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튼 패츠/ 페드로 헤르난데스)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인 1979년 5월 25일, 미국 뉴욕에서 6세 아동 이튼 패츠가 사라졌다. 이튼은 집에서 스쿨 버스를 타러 가던 짧은 거리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실종됐다.
훤한 대낮 도심에서 아이가 사라지면서 미국 사회 전체는 큰 충격에 빠졌다. 당시 부모들은 노이로제에 걸려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늘 함께 다닐 정도였다.
(▲우유 팩에 부착된 '실종 아동' 사진 예시)
이튼 패츠 실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우유 팩에 사라진 아동의 사진이 등장한 것도 이튼 패츠 사건 때문이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튼이 사라진 5월 25일을 세계 실종 아동의 날로 제정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 정부는 실종 아동을 조기에 발견하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나 FBI까지 동원된 수사에도 불구하고 이튼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고 사건은 점점 잊혀져 갔다.
(▲최초 용의자 오스닐 밀러)
그리고 패츠가 실종되고 31년이 흐른 2010년, 맨해튼 검찰청으로 부임한 사일런스 밴스 검사는 패츠 사건을 재수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건 기록에서 이튼이 오스닐 밀러라는 중년의 남성과 친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밀러를 의심했다. 이튼이 끌려가며 저항한 흔적이 전혀 없어 실종이 면식범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밴스는 오스닐 밀러의 지하실에 이튼 패츠의 시신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집을 전면 수색했지만 결과는 허사였다. 오스닐의 집에서는 시체는 물론, 시체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나오지 않았다. 여론은 검찰과 경찰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었다.
하지만 한 시민의 제보로 사건이 반전됐다. 제보자는 '페드로 에르난데스'라는 제3의 남성이 주변에 "소년을 죽인 적이 있다"는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경찰에 체포된 페드로는 "이튼에게 음료수를 사 주겠다고 유인해 식료품점 지하실에서 목졸라 소년을 살해한 뒤 쓰레기통에 시신을 버렸다"고 자백했다. 드디어 30여년을 기다려온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는 듯 했다.
그러나 페드로가 이후 진술을 번복하면서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피고의 변호인단은 페드로가 정신 병력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들 역시 결정적인 증거가 페드로의 자백밖에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유죄를 확정하지 못하고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사이러스 밴스 검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 준비 끝에 항소하며 페드로 주변 인물 수사를 시작했다. 검사 팀은 체포 당시에 경찰에 고백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철저히 조사했고, 새로운 증거가 쏟아져 나왔다.
페드로와 같은 교회에 다녔던 사람은 "그가 '아이를 공격했다'고 말하면서 교회에서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꿇었다"고 증언했으며, 헤르난데즈의 전 부인 역시 페드로가 '소년'을 죽였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실종 아동 포스터들 가운데 '이튼 패츠'의 포스터만 가져와 벽장에 넣었다고 진술했다.
또한 페드로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사건이 벌어진 1979년 페드로는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건너갔다가, 이튼이 사라진 며칠 뒤 뉴저지로 되돌아간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배심원들은 페드로의 납치 살해 혐의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배심원들은 정신병력이 실제와 가상 현실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사이러스 밴스 검사는 끈질긴 승부 끝에 마침내 승리했다. 페드로는 오는 2월 28일 형량을 선고받을 예정이다.
검찰은 페드로가 납치와 살인 혐의로 최소 징역 25년을 선고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YTN PLUS 정윤주 모바일 PD
(younju@ytnplus.co.kr)
출처: Y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