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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사는 길은 없다, 거래처와 공존하는 길을 택하라.

[기타] | 발행시간: 2017.01.09일 10:57

철령시예미복장유한회사 김영옥사장

  

철령시 신성구 동북물류성에 위치해있는 철령시예미복장유한회사는 철령시 복장업계에서 손꼽히는 회사다. 다년간 년 평균 500만원 이상의 내의수출량을 확보하고있는 이 회사의 코기러기는 철령시 우의촌 태생의 김영옥(1959년생)사장이다.

1979년 철령시제5중학교를 졸업한 김영옥사장은 철령현의료기계공장에 3년간 몸담고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철령시료북호텔 경리로 발탁됐다. 4년동안 호텔의 내부음식점 경영을 주관하며 풍부한 관리경험을 쌓고 비교적 안일한 생활을 영위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기회를 보아 자리를 옮겨 개인사업을 하기로 마음굳혔다.

1986년이였다. 대련에 살고있는 친척이 대련에서 한국내의장사를 하면 돈벌이가 잘될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치밀한 시장조사를 거쳐 그는 창업의 터전을 대련으로 옮겼다. 1995년 미식왕에 20평방메터의 가게를 읾대하여 한국내의도매상점을 오픈한데 이어 1997년 항만교에 역시 20평방메터의 가게를 오픈했다. 한국제품의 선호도가 높은 때여서 고객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고작 20평방메터 규모의 가게로 근 10년간 년 100만원의 판매량을 유지하는 기적을 창조했다.

위기는 외부에서 찾아왔다. 1996년, 한국경제의 불황으로 그녀한테 내의상품을 공급하던 한국회사가 부도났다. 아무런 징조없이 일방적으로 당하다보니 가게문을 닫을수밖에 없었다.

강자에게 위기와 좌절은 항상 재도약의 발판이다. 가게문이 닫기자 단골고객들이 물건을 달라고 아우성이였다. 단시일내 고품질의 한국내의를 대량으로 들여올수 없었다. 자체로 고품질의 한국내의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2년여의 준비단계를 거쳐 1999년 한족기업인과 동업으로 본계에서 한국내의제조공장을 가동했다. 한국에서 오더를 가져다 상대방이 요구하는 디자인대로 내의를 가공해주는 동시에 국내 고객들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공장설립 2년만에 년 수출액 200만딸라에 도달하며 호황가를 달렸다.

2004년 아들 홍운봉씨가 군에서 제대되여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 아쉽지만 본계시의 한국내의제조공장을 한족기업인에게 넘기고 독자적으로 철령시 은주구 동료해촌에 철령시예미복장유한회사를 세웠다. 동업할 땐 한국에서 오더를 받아오는것이 주업무였는데 독립하고보니 오더주문에서 생산에 이르기까지 모두 직접 체크해야 했다. 자금줄도 항상 문제였다. 김영옥사장은 공장운영이 아무리 어려워도 30여명 직원들의 로임만은 제시간에 지급하군 하였는데 이런 직원들에 대한 배려가 회사가 성공할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자금줄보다 더 무서운것은 반품이다. 내의제조는 특수한 분야여서 제품의 기술요구가 엄격하다. 브래지어 한개 만드는데 40여개 제조절차가 있다. 그중 제조절차 하나만 틀려도 반품이 가능하다. 그것도 100여만원이 웃도는 한 컨테이너의 제품을 모두 반품하기에 김영옥사장은 아무리 바빠도 제조과정과 제품질만은 직접 챙기군 하였다.

"내의제조에서 실수는 불허다. 완벽한 고품질의 제품을 제시간에 납품하며 철저히 신용을 지켜야 한다." 김영옥사장의 지론이다.

창업초창기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기업이 정상 가동된지 1년만인 2008년, 김영옥사장은 세계경제위기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한국측 거래처에서 어려운 시장환경속에 살아남기 위해 오더생산가격을 일방적으로 내렸던것이다. 합작을 그만둘가고도 생각했지만 랭철한 분석끝에 한국측 거래처와 경제위기 난관을 함께 이겨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회사 직원들의 로임만 보장할수 있으면 거래처가 주는 가격이 아무리 낮아도 추호의 차질도 없이 제품을 가공하여 납품했다. 몇년후 경제위기를 용하게 이겨낸 한국측 거래처는 어려울 때 떠나지 않고 함께 버텨준 김영옥사장에게 단계적으로 오더생산가격을 인상시켜주었다. 신용을 지켜 믿음을 얻은 동시에 회사발전의 든든한 뒤심을 확보하며 안정된 지속적인 성장을 가져올수 있었다.

2014년 김영옥사장은 철령시 신성구 동북물류성에 회사를 옮기며 공장규모를 확대, 직원을 120여명으로 늘리고 설비들도 수십대 갱신했다. 현재 철령시예미복장유한회사는 탈렌터브랜드에 16년째 녀성내의를 대행가공해 수출하고있고 비비안브랜드, 코스코마트, 한국텔레비죤홈쇼핑에는 5년넘게 녀성내의를 공급하고있다.

"눈앞의 리익만 따지지 말고 회사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 나만 사는 길은 없다. 거래처와 공존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김영옥사장, "나만이 아닌 함께 사는 경영철학"을 실천하는 그의 모습에서 내의제조업계의 "불패의 녀왕"을 보는듯 하다. 최수향기자

출처: 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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