효는 한국인에게만, 한식에서만 특별한 방법이 아니다. 돼지 또는 소의 선지와 내장은 한국인에게만, 한식에서만 특별한 재료가 아니다. 지구 공통의 고마운 재료다. 이런 방법과 재료에서 태어난 미각 감수성과 요리 방식, 그리고 음식에는 세계적인 보편성이 있다. 그리고 이 보편성을 정당하게 인식하고 나서야 지역성 또는 특수성에 대한 섬세한 인식에 다다를 수 있다.

한국인이 외래 음식을 즐겁게 맞을 여지, 한국 음식이 외국인에게 제 개성과 속성을 더 잘 뽐낼 여지란 음식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합리적 이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어디서나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며 살아왔다. 콩, 생선, 우유가 뿜는 발효향은 서로 통한다. 연세 지긋한 한국 낙농 농민은 두장의 발효향에서 치즈의 발효향을 유추하곤 한다. 사람은 누구나 피비린내도 맡고 누린내도 맡고 살아왔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나는 곡물, 채소, 향신료가 피비린내 나고 누린내 나는 음식에 이채를 더하고 지역색을 더했다. 널리 공유할 수 있는 풍미는 서로의 접점이 될 수 있고, 조금씩 다른 재료와 방법은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즐거운 계기가 될 수 있다.

어떤 재료, 어떤 방법이 내게만 있고, 내게만 특수한 것인 양 굴고 나면 다른 세상의 음식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내 음식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마저 잃는다. 이때 음식을 보는 눈에 고착이 생긴다. 음식 문화에서 지역성과 특수성은 “고착”과는 전혀 다른 범주이다. 특수는 보편과 만나 역동적으로 제 내용과 윤곽을 갱신한다. 덕분에 지역성은 더욱 풍부해진다. 고착이 머리를 내밀면 역동성은 사라진다. 나를 더 풍요롭게 할 여지, 더 넓은 세상으로 난 통로도 사라진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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