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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60인]상해의 《김고문》 아십니까?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09.10.27일 10:02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 기획보도(36)

포스코를 유치한 항천전문가 김민달선생 만나

○ 《동방홍》인공위성 풍운1호연구에 참석한 항천전문가

○ 문화혁명시기 조선특무로 몰려 두번 감옥행

○ 12억딸라 포스코를 비롯 20억딸라 유치한 상해개방의 공신

○ 조선족기업가들의 상해진출 징검다리 되여준 고문



김민달 프로필

1941년 길림성 룡정시 덕신향 출생.

1960년 연변1중 졸업, 길림대학에 입학.

1965년 상해 복단대학에 배치.

1966년 중국과학원으로 전근, 중국 첫 인공지구위성인 《동방홍》총체설계팀에 합류.

1968년 조선특무로 몰리여 감옥생활.

1972년 강제로동.

1976년 등소평에게 편지를 쓴것이 죄가 되여 재차 감옥생활

1978년 루명을 벗고 중국과학원에 복귀. 기상예보 인공위성시스템인 풍운1호, 풍운2호 연구에 종사.

1995년 중국과학원 퇴직, 퇴직후부터 15년간 30여개(20억딸라 규모) 의 한국기업 중국에 유치, 《투자유치달인》으로 명성.

15억딸라투자의 한국포스코 (포항제철)항목 중국 유치 성공.

장강삼각주 지역 여러 지방정부 고문으로 위촉되여 《김고문》으로 불림.

11월 1일로 다가온 《제5회 한민족 큰 잔치》행사로 다망하게 보내는 김민달회장(69세)을 만나기란 실로 쉽지 않았다. 24세의 나젊은 동북의 조선족대학생이 중국의 최대도시 상해에 가서 사업하면서 장장 45년동안 중국의 정치풍파에 실려 영욕의 파란곡절을 겪어왔던 사람이다. 지금은 조선족사회에서 《김고문》 혹은 《해결사》로 알려진 그는 부지런한 사회활동가이며 젊은 조선족기업가들과 늘 골프를 치며 친목을 다지는 《멋진 신사》로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첫 인공위성설계에 참가한 항천전문가 … 두번 감옥행

어려서부터 머리가 비상하다고 소문난 김민달은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1중을 졸업하고 1960년 길림대학에 입학, 졸업후 복단대학에 배치되였다가 1965년 국가급 최고프로젝트이고 중국 첫번째 인공위성인 《동방홍》총체설계팀에 뽑혀 중국과학원으로 상해우주비행연구센터에 근무하면서 그의 꿈인 우주과학자의 길을 걷게 되였다.

하지만 그의 과학연구생애는 뜻밖의 정치적인소로 곡절적인 길을 걷는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함께 일하던 조선족과학기술일군이 조선에 건너간것이 치명적인 빌미로 되여 1968년 4월 10일, 28세의 청년과학일군 김민달은 억울하게 《조선특무》라는 루명을 쓰고 5년간의 수감생활을 시작한다. 감방에서 거의 페인이다싶이 되여버린 김민달이 출소한것은 1972년 말, 하지만 과학원에서는 그를 과학연구에 가담시키지 않고 강제로동에 참가시킨다.

3년간 강제로동으로 나날을 보내던 김민달은 당시 국무원사업을 주관하고있던 등소평동지에게 편지를 보내 억울함을 호소, 해명해줄것을 요구한다. 인편을 통해 전해온 소식은 당시 등소평동지가《당신들의 문제는 꼭 해결될 날이 있으니 건강에 주의하며 그날을 기다리라》는 부탁, 하지만 기쁜 소식을 접하고 해뜰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김민달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온다.

주은래총리가 서거하고 등소평이 다시 《4인방》에 의해 비판투쟁을 받으면서 등소평에게 편지를 보낸적이 있는 《조선특무》 김민달은 1976년에 또다시 감옥으로 끌려가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가 석방되였을 때 량친은 아들의 해방된 소식도 알지 못하고 고인이 되였다. 억울하게 감옥에 있는 기간에 그의 연변 덕신에 있는 형님도 《문화대혁명》전에 동생 뵈러 왔던 일이 죄가 되여 갖은 고초를 치렀다. 그리고 3명의 동창친구도 놀러 와 어쩌다 함께 술을 마신것이 죄가 되여 문초를 받다가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여 감옥밖에서 자살한 일까지 발생했다.그가 옥중에서 허약해진 몸을 가누고 11년만에 고향에 찾아갔을 때는 가난을 이겨내면서 자기를 공부시켜주셨던 부모가 모두 저 세상으로 간 뒤였다.

1978년 년말에야 루명을 깨끗이 벗은 김민달은 중국과학원에 복귀하여 다시 과학연구사업에 종사하게 되였다. 그에게 맡겨진 일은 기상예보 인공위성시스템인 풍운프로젝트, 동란시기 귀중한 청춘을 루명속에 흘러보낸 김민달은 흘러간 십년세월을 찾아올것이라도 하듯 과학연구사업에 몰두한다. 1995년 과학원을 퇴직할 때까지 김민달선생은 줄곧 인공위성 풍운1호와 풍운2호 프로젝트에 혼신을 바쳤다.

12억딸라의 포스코항목 유치… 《투자유치의 달인》의 명성

대학교를 졸업하고 긴장한 과학연구사업에 종사하면서 혼령기를 넘긴 김민달선생은 또다시 특무루명때문에 10년을 허송하게 보내다나니 39세나던 1979년에야 지금의 안해와 결혼하고 아들 하나를 본다. 무당파, 무소속 과학자인 김민달선생은 1995년에 과학원의 사업을 퇴직한 후 자유분방한 성격과 한발 빠른 의식으로 새로운 인생행로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게 된다.

중한수교를 시점으로 국제적 대도시인 상해시와 천혜의 장강삼각주는 한국기업들의 투자열점지역으로 되였다. 한국기업들 특히 대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하려면 가교역할을 할 전문인재가 매우 수요되였다. 동북지역에서 온 나젊은 대학생통역일군들도 많았지만 상해지역 특히는 장강삼각주일대를 잘 알고 투자항목에 대해 투철한 인식을 가지고있는 전문인재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30년동안 상해에서 살아오고 또 과학연구분야에서 오래동안 연구사업을 해온 김민달선생은 그 누구보다 넓은 인맥과 현지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였다.

그는 대담히 퇴직을 선택한 후 당지 정부부문과 협력하여 한국기업유치에 혼신을 다했다. 그는 한국기업인들을 만나 장강삼각주지역에 대한 소개와 고찰을 도와나섰다. 그가 가장 자호하는 투자유치의 명작이 바로 총 투자액이 12억딸라되는 포항제철(포스코)항목 유치다. 세계적인 글로벌기업인 포스코가 중국진출에 실패하게 할수 없다는 생각이였다. 그가 적극적으로 발벗고 나선 대가로 포스코는 끝내 1995년 12월에 장가항에 정착한다. 그때 소속도 명함장도 직책도 없는 김민달선생에게 특별한 칭호가 붙게 되였는데 바로 《포스코 장가항 정착의 기여자》라는 칭호였다.

포스코의 성공적인 투자유치를 계기로 김민달선생은 한국기업의 중국진출 파급적인 효과를 직시하게 되였다.》 하나의 대형기업이 중국에 정착하게 되면 수많은 조선족일군이 수요되고 우수한 조선족청년들은 한국기업에서 선진적인 기술과 경영방식을 배우게 된다는것, 퇴직후에도 조선족사회에 공헌할수 있다는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고 김민달선생은 그때를 회억한다.

그 후로부터 김민달선생은 더욱 많은 한국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해왔다. 15년간 김민달선생은 30여개의 한국기업들을 장강삼각주지역에 유치했는데 총 투자액이 무려 20억딸라에 달한다고 한다. 1년에 평균 2개 업체의 투자유치를 성공시키는 그를 두고 업내인사들은 《투자유치의 달인》이라고 친절하게 부른다. 김민달선생은 투자유치에만 그치지 않고 자기가 유치한 업체들의 비상임 고문을 주동적으로 맡고 각 업체들의 애로사항들을 해결해주군 한다.

동시에 그는 장가항, 소주, 곤산 등 장강삼각주 여러 도시의 정부 투자유치 관련부서의 고문으로도 활약하고있기 때문에 관련업체와 당지 정부로부터 모두 신임을 받는 훌륭한 중개인으로 될수 있었다. 이지역 일부 도시들의 경제개발구건설과 투자유치사업을 책임진 부서들에서는 주동적으로 김민달선생을 찾아와 한국기업유치사항을 토론하고 조언을 부탁하군 한다.

중국진출에 성공한 포스코의 경우 투자규모를 확대하고자 하는 시점에서 김민달선생은 《다시 한번 관련부서를 찾아다니며 협상을 하고 승낙을 받아와야겠다》고 말한다. 그는 일년중 한두번씩 자기가 유치한 기업들을 돌면서 애로사항이 없는지, 사업진행은 잘 되는지를 알아보군 하는데 그 곳들을 일주하는데도 한두달의 시간이 걸린다고 말한다.

조선족기업 상해진출의 징검다리

그를 통해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도 많지만 또그를 통해 상해에 발을 들여놓은 조선족기업들도 꽤 된다. 그는 어른으로서 젊은 조선족기업의 성장에 늘 관심과 남다른 애정을 쏟고있다. 창업자금이 모자라는 조선족기업가들을 도와준 일, 투자방향을 바로 잡아준 일은 이루다 말할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그가 도와준 조선족기업들중 억딸라이상 매출액을 자랑하는 기업이 3개가 되고 천만딸라규모이상 기업은 수두룩하다고 한다. 그가 상해에 진출한 조선족기업인들에게 늘 하는 한마디 말은 바로 《경영을 잘해 재벌이 되라》이다. 세계가 바라보는 재벌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고 조선족을 우러러 볼것이라는것이 그의 리유다.

그는 《상해의 경우 2000년 전까지는 많은 조선족들이 현지 한국인들보다 못살았지만 그 이후로는 많은 한국인들이 오히려 조선족기업에 취직할 정도로 조선족의 경제적지위가 향상되였다》며 《 현재 상해 조선족의 평균생활수준이 한국을 초과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고 말한다.

상해에 거주하는 조선족인구가 5~6만명으로 급증하면서 조선족사회의 활동도 점차 많아졌다. 해마다 상해에서 진행되는 《한민족 큰 잔치》에 김민달선생은 개인의 이름으로 5만원씩 후원하군 하는데 《고향을 떠나 상해에 와서 사는 우리 민족이 한집안처럼 똘똘 뭉쳐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란다.

오늘날 상해조선족사회가 창조한 경제적부는 엄청나다. 그 내면에는 한국의 선진적인 기술과 경험 그리고 상해라는 경제, 금융, 무역의 중심도시, 조선족의 언어우세와 근면, 대담성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다. 김선생은 《각급 조선족간부들이 조선족사회문제에 조금만 관심을 돌린다면 화동지역의 조선족사회가 더욱 발전, 장대해질수 있다》고 말한다.

70세를 바라보는 김민달선생은 파란만장한 지난날을 돌이키면서 과학자로부터 자유인으로 거듭났지만 잃어버린 시간과 젊음을 되찾고 중국의 개혁개방, 경제발전과 우리 민족을 위해 더 많은 공헌을 할수 있었다는것에 한점의 후회도 없다고 자신한다.

[관련자료 ]― 상해시의 조선족

개혁개방후 고향을 떠나 상해로 온 조선족들은 민행구 룡백(룽바이)구역과 오중로부근에 집중되여 오붓한 조선족동네를 이루고있으며 기타 17개 구, 1개 현의 그 어느 곳이든 조선족의 발자취를 찾아볼수 있을 정도로 침투되여 뿌리를 내리고있다.

상해와 우리 민족의 인연은 남다르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대한민국림시정부가 상해에 있을 당시에 벌써 상해는 조선족의 활동중심지의 하나였다.

50년대 중국정부의 조선지원 일환으로 수백명의 조선로동자들이 상해에 와서 방직, 무선전 등 기술을 배우게 되였다. 언어소통을 위해 동북지구에서 120명의 혈기왕성한 조선족전문가들을 뽑아 상해에 파견하여 통역과 학습을 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해방후 첫패의 상해진출조선족이란다. 학습완료후 조선의 로동자들이 륙속 귀국하자 대부분의 조선족통역일군들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중 30여명의 재능있고 전도유망한 전문가들은 상해에 남아 상해시 각 분야에 배치되였다. 그들이 바로 오늘의 상해조선족사회의 원로들인데 그들가운데서 반수는 아직도 생존해있으며 그들의 자녀들은 상해태생의 첫 조선족으로 되였다.

60년대 상해시의 일부 대학들에서 조선족학생들이 공부하면서 상해 조선족사회가 생기를 띠는듯 하였으나 문화대혁명으로 대부분이 돌아갔고 대학입시가 회복된 77년을 계기로 상해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중한수교가 이루어진 1992년까지 상해시 호적등록 조선족은 730여명이였다. 중한수교후 한국기업들이 상해에 대거 들어오면서 상해의 조선족수는 기하학적으로 불어났다.

이 시기 과학기술분야와 정치분야 위주이던 상해조선족사회구도가 2차산업과 3차산업 분야로 확대된다. 상해복단대학 국제문제연구원 박창근(62)교수에 따르면 중한수교이후 상해에 온 조선족가운데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은데 기회의 도시 상해가 그들의 활무대로 되였단다.

편집/기자: [ 김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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