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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 발 들여놓은 첫 한국인... 연태의 '신라방'을 만드는 그 촌장의 이야기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09.11일 10:59

(흑룡강신문=하얼빈) 30년 전의 그의 첫 연태(煙台) 행은 일장 '무용담'처럼 들리고 있었다.

  "먼저 한국의 관련 부처에 신고를 해야 했는데요, 한국 3급 공무원 3명의 보증을 받아야 중국 출입허가가 떨어졌습니다."

  3급 공무원이라면 중국에서는 시장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1988년 그때는 중국 출국 수속절차가 그처럼 '별 따기'로 힘들고 번잡했다. 중국과 한국은 아직 국교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던것이다.

  박세동은 그가 산동성(山東省) 연태에 발을 들여놓은 첫 한국인이라고 자랑한다. 실제로 그는 공식적으로 연태의 최초를 기록한 인물로 되고 있다. 그는 연태시 제1호 영예시민의 칭호를 받은 한국인이다.

  그때까지 연태는 어촌처럼 시골의 작은 도시였다. 저녁이면 불빛이 적었고 네온사인이 없었다. 한국과 해상으로 약100 해리 떨어져 있었지만 대륙 남쪽의 홍콩을 경유하여 상해를 지나 비행기와 기차로 수천 ㎞를 우회해야 했다. 가깝고도 먼 이 연태는 박세동에게 그 이름처럼 모두 낯선 이역의 고장으로 되고 있었다.

  사실상 연태라는 이 지명은 일찍 명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홍무(洪武) 31년(1398) 왜구의 침노를 막기 위해 바다가의 북산에 '봉화대'를 만들었다. 봉화대에는 늘 왜구의 침입을 알리기 위한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연태'라는 이름은 그때 그렇게 생겼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바닷길은 실은 해적이 아니라 동서방의 무역상이 오가던 '해상 실크로드'였다. 수․당(隋․唐) 시기,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교역망(交易罔)이 형성되du 신라인들은 천년 전의 동아시아의 국제교역활동에 적극 참여했던것이다. 그때 반도에서 많은 신라인들이 바다를 건너 중국의 산동과 강소(江蘇), 복건(福建)의 연해 일대에 족적을 남겼으며 또 그곳에 그들의 교민 집거지(集居地)를 만들었다. 이렇게 농촌에서 형성된 집거지를 '신라촌(新羅村)'이라고 하고 도시에 형성된 집거지를 '신라방(新羅坊)'이라고 한다.

  미구에 박세동은 유아용품 브랜드인 '아가방'의 회사 법인대표로 연태시에 정착했다. 연태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으로는 그가 단연 선두의 위치에 서고 있었다.

  "(저희가) 사업하는 환경으로는 연태가 참으로 좋은 위치입니다. 인력보충 여건도 충분했고 인건비도 다른 지역에 비해서 충분한 가격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중국과 한국 량국 국교가 정상화되고 해상 통로에 이어 공중통로가 하나둘씩 열렸다. 이 과정에 박세동은 연태시 정부와 한국 교통 관련부처를 련결해주고 협상을 주선하는 오작교 역할에 나섰다고 한다. 오늘날 연태에서 한국으로 왕복하는 선박은 매주 연 13회에 달하며 항공편은 매주 연 124회에 달한다.

  한국 기업은 1990년부터 연태에 본격 진출하기 시작했다고 박세동이 회억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2008년 북경올림픽을 즈음하여 연태에 상주하는 한국인은 최고 6만명 정도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현대자동차, LG, 포항 등 한국 세계 500강 그룹은 물론 중소기업 투자자들도 연태투자에 나섰다. 한국은 연태의 제1대 무역 파트너이자 제1대 외자 내원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와중에 1997년의 '금융풍파', 2008년을 즈음한 산업 재편성 등으로 연태의 한국기업이 일부 줄어들었으며 이에 따라 한국인들도 점진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연태의) 한국기업이 성숙기에 들어서지 않았을지 하고 생각합니다."

  박세동은 연태의 한국기업과 한국인의 현황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었다.

  오히려 일부 한국 대기업도 연태에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대량의 인력을 필요로 하는 기존의 업체들이 물러나는 대신 신진기업이 새로 들어서고 있다. 중한 양국의 내왕과 거래가 자주 필요한 경우 연태 등 산동 연해지역은 여전히 최적의 선택지로 된다는것이다.

  현재 연태에 상주하는 한국인들은 약 1만 5천 명 정도로 추산, 이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은 연태 시내의 일부 지역에 상대적으로 집중, 집거하고 있다. 그들은 래산구(萊山區) 황해도시화원(黃海城市花園)과 개발구의 벽해운천(碧海雲天) 등 아파트단지에 집거한다. 연태에 말 그대로 현대판 '신라방'을 웅기중기 형성하고 있는것.

  한때 연태의 한국인들이 급증하면서 가족들이 동반한 기업인, 주재원 2세의 교육문제가 난제로 대두했다. 2000년, 당시 연태한인상공회 회장으로 있던 박세동은 연태시 정부에 한국학교의 설립을 신청했다. 나중에 연태시 정부는 한국 교민들을 위해 도시 중심지역의 땅을 무료 임대하고 학교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중국 국내에 네 번째로 설립한 한국인학교인데요, 학교를 설립한 이 점을 저는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박세동은 제일 인상이 깊은 부분으로 연태의 한국인학교 설립을 거듭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십시일반으로 모금한 금액은 당시 연태 시중의 가격으로 15채의 집을 살수 있는 가격의 인민페 240만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연태 한국인학교는 한국에서 70여명의 교원을 모집하고 한국 교육시스템을 옮겨와 초, 중, 고등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연태의 한국인들은 연태시 정부의 지원에 대한 고마움을 다른 학교에 장학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전하고 있다.

  박세동은 자칫 현지인으로 착각하리만치 연태에 친숙했고 연태를 사랑하고 있었다.

  "여기(연태)는 공기도 좋고 인심이 좋습니다. 저는 주변의 분들에게 사업하려면 연태로 오라고 권합니다."

  2012년 5월, 중한 FTA협상이 시작되면서 연태시는 중한(연태)산업원을 건설할데 관한 구상을 제기했다. 이 구상은 국가와 성(省)급의 성원과 지지에 힘입어 한국과의 협력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었다. 2016년까지 신규 한국투자프로젝트가 87개, 계약을 체결한 금액이 인민페 31억 3천만 원에 달했다.

  연태시 산업구조의 재편은 일찍부터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고 박세동이 말한다. 2008년을 계기로 중국에서 인건비가 점진적으로 상승되였고, 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대량의 인력을 필요로 하는 업체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단순 로동을 필요로 하던 의류, 1차 전자제품 등 산업이 동남아 등 지역으로 대거 이동했다.

  "우리 여기(연태)에서 경쟁력이 있는 사업을 해야 합니다. 한국의 의료나 미용, 건강 같은 산업이 진출할 수 있도록 추진할 생각입니다."

  얼마 전 박세동은 중국과 한국 량국 협력기업을 련결해주고 스타트기업을 지원해주는 플랫폼 '연태한국기업지원센터'를 설립하였다.

  최근 한국과의 협력에서 생물제약, 새로운 에너지, 스마트제조를 대표로 하는 전략적 신흥산업과 건강서비스, 문화창의를 대표로 하는 현대서비스업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박세동은 그의 지원센터가 연태에 진출하려는 한국기업을 지원하여 가장 적합한 중국 현지기업을 련결해주게 된다고 밝혔다.

  "우리 센터는 또 량측의 신뢰를 담보하고 협력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화해를 주선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박세동은 연태에 온지 어언 30년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중국통'이라고 불리고 있단다. '한국기업지원센터'는 종국적으로 박세동의 그런 경험과 경력을 바탕으로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을 전면 지원하며 양국 기업의 깊은 교류와 합작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지난 7월에 오픈된 센터는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져 1층은 의료, 보건, 미용분야의 특정화된 사업공간으로, 2층은 한국의 스타트 기업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게 된다.

  "한국의 작은 스타트 기업에는 이런 공간이 꼭 필요해요. 이런 공간에서 서로 정보도 주고… (그렇게) 나가는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관련 부분을 조언해 주고 교육해 주는것도 상당한 보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한국기업지원센터'는 아직은 대부분 비어있었지만 인제 9월부터 곧 입주하게 된다. 일부 교육프로그램은 이미 시작된 상태이다. 기념촬영을 하면서 사진에 담은 건물 외곽은 특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건물 상단에는 '연태한국기업지원센터'라는 한자(漢字) 간판이 씌어 있었고 건물 양옆에는 외곽으로 뻗은 기둥이 힘차게 세워졌는데, 정면으로 돌출한 반월형의 건물은 마치 누군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환영, 품으로 마중하는듯 했다.

  옛날의 '신라방'은 한국기업의 새로운 모습으로 출현하고 있었고, 박세동도 그 현대판 '신라방'의 관리자인 '촌장' 자체로 거듭나고 있었다. '동방 해상 실크로도'의 기착지 연태에서 '신라방'의 이야기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되고 있는것이다.

  /중국국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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