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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60인]중국조선족 제반 사업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09.11.24일 10:23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 기획보도(45)

원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고 주덕해선생 회고

■ 호요방: 주덕해동지의 서거소식을 들은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는 《그는 훌륭한 동지였다》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 인민정부(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전신)가 성립, 주덕해가 정부 주석으로 당선.

■ 그는 연길 모아산 숲, 연변의 사과배, 벼농사, 연변황소, 연변 축구, 연변대학 , 연변가무단, 신문출판방송---오늘날 연변조선족의 모든 삶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불리운다.


고 주덕해(朱德海) 프로필:
1911년 3월에 출생, 본명은 오기섭

1929년에 혁명에 참가, 1931년에 입당, 동북항일련군 제4군 제3퇀 부방류수처 당지부서기 력임

1936년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 수학, 귀국후 팔로군 359려 퇀공급처 지도원, 연안조선혁명군정대학 총무처 처장, 동북민주련군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위, 동북행정위원회 민정부 처장 력임

1949년 3월 중공연변지위서기,4월 연변대학 교장,5월 연변공서 전원을 겸임

1952년 9월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주석에 취임

1954년 9월에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 성정부 부성장 력임

1955년에 중공연변주위 제1서기 겸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으로 임명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중앙 후보위원으로 당선

1967년 4월 문화대혁명시기 참혹한 정치박해로 연변을 떠났고 1972년 7월 3일 무한에서 억울함을 품은채로 원통하게 서거

호요방총서기가 특별지시한 기념비

1984년 5월이였다. 조선에 대한 국사방문을 마치고 렬차편으로 귀국길에 오른 당시 중공중앙 호요방(胡耀邦) 총서기는 연변에 들렸다. 그는 길림성과 연변의 주요지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특별히 주덕해(1911-1972)동지의 기념비를 세울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

《주덕해동지의 서거소식을 들은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는 〈그는 훌륭한 동지였다〉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평평한 언덕 좋은 곳을 선택하여 기념비를 세우도록 하십시오. 잔디밭도 만들고 꽃도 심고 풀도 심고 나무도 심어 유원지처럼 아름답게 가꾸도록 하시오. 사람들이 늘 와서 놀면서 주덕해동지의 업적을 기리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호요방동지는 손수 《주덕해동지기념비(朱德海同志記念碑)》라고 제사를 써주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86년 6월 기념비는 준공되였고 주덕해동지 서거 14돐이 되는 날(1986년 7월 3일) 제막식이 열렸다. 국가, 성, 연변 정계와 학계, 로동계, 학교의 대표 3000여명이 참가하였다.

기념비는 연길시 공원 서산마루에 터를 잡았다. 사철푸른 소나무 숲속에 높이 20메터의 웅장한 회백색 화강암건축물이 숙연히 솟았는데 정면으로 연길시체육장 건너편 산우에 세워진 혁명렬사기념비하고 마주 바라본다. 비명은 호요방동지의 글을 새긴것이고 비갓은 당기와 송백, 진달래꽃잎으로 조각되였다. 당기는 생전에 주덕해동지가 공산주의자였음을 의미하고 송백은 그의 업적이 만고에 빛남을, 진달래꽃은 연변 2백만 여러 민족 인민들의 숭경의 뜻을 상징하고 있다.

그때로부터 22년이 지난 2008년에 주덕해기념비뒤에 주덕해동지와 그의 부인 김영숙동지의 묘소가 마련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장

광복이 나자 모택동과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의해 태항산을 떠난 무정이 령도하는 조선의용군은 심양에 이르렀다.

1945년 11월 7일, 심양 서탑의 학교운동장에서 조선의용군 전체 군인대회가 열렸다. 무정이 중요한 연설을 했다. 조선의용군을 세개의 지대(支뚠)로 편성하여 동북에서 부대를 확건하였다. 바로 이날 대회에서 주덕해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장으로 임명되였다.

주덕해의 원명은 오기섭(基燮), 로씨야 연해주 우쓰리스크 부근 산촌에서 태여났다. 원적(原籍)은 함경북도 회령군 팔을면 복색동이였다. 8살되던 해 아버지를 비적들한테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그는 1929년 화룡현 수동촌(현재 룡정시 지신향 승지촌)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수동촌은 룡정에서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해 있으므로 독립운동가들이 늘 출몰하던 고장이기도 했다. 그후 민족독립운동이 공산당의 항일혁명운동으로 변화되면서 그는 독립운동가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하게 된다.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1937년 쏘련 동방로동대학에 가서 2년을 학습하고 연안으로 돌아왔고 1943년에는 연안조선혁명군정대학 총무처 처장으로 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을 중심으로 한 북만(北滿: 오늘날 흑룡강성 내)에 거주하는 20만명 조선인들의 생명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임무를 맡고있었다.

광복 직후 원 괴뢰만주국 군대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산산이 흩어져서 비적으로 변질하였다. 그들의 주요한 략탈대상은 일본인과 조선인이였다.

준엄한 시기에 조선의용군의 역할은 중요했다. 1945년 11월 18일에 20여명의 간부들을 거느리고 심양을 떠나 할빈에 도착한 주덕해는 북만 각지에 조선독립동맹을 건립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마을을 지켰다. 오래지 않아 제3지대는 3천명의 병력을 가진 부대로 발전하였다. 1948년 3월 이 부대는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11사로 재편성되였다.

우리 민족 교육문화 기석 마련한 민족사무처장

부대가 장춘쪽으로 떠난 후 주덕해는 부대를 떠나 동북국 민정부 민족사무처장으로 임명되였다.

《문화가 없는 민족은 우매한 민족이다.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관건은 교육에 있다.》

주덕해는 교육으로 민족부흥을 일으킬것을 호소하고 각 지에 학교부터 세웠다. 1946년부터 1947년 상반년까지 북만 조선인들은 토지를 분여받고 마을마다에 학교가 섰다. 조선인들이 집중된 고장에서는 중학교까지 꾸렸다.

《우리 민족은 자신의 언어문자를 가지고있고 우수한 문화예술전통을 가지고있다. 일제치하 36년동안 황민화정책의 압제를 받아 문자는 취소당했고 문화예술은 처참하게 유린을 당했다. 우리의 신문을 발간하고 우리의 문공단(文工團: 문예공연단체)을 조직하여 문화유산을 발전시켜야 한다.》

주덕해는 교육다음으로 문화건설에 정력을 몰부었다. 그는 《민주일보》를 발간하고 문공단을 조직하여 선전공연을 하였다.



1952년 8월 30일, 주덕해가 《길림성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 시정건의》(수정고)를 보고하고있다.

연변조선족자치구 인민정부 주석

1949년 2월 그가 연변에 와서 손을 댄 첫 사업이 동북조선민족인민대학을 건립하는것이였다. 그보다 먼저 1948년 12월 길림성민족사업회의에 참가하였을 때 주덕해는 대학을 건의했고 연변에서는 임춘추, 문정일, 로기순, 로승균과 같은 사람들로 주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일에 착수했던것이다. 드디여 1949년 4월 1일에 대학이 첫 문을 열었다. 바로 오늘 날 연변대학의 전신이다.

주덕해가 연변으로 온 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재중국 조선인(중국조선족의 전신)의 국적문제였다. 주덕해도 비록 중국 공산당원이지만 조선인 혁명가의 신분으로 연안에서 활동하였으며 조선의용군 역시 외국인 부대였다.

공산당이 점령한 동북 농촌에서 토지개혁을 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국적문제는 돌출해졌다. 외국인은 토지소유권을 가질수 없다.

주덕해는 제3지대에 있을 때 재중국 조선인은 중국공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리유는 간단하다. 재중국 조선인은 조선반도에서 이주해 와 이 땅을 개척하고 이 땅을 지켜 싸웠고 이 땅을 건설하고있다. 동북의 벼농사는 조선인이 개척했고 항일과 해방 전쟁의 승리에는 조선인의 피의 대가가 크다.

정부는 조선인을 중국공민과 똑같이 대우하여 토지를 분여하여 주었다. 연수현에서만 해도 1956세대의 조선인 가정이 있는데 그들은 7570헥타르의 토지를 분여받고 당지의 인민정부로부터 토지문서를 발급받았다.

주덕해는 혈연적으로 보면 당시 조선반도는 조선인의 모국이지만 정치적으로 보면 중국은 조선인의 조국이라고 했다.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그는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호칭을 바꾸어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기타 소수민족과 동등한 권리를 향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2년 9월 3일 드디여 연변조선족자치구인민정부가 성립되었다. 주덕해가 정부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이것이 오늘 날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전신이다.



연변조선족자치구 정부 주석과 부주석들인 주덕해(가운데), 동옥곤, 최채의 합영.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신인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제1기 인대대표들이 투표를 하고있다. 대표 총 수는 300명, 그중 조선족이 209명으로 대표 총 수의 69.7%를 점했다.

억울한 루명으로 정배살이와 암증에 시달려

유언: 《나는 길림에 돌아가고싶습니다》

1966년 12월 동북의 《태상황》으로 불린 모원신이 한무리 학생들을 데리고 연변에 왔다. 오자바람으로 주덕해를 첫 투쟁대상으로 잡았다. 주덕해에게 씌워진 루명은 매국적, 독립왕국, 지방민족주의,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등등이였다.

매국적이라는 근거로 두만강 연안 량국간의 자유로운 왕래의 통로를 만들었다는것이였다. 연변의 조선족은 거의 모두가 두만강을 건너온 함경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두만강을 사이 두고 혈육들이 갈라 산다. 그들 혈육간이 자유롭게 오갈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덕해는 1955년 동북공안부에 제의하여 당지 공안파출소에서 변경통행증을 발급할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이듬해 조선내무성과 협의하여 다섯개 두만강 통상구를 만들었고 나중에 16개로 증가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선족들은 당날로 통행증을 받아서 조선으로 다녀올수 있게 되였다. 아침에 조선에 건너갔다가 가서 장을 보고 돌아오기도 하고 랭면을 먹으러 조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영화구경도 갔다 왔다. 문화대혁명 시기 한때는 통상구가 완전봉쇄되였다가 지금은 조선족들은 변경통행증을 사용하여 국경을 넘나드는데 지장이 전혀 없다.

독립왕국이라는 근거는 《주덕해가 연변조선족자치구를 길림성과 대등한 지위로 올려서 독립하려고 했다》는 루명이다. 반우파투쟁이 일어나고 주덕해가 좌적사조로 당내로부터 지방민족주의분자로 억울하게 락인찍히게 되였다.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라는것은 주덕해가 길림성 부성장 겸 연변주장이였으므로 당연지사라고 하겠다. 당시 간부직에 있던 사람은 누구라 없이 집권파모자를 쓰고 투쟁을 맞았던것이다.

주덕해가 투쟁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은래총리가 수차 《주덕해는 훌륭한 동지이므로 보호해야 한다》고 지시했고 마명학을 연변에 파견하여 보호하도록 했다. 연변에서 갖은 수모와 투쟁을 당한 주덕해는 호북성 강한평원에 있는 53농장으로 정배를 갔다. 기계수리공장에서 수리공으로 일했다. 식량도 매달 12킬로그람의 남방 입쌀이 고작이였고 고기 한점, 콩 기름 한방울도 공급해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암에 거렸고 치료를 거부했다.

《나는 길림에 돌아가겠습니다.》

주덕해는 이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기고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연길에 세워진 주덕해기념비.

송임궁 : 《우리들은 그이를 따라배울것이다》

원 길림성 성장 송임궁동지는 《주덕해일생》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덕해동지는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하여 길림성 특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 많은 사업을 하였으며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우리들은 영원토록 그이를 기념하며 그이를 따라 배울것이다.》

주덕해는 연변의 초대주장으로서 연변자치주를 성립하고 제반사업을 궤도에 올려놓는데 기반을 다진 가장 큰 공로자의 한사람으로서 오늘날의 조선족의 정치,경제,문화,교육,스포츠 등 제반사업의 기틀을 마련한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주덕해의 명예는 《4인방》이 분쇄된 후 중공중앙에 의해 다시 회복됐고 중공중앙은 그의 력사공적을 충분히 긍정했다. 주덕해의 유골은 줄곧 장춘혁명렬사릉원에 안치돼 있다가 가족의 뜻에 따라 2008년 4월 길림성정부의 비준을 거쳐 연변주 당위와 정부의 노력으로 그가 오매에도 그리던 연변땅으로 봉환되였다.

우리는 연변의 산천초목, 연변의 도시와 시골 구석구석에서 주덕해의 체취를 느낀다. 그는 연길 모아산숲, 연변의 사과배, 벼농사, 연변의 황소, 연변축구, 연변교육, 연변가무단, 신문출판방송―오늘날 연변 조선족의 모든 삶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다.

편집/기자: [ 특별기고 류연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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