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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삼색의 육정산의 '불광'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11.08일 09:16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육정산 산정의 금정대불, 아시아 최대의 청동 좌불이다.

  (흑룡강신문=하얼빈)길림성 연변에서 불상 하면 거개 눈앞에 떠올리는 건 바로 이 산의 이름이다. 사실상 산의 이름인 육정산(六鼎山)을 떠올려도 대뜸 이 불상을 머리에 상기시키게 된다.

  "그럼 불상의 산이네요, 불상이자 산이고 산이자 불상으로 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육정산은 또 불상을 이어 지역 이름의 돈화(敦化)를 의미하는 자연의 '조형물'로 되고 있다. 기복을 이루는 이 여섯 개의 산봉우리는 돈화 시내의 동남쪽을 버티고 서있으며 해동의 나라 발해국(渤海國) 왕실의 귀족무덤을 품에 안고 있다.

  698년, 대조영(大祚榮)은 돈화에 홀한성(忽汗城)을 세우고 '진국(震國)'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713년,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대조영을 발해(渤海) 군왕으로 책봉하며 이때부터 발해국이라고 부른다. 홀한성은 명·청(明․淸) 시기 또 오동(敖東)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청(淸)나라 말년 돈화로 개칭한다. 지명 돈화는 사서(四書) '중용(中庸)'의 "소덕천류, 대덕돈화(小德川流,大德敦化)" 즉 "작은 덕은 냇물처럼 흐르고 큰 덕은 감화를 두텁게 한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육정산의 사찰 역시 개칭한 이름이다. 옛 사찰은 청나라 광서(光緖,1875~1908) 연간 돈화에 나타났다. 그때는 낭낭묘(娘娘廟)라고 불렸다고 한다. 낭낭묘는 중국의 민간에서 제일 흥성한 사찰인데, 대부분 여성들이 찾아와서 자식 점지 등을 빌었다. 1930년대 말 불교 사찰의 정각사(正覺寺)로 되었다. 1970년대 초, 불성(佛性) 법사가 미국 뉴욕에 정각사 하원(下院)을 설립, 1990년대 정각을 중흥하면서 육정산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금정대불(金頂大佛)은 바로 새로 세운 정각사의 뒷산 꼭대기에 위치, 목단강(牡丹江)을 뒤로 하고 멀리 장백산을 바라보고 있다.

  산 어귀의 매표 검문대를 지나다 말고 일행 중 누군가가 농을 했다. "우리가 여자 아니라고 입장권을 사야 하는가 보네."

  정각사 아니, 육정산은 세계의 제일 큰 비구니의 수련 도장이다. 그렇다고 여신도만 육정산을 찾으라는 건 아니다. 그러나 육정산에 들어가려면 향불을 피우든 말든 먼저 입장권을 사야 했다. 육정산 자체가 이름난 풍경구이다. 사찰이 풍경구의 일경으로 등장하는 것은 중국 많은 지역의 특색이다.

  금정대불은 아시아의 최대의 청동 좌불(座佛)로 알려지고 있다. 일찍 대불의 남쪽 산에서 발견된 발해국의 왕실 귀족무덤은 이 금정대불의 그림자에 많이 가려 있는 듯 했다. 일행을 태운 풍경구의 관광버스는 귀족무덤으로 통한 길을 스쳐 지나고 있었다.

발해국의 왕실 귀족무덤떼가 육정산에 있다

  정말이지 이 무덤은 낭낭묘나 정각사와 그 무슨 인연을 맺고 있는 듯하다. 고분의 이름난 주인도 실은 여자이다. 정혜(貞惠)공주의 묘는 무덤떼의 주무덤으로 제일 유명하다. 그는 발해국 제3대왕 대흠무(大欽茂)의 차녀로 발해국 보력(寶歷) 4년(777)에 숨졌다. 정혜공주의 무덤은 1949년 8월, 돈화현 계동(啓동)중학교가 근공검학(勤工儉學)의 명의로 파괴적인 발굴을 하면서 발견되었다고 '돈화현문물지(敦化縣文物志)'가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그 다음 달인 1949년 9월, 연변대학 역사학부가 육정산의 옛 무덤 발굴과 정리에 개입되었다.

  그때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방학봉(方學鳳, 1930년 출생)은 그들 일행이 산기슭의 승리툰(勝利屯)에 유숙했다고 회억하고 있었다. "마을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조선(족) 음식을 챙겨줬지요. 마을에는 조선(족)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30년전의 38국제여성의 날 한 자리에 모인 마을의 여성들.

  방학봉은 연변대학 역사학부의 제1기생이었다. 그는 훗날 연변대학 역사학부 학부장, 연변대학

발해사연구소 소장 등 직무를 역임했다. 1949년 9월의 그 발굴 작업은 방학봉의 인생에 하나의 전환점으로 되고 있었다.

  "발해사는 아직도 많은 문제들이 해명되지 않고 있지요. 결국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미개척지로 되고 있습니다."

  고분은 일찍 현지인들에게 발견되었으며 만주국(滿洲國, 1932~1945) 시기에 벌써 도굴되었다. 만주국은 일본이 동북 땅을 점령한 후 부식(扶植)한 괴뢰 국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정산 기슭의 승리툰도 기실 일본개척단이 세운 마을이라고 '돈화현지명지(敦化縣地名志)'전한다.

  "일본개척단이 이곳에서 땅을 가꿨다. 그 성원은 오키나와 섬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오키나와툰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1936년 5월 이른바 '만주 농업이민의 100만 가구 이주계획'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대량의 일본 농민들이 연이어 중국의 동북 지역에 밀려들어 '일본개척단'으로 되었다. 일본이 동북 지역을 강점하는 기간 개척단은 도합 860여개의 33만 명에 이르렀다는 불완전한 통계가 있다.

  오키나와 섬의 사람들이 살던 일부 가옥은 현지에 오랫동안 남았다. 옛 가옥의 땅에는 일본인들이 포탄 등 군수물자를 숨겼다는 등 이야기는 기담처럼 마을에 전했다. 승리툰의 지명 자체에 바로 오키나와 섬의 사람들의 흔적이 찍혀있는 것이다. 승리툰은 8.15 광복 후인 1946년 항일전쟁이 승리했다는 의미를 담아 오키나와툰을 개명한 마을 이름이다. 승리툰이라는 이 지명은 또 돈화의 기타 마을에서도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서 동명의 이름을 피해 1981년에 남쪽의 산 이름을 따서 육정산툰이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오키나와 섬의 사람들이 육정산 기슭에 이불 짐을 내려놓을 무렵인 1930년대 중반 육정산 기슭에는 벌써 촌락이 여럿이나 생기고 있었다. 1934년, 육정산의 북쪽에 안거낙업(安居樂業)이라는 의미의 안락툰(安樂屯)이 일어났고 1935년, 육정산의 남쪽에 길하고 상서롭다다는 의미의 길상툰(吉祥屯)이 세워졌다. 이보다는 달리 육정산 서쪽의 강연툰(江沿屯)에는 민국(民國, 1912~1949) 초년부터 인적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인들은 중화민국이 설립되던 1912년부터 돈화 지역에 이주하고 있었다. 1912년, 함경북도의 김씨 등 여러 가구가 돈화의 사하(沙河) 기슭에 정착하였다. '돈화시지(敦化市志)'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돈화에 이주한 제1세대의 조선인이었다. 1919년, 돈화 경내에는 조선인 49가구, 268명이나 되었다. 와중에 7가구가 입적(入籍)했고 42가구는 입적하지 않았다고 '돈화시지(敦化市志)'가 전한다. 1928년 , 길림(吉林)-돈화, 길림-회령(會寧, 조선) 철로가 통차한 후 조선 서북부와 남부의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돈화에 유입되었다.

  오키나와툰에 동네가 일어서던 1934년, 돈화현의 인구는 67,084명이었으며 이 가운데서 조선인은 3,432명에 달하고 있었다. 1949년, 공화국 창건 후 이주민이 해마다 늘어나고 또 인구 자연성장이 늘어나면서 돈화의 인구도 계속 늘어났다. 1953년, 제1차 인구 전면조사 때 조선족 인구는 약 1만 9천 명으로 되었고 1982년 제3차 인구 전면조사 때 조선족 인구는 약 2만 3천 명으로 되었다.

  조정숙(趙貞淑, 1949년 출생)이 육정산촌 아니, 승리툰으로 이사하던 1952년 마을에는 조선족만 해도 몇 십 가구 살고 있었다. 1983년, 육정산촌의 주민은 104가구의 507명이었으며 이 가운데서 조선족은 220명이나 되었다.

  그때도 육정산을 찾는 방문단은 산기슭의 육정산촌에 자주 들렸다고 한다. 물론 그때는 낭낭묘가 아니라 왕실의 귀족무덤을 목적지로 삼고 있었다.

  외지의 간부나 공사(公社, 향)의 간부들도 늘 마을의 대대식당에 들렸다고 조정숙이 말한다. "우리 마을은 조선족 마을이라고 해서 육정산을 찾은 손님들은 다들 조선음식을 맛보려고 했지요."

육정산촌의 이름난 무용대는 앙걸춤의 한족무용대이다.

  조정숙은 대대(大隊, 촌)의 부녀주임이었기 때문에 이때 대대의 식당을 관장하였다. 물맛이 좋다고 하면서 손님들은 일부러 병의 음료를 버리고 마을의 샘물을 넣어갔다고 한다. 뒷이야기이지만, 현지의 많은 관광 사이트는 지금도 육정산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김치와 찰떡 등 조선음식을 추천하고 있었다.

  정작 육정산이 풍경구로 거듭난 후 마을에 조선음식을 운영하는 조선족은 없었다. 그렇다고 육정산풍경구에 파리가 날리는 있은 게 아니다. 축제 등 풍경구의 행사 때면 산 밖의 육정산촌 부근까지 아예 주차장이 되어버린다고 한다.

  "육정산의 관광구에서 직원으로 있는 우리 마을의 조선족은 하나도 없는데요."

  조정숙의 말을 따른다면 육정산촌 마을에서 팔과 다리가 성한 사람은 도시로 가거나 한국으로 나갔다.

  사실상 조선족은 기존의 농경민족에서 탈피한 '도시민족'이라는 설법은 실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족사회의 도시화 비율은 현재 69%로 중국의 평균 비율 51%를 초월했으며 중국에서 도시화 비율 1위의 민족으로 부상했다는 평이다. 개혁과 개방 직후인 1982년, 돈화 현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벌써 조선족 인구의 39.3%를 차지하는 9,316명에 달했다고 '돈화시지(敦化市志)'가 통계자료를 밝히고 있다. 1985년까지 돈화에서 이미 100여 가구의 조선족 농부가 공업과 상업, 운수 봉사업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돈화의 조선족도 기타 지역의 조선족처럼 시초에는 대부분 벼농사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도시화의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종국적으로 육정산촌의 조선족은 명실상부하게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남아 있는 '노인협회'의 회원뿐이었다. 젊은 기성세대라면 새집 장식을 하느라고 잠깐 마을에 돌아온 사람이라고 한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육정산촌에는 옛 농가를 철거하고 새 아파트를 일떠세우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조선족 촌민은 앞장에 서서 마을에서 제일 먼저 새 아파트에 입주하고 또 제일 많이 입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시 붐과 한국 붐은 노인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자식들을 따라 저마다 큰 도시로, 한국으로 자리를 뜨면서 마을에 남는 조선족 노인들마저 줄어들고 있었다. 촌 위생소(衛生所, 보건소)에서 관리하는 마을의 노인은 150명 정도 되지만 거의 다 한족이라고 한다. 마을의 이름난 공연대도 여느 조선족마을의 조선족 춤이 아니라 한족 춤의 양걸(秧歌)대였다. 기실 육정산촌은 오래전에 한족마을인 부근의 안락툰과 강연툰을 합병하면서 그때부터 조선족마을이 아닌 한족마을로 서서히 탈바꿈을 하고 있었다. 위생소 소장(주임)은 물론 촌장도 조선족이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관리하는 촌민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올해 봄의 '3.8' 국제 여성의 날을 기하여 육정산촌의 조선족 촌민은 노인들의 만남을 주선하고 음식상을 차렸다. 한 마을의 조선족들이니 함께 모이려고 50대까지 합석시켰지만 나중에 음식상은 단 세 개로 챙겨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조정숙은 오히려 음식상이 많았다면 더 이상하다고 말한다. "아이가 생겨야 사람이 늘겠지요? (마을에서) 장가를 가는 사람이라곤 만날 수 없는데요."

  육정산에는 관광객이 실북 나들듯 오가고 있었지만, 산기슭의 마을에는 도리어 사람이 떠나고 집이 비고 있었다. 말 그대로 육정산은 일체의 천지만물이 현현(顯現)하는 삼인삼색의 산이었다.

  미구에 마을을 떠나 기차역으로 향했다. 언덕의 홈에서 멀리 남쪽으로 보이는 금정불상은 뭔가 체념한 듯 뒷모습만 드러내고 있었다. 부처의 이마에서 비추는 그 빛의 불광(佛光)은 어디서나 다 만날 수 있는 게 아닌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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