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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마을 새 마을-2] 자희태후의 마수를 벗어난 박씨와 그의 후손들

[조글로미디어] | 발행시간: 2017.07.19일 14:45
옛 마을 새 마을,우리네 전설은 이어진다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이 이야기는 북경의 '궁정정변'에 첫 꼭지를 떼고 있다. 사실 박씨의 선인(先人)은 천리 너머의 장성 밖에 벌써 이야기의 복선을 깔아놓고 있었다. 그들은 심양(沈陽) 일대에서 만주 8기에 편입되었으며 청군(淸軍)을 따라 장성을 넘어 북경에 진출했다고 한다.

  "북경에서 갑자기 '궁정정변'이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그때 고조부가 가족을 이끌고 외지에 피난을 했다고 합니다."

  4대 조부 박자유(朴自有)가 잠시 피신했던 곳은 당산(唐山) 부근의 난현(灤縣) 봉자진(棒子鎭)이였다고 박만은(朴萬銀, 이미 사망) 옹이 구술하고 있었다.

실제로 1861년, 청나라 함풍(咸豊) 황제가 병사한 후 '궁정정변'이 일어났다. 자희(慈禧) 태후 등과 함풍 황제의 유언을 받은 숙순(肅順) 등 8대 고명대신(顧命大臣) 사이에서 인기된 것이다. 고명대신의 우두머리인 숙순의 목이 잘리는 등 8대 대신 계열의 관리는 전부 삭탈되었다. 이때부터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며 자희태후가 청나라 정부의 최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궁정정변'은 말처럼 궁중에서 일어난 정변이죠, 그런데 일개 서민이라면 굳이 도읍을 떠나 도망을 했을까요?"

  누군가의 어림짐작이다. 하긴 청군을 따라 북경에 진출한 박씨 가문에는 황제를 보필하거나 8기병의 장령으로 있은 인물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박자유가 '궁정정변'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었는지는 일말의 문자자료도 찾을 수 없다. 사실상 박자유와 그의 선인의 행적 자체가 '궁정정변' 직전까지 거의 공백으로 되어있다.

  아무튼 '궁정정변'의 그림자는 마치 악귀처럼 박씨의 뒤를 밟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유가 봉자진에 이른 후 뒤미처 보기 드문 흉년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엎친데 덮인 격이었다. 박자유는 부득불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방랑하면서 걸식을 했다. 미상불 북경을 급급히 떠날 때 행낭마저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 그들은 장성을 넘어 북쪽 수백리 밖 진황도(秦皇島) 청룡현(靑龍縣)의 경내에 들어섰다.

다른 설이 있다. 북경에 정착한 박씨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 한 갈래가 난현의 봉자진에 이주했다고 '하북성지(河北省志)》'가 기술한다. 그 후 강희(康熙) 8,9년(1669~1670) 땅이 가물어 흉년이 들었으며 이때 박씨 부부 한 쌍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장성 밖으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는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엮고 있지만 분명히 서로 다른 인물이다. 필경 주인공 박씨는 강희 연간부터 함풍 연간까지 내처 2백년을 장수한 선인(仙人)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무슨 사건 때문에 북경을 떠난 박씨는 여럿이나 된다. 당산(唐山) 야리촌(冶里村)에 군집(群集)한 박씨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야리촌 박씨의 시조 박충문(朴忠文) 형제 역시 요녕성(遼寧省)에서 만주 8기에 편입되어 산해관(山海關)을 넘었다. 또 그들도 원수를 피하기 위해 부득불 북경을 떠났다고 박충문의 8대손 박동성(朴東成, 89)이 기술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충문 형제가 북경을 떠난 것은 1730년의 무렵이다. 참고로 승덕시(承德市) 평천현(平泉縣) 박가원(朴家院) 박씨의 선조는 강희 8년(1669), 칙지를 받들어 장성 밖에 정착했던 황제의 부하로 알려지고 있다. 북경에 거주하다가 하북성 여러 지역에 분산된 박씨는 이처럼 시조가 각기 다른 분파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가족의 궁중 비사(秘事)를 회억할 때 박만은 옹은 청룡현 팔도하향(八道河鄕) 탑구촌(塔溝村)의 박씨 가족에서 항렬이 제일 높았다. 하지만 이름자에 넣은 일만 '만(萬)'의 돌림자처럼 그가 기억에 담고 있는 가족사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박씨 가족의 조사실록에 문자로 일일이 기록된 게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현재로서는 박만은 옹은 물론이요, 기록자인 연변의 민속학자 천수산(千壽山) 씨도 모두 다른 세상의 사람으로 되었다. 또 우리 일행이 탑구에서 만났던 박만령(朴萬伶, 77) 옹 등의 구술은 박만은 옹의 전부가 아닌 일부를 중복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박만령 옹은 박씨 가족의 일만 '만(萬)' 돌림자 항렬에서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이다.

  박만령 옹은 선조가 후손에게 남긴 것은 단지 이 성씨뿐이 아니라고 했다. 선조가 옛날 갖고 있던 실물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때 고조부님은 아내랑 함께 멜대를 메고 왔는데요, 멜대의 한쪽에는 아들을 싣고 다른 한쪽에는 돌태를 실었다고 하지요."

돌태는 흙덩이를 고르거나 씨앗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땅을 다지는 연장이다. 길을 떠난 후 짐이라곤 멜대에 실은 어린 아들밖에 없는 박자유가 하필이면 무거운 농기구의 돌태를 소지한 이유가 있었다. 저울 천평(天平)처럼 양쪽에 서로 평평하게 만든 중량의 보정(補正)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박자유의 후손에게는 농기구의 의미를 떠나 가족의 이주사를 사진처럼 보고 책처럼 읽을 수 있는 유물로 된 것이다.

  박자유의 직계 후손인 박만은 옹에게 이 돌태가 전승되었고, 그의 다섯째 아들 박재(朴財, 62) 씨가 뒤뜰에 돌태를 보관하고 있었다.

  돌태는 청룡현 중서부의 박장자(朴杖子)에 이른 후 비로소 농기구의 원래의 기능을 회복했다. 박장자는 박씨가 지경 말뚝을 박은 곳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렇다고 박자유로 인해 생긴 마을은 아니었다. 청나라 강희(康熙) 9년(1670), 웬 박씨가 부근의 창려현(昌黎縣)에서 천입하여 정착했으며 그의 성씨를 따라 마을을 박장자로 작명했다고 청룡현의 '지명자료회편(滙編)'이 기재하고 있다.

  박자유가 그의 말뚝을 땅에 박을 때 다른 박씨는 벌써 이곳에 살고 있지 않은 듯하다. 훗날 이 박씨는 그 흔적을 박장자의 옛 이름에만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박자유도 얼마 후 박장자를 떠나면서 또 멜대를 어깨에 올려놓았다. 이때 박자유의 집안에 일대 '정변'이 일어났다고 박만령 옹이 그 내력을 전하고 있었다.

  "고조부님은 박장자에서 관씨(關氏) 성의 만족 고아를 입양했는데요. 그런데 이 입양아가 장가를 간 후에는 박씨 가족과 몹시 불목했다고 합니다."

  박자유의 가족은 뒤미처 북쪽 20리 밖의 마을 탑구에 행장을 풀어놓았다고 한다. 그때까지 탑구는 10여 가구의 만족과 한족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약 2백 년 동안 마을은 계속 탑을 쌓아올렸고 마을의 덩치를 크게 만들었다. 박씨 가족도 계속 번식하면서 종국적으로는 백명 단위로 헤아리는 큰 가족으로 되었다. 후손들은 박자유의 뒤를 이어 8,9대손의 항렬에 이르고 있었다.

  박재 씨는 가족의 족보가 없는 게 큰 유감이라고 했다. "부친의 항렬은 돌림자로 순서가 똑똑하지요, 그러나 우리 조대부터는 이름자를 봐서는 항렬을 잘 알 수 없습니다."

  돌림자는 가족 사람들의 서열을 알려주는 표지이다. 돌림자의 소실은 탑구를 양쪽으로 뭉텅 갈라놓은 도랑처럼 3백년의 박씨 가계를 홀연히 끊어버리고 있었다. 실제로 탑구의 이 도랑이 바로 박씨 가족을 갈라 방계(傍系)를 만들었다고 한다. 탑구 박씨의 사상 최대의 '정변'은 정말로 이 도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광서(光緖) 13년(1887), 선조 박자유처럼 '멜대'를 메고 고향을 등진 후손이 나타났다.

  "그때 탑구에 심한 수재가 일어났다고 해요. 그래서 3대 조부의 한 형제가 위당구(葦塘溝)로 이사했지요."

  잠깐, 박만은 옹의 이 구술에는 뭔가 어긋나고 있는 듯하다. '궁정정변'이 일어난 1861년경 박자유가 어린 아들을 멜대에 실을 정도라면 그로부터 25년 후 탑구에 수재가 일어날 때 아들의 나이는 기껏해야 30세 정도이며 제3대의 손자가 아직 독립한 성인으로 장성할 수 없다는 것. 한편 관변측 문헌인 '하북성지'는 탑구에서 인구가 번성하면서 땅이 부족했으며 이 때문에 박씨 가족이 이주를 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니저러니 대영자향(大營子鄕) 위당구촌과 근처 맹가와포촌(孟家窩鋪村)의 박씨는 분명히 3대 조부의 헝제 박태(朴太와 박복(朴福)의 후손이라고 현지에 전한다. 대영자향은 탑구에서 북쪽으로 약 20리 상거하는데, 박만은 옹이 구술하던 그때 박씨는 거의 100명 단위의 인구로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멜대'를 메고 타지로 떠난 박씨는 박태와 박복 형제만 아니었다. 일부는 도산(都山)을 넘어 관성현(關城縣)에 이사했고 또 대륙 북단의 흑룡강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뒷이야기이지만, 관성현 양갑대(亮甲臺)에서 살던 박경재(朴慶財, 77) 옹은 30여 년 전에 조상이 살았던 탑구를 찾았다고 한다. 이때 박경재 옹은 선조 박자유의 4대손인 박만령 옹을 만나 그를 '숙부' 항렬의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실은 박경재 씨는 저와 동갑내기였는데요, 둘 다 용띠라서 잘 기억하고 있지요."

  탑구 서쪽의 도산 기슭에는 박자유와 그의 3대 이내의 일부 자손의 묘소가 있었다. 탑구 밖의 일부 박씨도 청명이 되면 종종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묘소는 뒤에 산을 뒤에 기대이고 있었으며 앞으로 먼 산이 보이는 평지에 있었다. 묘소 양쪽에는 또 각기 나지막한 산이 서있었다. 도산 건너 저쪽 박가원의 박씨가 조상을 모신 옛 묘소 자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박재 씨 역시 박가원의 박씨처럼 미리 풍수를 보고 조성의 묘혈을 잡았다고 말힌다. "우리 조상의 묘소 자리는 기막히게 좋았다고 말해요. 도산의 여맥이 옛 무덤의 뒤쪽에서 비쭉 올라온 모양이 흡사 관모(官帽)와 같아요. 또 묘소의 양쪽으로 산 모양의 위사(衛士)가 지키고 있지요."

  미구에 박씨 가족에 재화가 미친 것은 수재가 나면서 조상 묘소의 풍수를 해쳤다는 것이다. 실제 광서 연간에 탑구를 들이닥친 골물은 도랑 곬을 박자유와 그 후손 묘소의 근처까지 파헤쳤다. 박자유의 후손들이 살던 곳을 떠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것.

  어찌됐거나 청룡현 박씨의 진실한 족명(族名)은 1964년에 비로소 밝혀졌다. 이때 정부가 민족을 식별, 확인하면서 만족이 아닌 조선족으로 주민등록증에 족명을 올렸다. 청룡현의 박씨는 이로써 제일 오랜 이주사를 공식 보유한 첫 조선족으로 되었다.

  사실 박재 씨는 조선족의 풍속이나 언어 등을 옛 세대부터 말끔히 잊고 있었다. 그럴지라도 그는 계속 가족의 뿌리를 찾고 싶었다고 한다. 한때는 '고려인'이 살고 있었다는 옛 마을 '고려포(高麗鋪)'를 찾아갔다. 고려포는 선조 박자유가 살던 박장자와 불과 20리 상거한다. 그러나 박재 씨는 실망과 함께 더구나 큰 의문을 안고 돌아왔다. 고려포의 옛 주인은 명나라 말, 청나라 초 대륙에 살던 그의 박씨 선조와 같은 '고려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대의 고려인들이라고 하는데요, 천 년 전(수, 당 시기)에 마을에 점포를 세웠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해요."

  사실상 하북성의 일부 박씨는 그 연원을 명나라를 이어 원나라 심지어 그 앞의 조대에서 찾고 있었다. 선인의 옛 기억은 산 저쪽 승덕의 박씨 후손에게 그렇게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었다.

  멜대를 메고 장성을 넘은 박씨의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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