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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南岳)의 산속에 나타난 단군의 아들 [제28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12.05일 14:07
(흑룡강신문=하얼빈) "손님은 도대체 어딜 가시려는 거죠?" 택시 기사는 형산(衡山) 지명을 처음 듣는 듯 이렇게 되묻고 있었다.

  형산은 호남성(湖南)성 중부의 남악(南岳)을 이르는 이름이다. 남악은 군권(君權)을 신수(神授)한 합법성을 확정한 오악五岳의 하나로 대륙 전체에 잘 알려지고 있는 명산이다. 그런데 이 고장이 졸지에 발이라도 달려 다른 데로 움직여 갔던가.

  나중에 알고 보니 현지에서는 형산을 남악산(南岳山)으로 말하고 있었고 형산 자체는 남악산 기슭의 현성을 뜻하는 지명으로 되고 있었다.

  사실 산이든 현성이든 형산의 이름은 예전에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진晉나라 때 곽박(郭朴)이 주해를 단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은 "형산은… 오늘의 남악이며 속칭 구루산(岣嶁山)이라고 한다."고 밝히고 있다. 당나라 때의 시인 한유(韓愈)가 말한 구루산도 실은 이 형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구루산을 처음 듣는다며 택시 기사가 이번에도 손사래를 치는 것이다. 형산 현지에서 출생한 사람이 맞느냐 했더니 그 무슨 모욕을 당한 듯 화를 버럭 낸다. 외지사람이 엉뚱한 지명을 꺼내서 현지 사람에게 일부러 약을 올린다는 것이다.

  저도 몰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옛날부터 이름난 명산이라는데 이처럼 생경한 고장으로 될 수 있을까."

  '구루(岣嶁)'는 한(漢)나라 때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수록되지 않은 글자이다. "구루는 형산이며 형주(衡州)의 남악에 구루봉(岣嶁峰)이 있고 봉우리에 신의 우비(禹碑)가 있다"고 '강희자전(康熙字典)'이 밝히고 있다. 우비(禹碑)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의 인물인 대우의 치수(治水) 공적을 위한 비석을 말한다.

  남악 형산의 풍경구에서 이른 후 안내 도우미에게 또 구루산을 물었다. 도우미도 마치 누군가와 약정을 한 듯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마침 일행의 대화에 기웃거리던 웬 중년 사나이가 구루산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근처에서 무허가 택시를 운영하고 있는 현지 사람이었는데, 구루봉에 두 번인가 다녀왔다고 한다.

  사나이는 그의 성함을 습관처럼 노트에 적는 일행에게 웬 소설가의 이름을 말했다. "저 말이요? '요재지이(聊齋志異)'를 쓴 포송령(蒲松齡)과 같은 성씨입니다."

  '요재지이'는 요괴의 이야기로 묶은 청나라 초의 괴담소설이며, 저자 포송령은 이 소설로 하여 세간에 '요재(聊齋) 선생'이라고 불리는 명인이다. 보아하니 포씨는 옛 선조의 핏줄을 물려받았는지 글깨나 두루 읽은 사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포씨는 구루봉의 이야기를 어릴 때 동네 노인들에게 천서(天書) 같은 괴담처럼 들었다고 말한다.

  "구루봉에 옛 문자가 있잖아요? 세 글자를 판독하면 인명(人命)을 읽고 네 글자를 판독하면 지리(地理)를 읽는데요, 다섯 글자를 판독하면 천문(天文)을 읽는다고 합니다."

  설명을 약간 빠뜨린 것 같다. 일행은 구루봉을 알고 있는 안내자를 놓칠까 우려해서 형산의 입구에서 방향을 바꾸고 포씨와 함께 먼저 구루산으로 향했다. 포씨의 이런저런 이야기는 구루산으로 가는 길에서 묻고 들은 것이다.


구루봉의 산정에 만든 구루의 비석.

  포씨는 자칭 명인 포송령의 후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선조는 이 명인의 고향인 연해지역의 산동이 아니며 오지의 사천이라고 한다. 1930년대 부친이 국민당 군대를 따라 형산으로 왔는데, 그의 고향 방언이 심해 사망될 때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고향 이름을 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친님은 국민당 군대의 소좌였다고 하는데요, 국공내전 시기에 미리 정세를 읽고 개인 증명자료들을 전부 소각했다고 합니다."

  이로 하여 해방(1949) 후 역대의 정치운동에서 포씨의 부친은 겁난(劫難)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포씨의 선조 고향과 그들의 옛 친지의 이름은 그 누구도 모르는 수수께끼로 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구루봉의 옛 주인은 세상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천년의 미스터리로 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대우(大禹)는 구루봉에 비석을 남겼지만, 기괴한 글씨체의 옛 문자는 여전히 판독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갑골문(甲骨文)의 거두인 곽말약(郭沫若)이 각고의 연구 3년 만에 겨우 세 글자를 판독했을 정도.

  구루봉의 옛 문자는 일명 과두문(蝌蚪文)이라고 하는데, 머리가 굵고 꼬리가 가늘며 올챙이의 모양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일찍 선진(先秦) 시기의 문자이며 한(漢)나라 때 출현한 명칭이라고 한다.


  구루봉 중턱에 있는 대우의 비석 옛 문자.

  "이상한 글자가 있다고 해서 구루봉을 찾는 관객들이 꽤나 있어요." 포씨가 이렇게 설명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관객들은 거개 구루봉 남쪽의 도시 형양(衡陽)에서 찾아온다고 한다. 형양은 형산의 남쪽에 위치, 호남의 소재지 다음으로 꼽히는 중심 도시이다. 구루봉은 형산에서 직선거리가 40㎞ 정도에 불과하지만, 우회노선을 이용하기 때문에 실제 70㎞여의 거리를 상거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악 기슭의 현성인 형산 보다 오히려 남악의 밖에 있는 형양의 사람들이 오히려 구루봉에 익숙하고 또 이곳에 자주 다녀오고 있었다.

  구루산으로 향한 서쪽 입구에는 벌써부터 길 안내판이 서있었으며 가운데 여러 개나 등장하고 있었다. 명승지의 형산에도 없는 우리글의 안내판이 있었다. '구루봉'이라는 이 생경한 글의 지명은 우리말을 번역한 사람에게도 무척 어려웠던 모양이다. 미스터리의 우리글 이름 '군웅 펭'을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구루봉에 오르는 내내 궁금증을 풀 수 없었다.


구루산으로 길에는 이와 같은 표지석이 여러 개 세워있다.

  아무튼 지명의 번역자는 구루봉에 한국인들이 자주 다니기 때문인 것 같다. 실제로 이윽고 산중턱의 우왕전(禹王殿)에서 만난 노인은 한국의 승려가 부근 산기슭의 옛 사찰 은진사(隱眞寺)를 다녀오면서 대우의 옛 비석에 들린다고 말한다.

  과두문이 있는 대우의 옛 비석은 바로 우왕묘를 이웃하고 있었다. 글은 9행으로 되어 있으며 도합 77자였다. 현재 대륙 각 지역에는 우비(禹碑)가 10여 곳 되며 모두 구루봉의 우비에서 복각한 것이라고 전한다.

  상고 시대 대우는 치수를 위해 산지사방을 다니면서 많은 책을 열독했다. 훗날 그는 '황제․중경(黃帝․中經)'에서 완위(宛委) 즉 남악의 형산에 황제가 숨긴 금간(金簡)의 옥문(玉文)이 있으며 이 글에 치수의 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간의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대우는 산을 오르다가 지쳐서 돌을 베고 잠깐 잠을 잔다. 이때 꿈에서 사자(使者) '현이(玄夷) 창수(倉水)'를 만나는데, 사자는 대우에게 금간의 옥문은 황제의 바위 꼭대기에 있으며 꼭대기의 반석(磐石)을 깨뜨리면 책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비로소 반석을 깨뜨리고 보서를 얻은 대우는 치수의 도를 따라 마침내 홍수를 다스린다. 그 후 대우는 금간의 옥문은 남악산에 돌려주고 산꼭대기에 숨기니 그 봉우리가 바로 형산 남천문의 금간봉(金簡峰)이라고 한다. 이 같은 대우의 신적(神迹)은 옥백(玉柏), 대우암(大禹岩) 등으로 남악의 여러 곳에 있다. 우비(禹碑)는 대우 치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대륙에서 제일 오랜 비문이다.

  대우가 남악에 이르렀고 구루봉 아래에 석비가 섰다는 전설은 동한(東漢) 때의 '오월춘추(吳越春秋)'에도 기록되고 있다. 구루봉의 중턱에는 대우의 신 자국이 남겼다는 바위와 대우가 주거했다는 혈거가 있으며 또 대우가 휴식을 취했다는 석상(石床)이 있다.


  대우의 비석 근처에 있는 우왕전, 위로 올라가면 또 사찰 승려의 옛 무덤이 있다.

  어찌됐거나 대우는 실제상 신(神)의 도움으로 치수의 결과물을 이뤘다는 것이다.

  한국 상고사 '환단고기(桓檀古記)'는 단군 왕검(王儉)을 천제(天帝), 태자 부루(扶婁)를 북극수정자(北極水精子)로 적고 있다. 이에 따라 대우에게 치수의 도를 가르친 사자를 단군의 태자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 현이는 북쪽의 단군조선 본국이며 창수 사자는 북국수의 사자로서 단군 왕검의 태자 부루를 가리킨다는 것.

  '환단고기'는 일본 강점기의 초기에 편찬한 사서로 시야비야 구설수가 많으며, 이 이야기를 전개할 경우 짧은 편폭의 기사에 자칫 끝자락이 없는 논쟁으로 번질 수 있다. 그러나 고조선의 태자가 야설 같은 인물이라고 한다면 삼국 시기의 고승은 분명히 남악의 산정에 나타났었다고 '송․고승전(宋․高僧傳)'이 기록하고 있다. '송․고승전'은 현광(玄光, 생몰일 미상) 법사가 신라 웅주(熊州)의 사람으로 중국에 와서 불법을 공부하여 득도했다고 전한다.

  잠깐, 이때 '송․고승전(宋․高僧傳)'은 기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웅주는 지금의 한국 충청남도 공주이며 옛 백제의 수도였다. 기록에 따르면 현광은 대륙 남북조(南北朝) 시기의 진(晉)나라 태건(太建) 5년(573)에 형산에 들어왔다.

  "현광 법사는 백제 사람이 되네요. 신라 사람이라면 그때 신라가 그때 벌써 웅주를 강점하고 있는 셈이 되겠죠."

  사실상 '송․고승전'을 편찬할 그 시기 송나라 사람에게는 반도의 나라가 신라라는 이름으로 익숙했던 것. 관습의 오류는 그렇게 절묘인 눈속임을 만들며 세상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현광이 바다 넘어 대륙 오지의 형산에서 수행한 것은 진나라의 고승 혜사가 남악 형산에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혜사는 후세에 의해 '천태종 2대조'로 모시며 진나라 황제가 친히 '대선사(大禪師)'로 봉한 희대의 인물이다.

  미구에 일행은 형산의 산중에 올랐다가 감탄을 연발했다. 남악산은 역대로 도교와 불교의 성지였지만 지금은 신자들이 아닌 관객들로 넘치는 풍경지로 되고 있었다.

  고승 혜사가 형산에 개창한 절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형산에서 제일 유명한 사찰의 하나로 되고 있었다. 진나라 광대(光大) 원년(567)에 지은 천년 고찰 복엄사(福嚴寺)이다. 이 사찰의 원 이름은 반야사(般若寺)로 북송(北宋) 시기에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당나라 선천(先天) 2년(713), 선종(禪宗) 7대조 회양(懷讓)이 이곳에서 설법했으며 돈오성불(頓悟成佛)의 설을 천명, 남악파(南岳派)를 만들었다. 그의 제자가 또 임제(臨濟), 위앙(潙仰)을 창설하며 이로 하여 복엄사는 '7대조의 도장', '천하의 법원(法院)'이라고 불린다.그런데 다른 절보다 복암사에는 관객이 특별히 드물었으며 한적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복구공사가 도처에 진행되고 있어 관객이 드나들 장소가 아니었다.


  남악의 형산에 있는 고찰 복엄사 입구.

  현광은 남악에 올라 혜사 법사를 알현하고 '법화경(法華經)' 안락행품(安樂行品)의 이치를 전수 받았다. 그는 열심히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으며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증득(證得)하였다. 577년, 혜사 법사가 입적하자 현광은 대륙의 강남에서 떠나는 상선을 타고 반도의 귀국길에 올랐다.

  현광의 신이(神異)한 행적은 원(元)나라의 고서 '신승전(神僧傳)'에 기록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광은 귀국길에 천제의 초청을 받아 높은 곳에 올라 바다의 용왕과 수계(水界)의 정령들에게 7일 동안 불법을 전했다는 것. 귀국 후 현광은 고향 웅주의 옹산(翁山)에 절을 짓고 포교하였는데 그를 뒤따르는 자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 나중에 현광은 남악 형산의 조사영당(祖師影堂)과 천태산(天台山)의 국청사(國淸寺) 사당의 28인 서상(書像)에 망라되는데, 이에서 그의 덕망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겠다.

  사찰을 오가다가 근처의 아름다리 은행나무에 다시 걸음을 멈췄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무려 1,400여년 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일행은 복엄사에서 현광이 남악의 형산을 찾았던 옛날의 그 시절의 '비석'과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오호라, 천년의 비석은 옛 고장에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역사에 있었던 고사(古事)는 더는 다 읽을 수 없었다.


조선족, 중국을 뒤흔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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