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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마을 새마을]만족의 김씨는 왜 조선씨족의 계보서 사라졌을까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06.23일 09:30
 (흑룡강신문=하얼빈)마을에서 먼저 만난 건 사람이 아니라 고목이었다. 가문비나무는 고산식물이라서 평지에서 웬만해서는 보기 힘들다. 그런데 장장 360년의 수령이라니… 또 이 수령처럼 오랜 전설이 길가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있었다.

가락국 태조 왕릉의 위치를 밝힌 김해김씨 족보의 일부.

  "건륭(乾隆)황제가 평천(平泉)에서 수렵을 하다가 휴식을 취했다고 하는데요. 그때 잠깐 모자를 벗어서 걸어놓았던 옛 나무라고 하지요."

  길을 안내한 왕씨가 이렇게 고목을 자랑하고 있었다. 동네방네의 이런저런 기문(奇問)은 경적처럼 무시로 차안을 흔들었다. 왕씨는 현지에서 택시 기사로 20년이나 있었다고 하니, 그가 바로 걸어 다니는 '고목'으로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고목은 정말로 황은을 입었는지 원뿔형의 모자처럼 생기고 있었다. 실제 건륭황제는 하북성(河北省) 승덕(承德)의 이 고장에 가끔 다녀갔다고 한다. 승덕의 행궁은 1703년부터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 등 3개 조대의 89년 동안 건설된 청(淸)나라 제왕의 궁원이자 피서지이다.

  고목 근처에 생긴 마을도 황제의 덕택을 승수(承受)하고 있는 듯 했다. '김장자(金杖子)'는 김씨가 황제의 은혜를 받아 장자 마을의 장두(庄頭, 우두머리)로 되었다는 뜻. 이름을 그대로 풀이한다면 김씨가 말뚝을 박아 땅 지경을 삼은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이웃한 마장자(馬杖子)와 더불어 사합원(四合園)이라고 이름한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사합원의 마을보건소에 무작정 손기척을 냈다. 의자에 앉아있던 웬 중년 사나이가 알은체를 했다. 마침 그는 김장자에서 살고 있는 토박이고 또 김씨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일행이야말로 그 어느 황제의 덕택을 입는 것 같았다. 사내의 말에 따르면 김장자는 100여 가구나 되는 큰 동네이며 이 가운데서 김씨는 반수 정도의 50여 가구라고 한다.

김해김씨의 가문에 전승되고 있는 옛 족보.

  "우리 마을의 저 고목은요, 증조부가 이주할 그때 벌써 있었다고 하던데요."

  청나라 말, 김씨의 증조부는 기근을 피해 이곳 평천으로 살길을 찾아왔다고 한다. 증조부의 고향이 어디인가고 물었더니 남쪽의 산동(山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족명(族名)은 분명히 한족이 아니라 만족이라는 것이다.

  만족 김씨는 황실의 성씨를 나타내는 성씨이다. 청나라 시조 애신각라(愛新覺羅)의 애신(愛新)은 한자로 '금(金)'을 뜻하며, 각라(覺羅)는 성, 씨족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애신각라는 김씨(金氏) 성을 가진 씨족이라는 의미이다. 청나라는 중국을 통치한 초기부터 여러 지역에 8기군을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만족의 김씨는 장성 남쪽의 산동에도 나타났다. 아직도 산동의 청주(靑州)에는 옛날 만족이 살던 집거촌이 현존한다. 김씨는 오히려 보건소에 내놓은 기자의 신분증 이름을 일장 기문으로 읽고 있었다.

김장자의 보건소에 걸려있는 축기에 김씨 이름이 걸려있다.

  "어, 김형은 조선족이네. 우리 김씨 계보에 조선족이라는 민족이 있어요?"

  뭔가 앞뒤가 훌쩍 바뀌는 것 같았다. 시초부터 김씨의 족명에 흥미를 가진 것은 우리 일행이었다. 그러나 둘의 시각을 바꿔보면 해답이 나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신각라 즉 김씨가 만족의 이름난 혈통의 성씨라면 또 조선반도의 274개 성 가운데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성씨의 유명한 씨족이다. 김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623본이 나타난다. 여러 김씨는 거의 모두 신라의 알지(閼智)를 시조로 하는 경주 등 김씨의 계열과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의 계열로 연원을 두고 있다.

  "조선에 귀화한 김씨가 있는데요, 제일 많은 게 여진족(女眞族)에 뿌리를 둔 김씨이죠. 이 여진족이 바로 지금의 당신의 족명인 만족입니다."

  실은 우리 자신에게 해석하는 말이기도 했다. 답사 도중에 일부러 김장자 마을을 찾은 원인이었다. 김장자는 평천 지역에 여럿 되지만 모두 하나의 만족이었다.

11대손 박씨의 박술원씨가 가문의 가계도를 밝히고 있다.

  조선왕조 실록(實錄)》의 기록에 따르면 세종(世宗)은 귀화한 여진족 수백 명에게 김씨 성을 하사했다. 귀화한 여진족에게 김씨 성을 내린 것은 12세기 여진족이 세운 금(金) 왕조에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여진족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하나도 없는 것으로 전한다. 족보가 대량 나오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반 후인데, 그때 사대주의가 만연한 조선에서 '만주 오랑캐'라고 하면 멸시의 대상이었다. 여진족의 김씨는 그의 조상이 귀화인이라도 이를 감췄을 것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할아버지와 함께 조선족 답사자를 졸래졸래 따라나온 박씨 소녀, 박씨마을을 등지고 한국으로 가버린 엄마의 사진을 품에 꼭 안고 있다.



  "받는 정이 있으면 주는 정도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조선의 일부 김씨도 만주 8기에 귀속되고 있었다. 《만족씨족통보(滿族氏族通譜)》에 기재된 만족 8기의 조선인(人丁, 인부)는 김씨와 한씨, 이씨, 박씨 등 42개나 되며 와중에 대량의 조선 성씨는 8기의 포의(包衣, 노복)에 대응하고 있다. 조선인의 포의 좌령(佐領, 관명)은 늘 만주 포의 혹은 만주로 구분되었다. 그래서 "몽골, 고려(조선)의 사적은 대개 만주와 같으니, 응당 만주 성씨처럼 편재(編裁)해야 한다"고 건륭황제가 《통보》에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반수 이상의 조선인은 원유의 '성+이름'의 작명 방법을 포기하고 만족 풍속의 이름인 '쟈리허(嘉里哈)', '해구니(海古尼)' 등으로 바꾸고 있었다고 건륭 왕조의 문헌자료가 밝힌다. 김씨와 한씨는 후금(後金) 초기 귀부(歸附)한 반도의 큰 성씨인데, 청나라의 개국 시기 전공이 혁혁하여 조정의 신뢰를 받은 명문 귀족의 사대부로 되었다. 이 김씨는 가경(嘉慶, 1796~1820) 연간 칙지를 받아 '김가(金佳)'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그럼 이 김씨는 만족 김씨가 된 거네요. 본관을 만족이라고 고쳐야 하지 않을까요?"

박장자의 지킴이 고목, 박씨의 선인이 심었다고 한다.

  어찌하거나 조선인의 김씨는 이로써 새로운 씨족으로 만족씨족의 계보에 들어가며 조선씨족의 계보에서 퇴장하는 것이다. 설사 조선인의 후예가 원래의 조선 성씨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그의 조선반도의 이주민 신분을 더는 가려내기 힘들다. 수백 년 세월이 흐르면서 풍속과 언어 등이 모두 현지의 타민족과 동화(同化) 되었기 때문이다.

  3백 년 전의 명(明)나라 말, 청나라 초의 조선인이 이러하거늘 하물며 8백 년 전의 원(元)나라의 고려인들임에랴. 고려인들은 일찍 13세기 때 벌써 중국 경내에 천입하고 있었다고 옛 문헌이 기재하고 있다.

  "태종(太宗) 10년(1238) 8월, 태종이 살례탑(撒禮塔)에 명령하여 고려를 쳤다. 고려인 홍복원(洪福源)이 군중(軍中)에서 몽골군을 맞아 항복하여 소속 편민(編民) 1500가구를 얻게 되었으며 부근의 주와 군에도 와서 귀부하는 자가 있었다."

  《원사(元史)》의 〈외이전(外夷傳)〉에 나오는 기록이다. 또 《고려사》 권24에 따르면 원나라 헌종(憲宗) 4년(1254) 몽골군대가 고려를 침입했을 때 그들에게 사로잡힌 (고려의) 남녀는 무려 26만 8천명에 달했다. 많은 기록물에서 하필이면 고려인 홍복원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은 그가 나중에 원나라 조정에 의해 '동경총관(東京總管)'으로 임명되어 요양 지역 고려 주민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해와 달이 바뀌고 조대가 바뀌었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계속 끊지 않았다. "요(遼, 요양) 개(盖, 개주)에 도망하여 들어간 사람이 몇 천 만인지 알 수 없다"고 《세조실록》 권34가 기록한다. 이에 따르면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고려인은 홍무(洪武, 1368~1398) 연간에 3만여 명이며 영락(永樂, 1403~1424) 시기에 이르러서는 만산군(漫散軍)에 또 4만여 명이 되었다." 명나라 가정(嘉靖) 16년(1537)의 지방지 《요동지(遼東志)》의 지리편에 따르면 "(요동에) 화인(華人, 중국인)이 7/10이고 여진에 귀속된 고려 토착민이 3/10이었다."

  이맘쯤이면 누구라도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다. "고려인들은 모두 조선반도에 돌아갔어요? 왜서 대륙에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있지요?"

  고려정부는 1274년부터 1347년까지 74년 기간 27차에 거쳐 고려인의 원나라 영역에 천입한 상황을 조사하고 그들을 귀환할 것을 요구했다. 이 무렵 귀환된 포로, 유민은 충열왕(忠烈王) 23년(1297)에만 해도 350가구에 달했으며 또 병란 등으로 스스로 귀국한 고려인도 있었다. 그럴지라도 상당수의 고려인은 대륙에 남았다. 원나라의 지방관청은 구실을 만들어 고려인 조사를 저애했다. 또 고려의 주, 현에서 일부 부역자들은 요양, 심양 등으로 간 후 종적을 감췄다. 역시 충열왕 때의 동일한 시기로 전하는 《고려사》의 이야기이다.

  대륙에 이주한 고려인은 일부의 문헌에 약간의 인명을 남겼을 따름이다. 그들이 한데 모여 공동체를 이뤘던 옛 마을은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일부 지역에만 잔존한 옛 지명 '고려촌', '고려골(高麗溝)', '고려골목(高麗巷)' 등은 금싸라기처럼 고려인의 옛 마을 옛 이야기를 가까스로 떠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고려인과 조선인의 성씨는 종국적으로 모래에 스며든 물처럼 찾을 수 없는 걸까…

  잠깐, 대륙의 언제 어디서든지 조선인의 신분을 지울 수 없는 성씨가 있다. 박씨는 여러 본관 가운데서 단 1본도 외래 귀화 씨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장자와 이웃한 평천 박장자(朴杖子)의 박씨는 분명히 조선족이 아닌 만족으로 되어 있었다. 박장자는 약 350년 전 평천에 뿌리를 내린 박씨 마을이다. 박씨의 맥락을 전하는 가계도가 전하고 있다고 하면서 박술원(朴述元) 씨가 그의 가문에서 1967년 만든 계보를 내놓았다.

  "우리 박씨는 20개 돌림자를 쓰고 있는데요, 이에 따르면 저는 11대손입니다."

  박씨는 현재 박술원 씨가 살고 있는 평천의 석호구촌(石壺溝촌)에서 14대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석호구촌은 물론 박장자 그리고 평천 남쪽의 박가원(朴家院), 승덕현의 양장자(良杖子)에 집거(集居) 혹은 잡거(雜居)하고 있는 박씨는 모두 이 20개 돌림자를 쓰고 있었다. 다르다면 여러 마을의 박씨가 사용하고 있는 돌림자의 일부 글자가 각기 동음이의어의 다른 글자로 되고 있었을 따름이다.

  아니, 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도 다른 나라처럼 차이가 나는 게 있었다. 똑 같이 승덕시의 소속이지만 평천의 박씨는 만족이며 관성현(寬城縣) 양갑대(亮甲臺)에 사는 박씨는 조선족이다.

  "하나의 박씨가 2,3개 민족으로 되는데요, 도대체 혈통과 민족특징의 어느 걸로 나눠야 하는가요?"

  유대인의 경우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 자식은 유대인으로 인정이 된다. 민족이나 문화, 혈통을 떠나 유대교로 개종하면 '우리는 한 조상을 모시는 가족'이라는 개념으로써 받아들여준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국의 황인종이나 흑인에서도 유대인이 소수 존재하고 있다.

  아무튼 박씨의 후예에게 동족이라면서 언제인가 시집을 왔던 여인이 여럿이나 되었다. 필경 박씨는 무슨 민족이라고 하든지 현지의 풍습에 물젖고 있으며 여느 조선족과 판판 달랐다. 나중에 일부 여인은 솔가도주하다시피 박씨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해와 달이 바뀌어도 지킴이처럼 박씨 마을의 복판에 서있는 고목이 있었다. 박장자의 이 느릅나무는 2백여 년 전 박씨의 옛 선인(先人)이 일부러 마을에 옮겨 기른 나무라고 한다. 부근 김장자의 가문비나무처럼 옛 전설을 땅에 심고 있지만, 박씨의 후예는 어느덧 족명을 개명하고 다른 계보의 '성씨'로 잇고 있는 것이다.

  그날 저녁, 외국유학을 앞두고 아들이 다짐을 받듯 묻던 말이 자꾸 가슴을 긁었다.

  "저는 조선말을 몰라요, 인제 독일의 처녀를 얻으면 저의 아들은 뭐죠? 손자는 또 뭐구요? 그들은 우리 김씨의 족보에 올릴 수 없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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