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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선택 "나 자신이 되고 싶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7.11.15일 09:57
한 조선족 녀박사생의 이야기

  이 글은 현재 한국 고려대학교에서 비교문학과 비교문화 박사과정을 공부하고있는 한 조선족녀성(필명:小葵-작은 해바라기)이 자신의 위챗계정에 중문으로 올린 글이다. 우리는 그녀의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의 한단락 경력을 빌어 우리들 인생의 깨우침을 공유하고저 이 글을 편역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흑룡강신문=하얼빈)“인생길은 비록 매우 길지만 가장 관건적인 걸음은 몇발자욱에 불과하다.”이는 로요의 소설《인생》프롤로그에서 유명한 작가 류청의 말을 인용한것이다. 어떤 때 이 관건적인 몇 발자욱이 사람의 옹근 인생궤적을 바꾸어 놓을수도 있다.

  나의 경력은 2013년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나의 집과 남편의 부모님 댁은 모두 장춘에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광주에서 사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광주의 한 사업단위인 학교에서 행정사업을 했는데 주요하게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였다.

  단위의 복리대우는 괜찮았는데 산후휴가와 수유휴가를 1년 주었다. 2013년 2월, 나는 장춘에 돌아와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남편은 겨우 10여일간의 말미를 맡을 수 밖에 없었고 인차 광주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근 반년간 모유수유를 했는데 매일 밤낮이 따로없이 3시간에 한번씩 일어나야 하다보니 잠이 엄중히 부족했다. 애를 키워온 엄마들이라면 모두 그 피로감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남편과의 별거생활이였다. 사업이 바빴던 남편과 소통도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7월쯤 되여 가까운 친구가 결혼하게 되였는데 신혼려행으로 한국에 가고싶어 하면서 나하고 함께 가길 원했다.(나는 조선족이지만 소학교때 조선족학교를 다녀서 간단한 한국말 밖에 하지 못했다.)그런데 나중에 그들 부부가 비자문제로 한국에 갈수 없게 되였다. 그들은 한국행을 취소했지만 나는 취소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어데론가 떠나고 싶은 갈망을 크게 느꼈기 때문에 혼자몸이지만 한국으로 무작정 떠나갔다.

  한국에서 나는 고려대학교와 리화녀자대학교를 참관했다. 그런데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나는 2013년 가을철 언어반 학생모집 프랑카드를 보게 되였다. 그것이 바로 나의 인생에 변화가 일게 했다. 나는 3개월간의 언어반에 참가하기로 마음먹고 신청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다. 애가 너무 어리다고 했고 언어를 배워서는 무슨 쓸데가 있냐고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애도 이젠 젖을 뗐고 나도 내 인생의 출로를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한테는 남편이 동의했는데 왜 동의하지 않느냐고 설복했고 남편한테는 아버지도 동의했다고 설복했다. 하여튼 나는 기어이 류학길에 오르고야 말았다.

  대학을 졸업한지 5년이 되여 나는 다시 교정에 들어서게 되였다. 언어공부를 하는 석달동안의 시간은 행복하고 충실했다. 이 기간 나는 고려대학교 비교문학연구생 공부를 신청했다. 기실 나는 그 무슨 결과를 바랐던것도 아니였다. 다만 한국에서 연구생공부를 하고싶었던 것은 내 대학시절의 꿈이였는데 대학을 졸업한 후 련애를 하면서 미루어졌던것이였다.

  12월에 언어반 과정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온후 나는 석사연구생 입학통지서를 받게 되였다. 집사람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나는 도리여 매우 괴로웠다. 어린 딸애와 떨어져 2년간이나 공부해야 한다는게 매우 잔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나는 사업단위의 일터도 사직해 버렸고 갓 돐이 지난 딸애를 떠나 2014년 3월부터 연구생 생활을 시작했다. 정식 류학생 생활을 시작한 후 나의 인생궤적은 확연히 달라졌다.

  여기서 나는 독자들과 미국시인 로버트 플러스트의 시 “선택하지 않은 길”을 되새겨보고 싶다.

  “황혼의 수림속에 두갈래 길이 나뉘여져 있네, 그러나 나는 한꺼번에 갈수는 없네, 나는 길목에서 오래도록 서서 가지 못할 길을 바라보았네, 그 길이 수림속 깊숙히 사라질 때까지…그러나 나는 다른 한길을 선택했네, 잡초가 무성하고 스산한 길이 오히려 더욱 사람을 유혹하고 아름답네…”

  본래 나의 인생궤적은 응당 수유휴가를 마치고 난 뒤 광주에 돌아가 계속해서 원래의 사업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 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뒤에 남겨둔채 몸을 돌려 다시 다른 한 낯선 길로 걸어갔던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에는 이 같은 전환점들이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생소한 길을 선택하였으며 이 때문에 허다한 고배들을 맛보게 되였다.

  계속해서 나는 여러분들과 곤난을 극복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들의 일생은 모두 이런저런 곤난에 봉착하게 된다. 철학가들은 심지어 “인생은 바로 사람을 나약해지게 하고 질식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대항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철학가들은 또 “너를 쓰러뜨릴수 없는 것들은 너를 더욱 강대해지게 해준다.”고도 말했다.

  석사공부과정의 어려움은 나의 생각을 뛰여 넘었다. 한국어가 익숙하지 못한데다가 영문원작을 읽어야 했고 리론성 내용들은 완전히 리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의기소침해졌고 도무지 공부를 계속해 나갈수 없었다. 왜냐 하면 나는 대체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울면서 아버지와 남편에서 전화를 걸어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애초에 고집스레 오겠다고 해놓고 나중에는 이토록 쉽게 포기하고야 만것이다. 남편은 이렇게 중도이페하면 내가 자신심에 타격을 입을가 걱정했다. 그때 느껴보았던 절망은 그전에 내가 느꼈던 산후 우울증보다더 더 지독했으며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던 시기였다.

  생각던 끝에 어머니가 한살 밖에 안 되는 딸애를 안고 한국에 와서 동무해 주었다. 딸애는 한국에서 걷기와 말을 배웠다. 매일 딸애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나는 용기를 내여 공부하러 가군 했다. 그러나 마음속은 항상 무거웠다. 어머니와 딸애는 한달가량 있다가 돌아갔고 나는 그렇게 억지다짐으로 한 학기를 겨우 마무리한 후 방학이 되자 집으로 돌아갔다.

  성적을 조회하기전에 나는 매우 불안했다. d학점이 아니면 f학점 불합격점수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 외로 한과목이 b+학점인 외에 나머지는 모두 a 혹은 a+학점이였다. 괜찮게 나온 점수에서 나는 신심을 다시 가질수 있게 되였고 두번째학기의 공부과정을 계속할수 있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계속해서 공부할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였다. 다시금 삶을 얻은듯한 재생의 느낌이였다. 그날 일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나는 기쁨 가득히 문을 열어 보았다. 신선한 느낌이 들었지만 많이는 낯설어 보였다. 걷고 걷다보니 길은 점점 낮아지고 그 다음에는 천길나락이였고 그 아래는 어둡고 끝간 데를 모를 큰 바다였다. 나는 두렵기 그지 없었고 붕괴의 변두리에까지 갔다. 되돌아 갈 길은 이미 막혀버렸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갈수 없다고 생각되였다.

  나는 혼자 오래동안 쭈크리고 앉아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면 뛰여 내려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많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안돼 떨어지면 죽어, 돌아가, 포기해…’나는 밤장막속에서 매번 눈물을 머금은채 잠들군 했다. 기실 다른 사람들의 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것은 자기 내면의 소리를 따르는것이다. 가끔씩 마음이 열릴 때면 나는 여기서 포기하면 매우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뛰여 내려보자, 나는 헤염칠수 있잖은가, 행여 헤염쳐 건널 수도 있을 것이다.

  몸부림의 과정은 길었고 또 한사람의 의지를 소진시키기에 족했다. 지금도 나는 내가 견지해왔던 동력이 과연 무엇이였는지 확정할 수 없다. 며칠후 나는 끝내 강변에 섰고 심호흡했다. 마치 두려움 모르는 금붕어 공주같기도 했고 곧 전쟁터로 달려나갈 준비를 하는 전사같기도 했다.

  나는 혼자뿐이였다. 고독은 사람을 질식시킨다. 나는 누군가 나의 손을 잡고 함께 춤추어줄 것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내 주변이 얼마나 소란스러워도 나의 세계는 쥐죽은듯 적막했다. 그러나 령혼은 어느 한순간 불현듯 승화될 수 있었다. 나는 뛰여 내렸다. 극렬한 아픔이 엄습해왔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죽기내기로 헤염쳤다. 몇번인가 나는 질식할번한 느낌을 받았다. 내 인생은 이렇게 바다속에 가라 앉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본능은 비교적 강한 것이였다. 꼭 본때를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신념은 거대한 힘이 되여 나를 부단히 극한 상황을 극복하면서 앞으로 헤염쳐 나갈수 있도록 채찍질해주었다. 얼마나 헤염쳤는지, 나는 마침내 뭍에 올라설 수 있게 되였다.

  눈을 떠보니 갑절되는 기쁨이 찾아왔고 해바라기꽃이 가득 피여난 화사한 길이 펼쳐졌다. 걸음걸음마다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어떤 말로 이 같은 아름다움을 형용할지 모르겠다. 가끔씩 비도 내린다. 그러나 마음속은 명랑하다. 아름다운 칠색무지개를 볼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모든 시련과 곤난은 오늘에 와서 마침내 내 인생의 보귀한 경험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겸허히 두손 모아 운명에 감사드리며 나에게 감사를 드린다. 포기하지 않은 것은 얼마나 정확한 선택이였는가?! 내가 삶의 노력을 한 의의는 여기에 있지 않은가? 나는 꿈속의 세계를 친히 체험하려 생각했으며 새벽아침의 이슬을 만났고 그에게 내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이상은 내가 2015년 10월에 적었던 한편의 일기이다. 공부가 점입가경으로 점차 적응되면서 나도 천천히 연구생공부 생활에 적응되기 시작했으며 친구들도 사귀였다. 딸애가 보고싶을 때는 독서로 극복하였으며 하루빨리 학업을 마무리짓고 친인들곁에 돌아가고 싶었다.

  선배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공부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노력이 있기만 하면 반드시 보람이 있다. 사업터와는 달리 기타 면의 여러가지 압력은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공부하려는 신념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운명은 도리여 나와 엇박자를 치면서 나에게 또 다른 타격을 주었다. 이번은 심지어 목숨과도 관계되는 타격이였다.

  2014년 년말의 어느 하루였는데 극심한 심장통이 느껴져 병원을 찾았다. 그 무렵 나는 근 한달간이나 매일 아침이면 심장이 아파서 잠에서 깨여나군 했다. 그날은 동통이 더 심해지면서 공포감까지 생겨났는데 심장이 밖으로 튀여나와 폭발할듯이 고통스런 느낌이였다. 병원에 이르러 긴급입원수속을 했고 진단결과 선천성 심방간격 결손이였다. 왼쪽 심방이 이미 확장되여 페를 압박하고 있었으며 수시로 위험했다. 가족들이 오기전 나는 병원을 떠날 수 없었으며 인차 수술치료를 받아야 했다. 어머니와 남편이 이튿날 달려왔다. 수술전 하루 나는 나의 은행카드번호를 남편에게 적어주었다. 딸애를 잘 볼보지 못한 일이 후회스러웠다. 어머니는 나에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필경 심장수술이 아닌가? 0.01의 실수라도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술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수술후에는 지혈이 되지 않았고 또다시 극심한 동통을 경험해야 했다. 도뇨관을 꽂았고 손과 팔에 주사를 맞아 퍼렇게 어혈이 졌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몸서리치게 아프다. 얼마나 아팠으면 제왕절개수술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집사람들의 살뜰한 보살핌으로 건강은 잘 회복되였다. 한학기를 휴식한 후 나는 2015년 제3번째 학기의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석사론문단계에서 나는 또다시 절망과 초조한 정서에 빠지고 말았다. 딸애를 그리면서 잠들수 없었고 남편과도 언쟁이 계속되면서 재차 엄중한 신경쇠약증세를 보였다.

  2015년 겨울방학에 나는 혼자서 대만과 타이에 한달반동안 머무르면서 많은 일들을 생각했다. 후회도 있고 유감도 있었지만 어쨌든 견지해야 했다. 2016년 3월에 나는 세살된 딸애를 한국에 데려왔고 한국의 유치원에 보냈다. 처음에 많은 사람들은 내가 혼자서 애를 데리고 공부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이미 2년이 되였지만 나와 딸애는 모두 잘 보내고 있다.

  2016년 여름 나는 끝내 석사학위를 받아 쥐고야 말았다. 원래는 석사학위만 받아쥐면 귀국할 생각이였지만 연구생공부를 시작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다싶이 석사는 입문에 불과하다. 진정한 공부는 박사과정부터 시작이다. 당연히 집에서는 재차 반대했다. 나는 남편에게 감사를 드린다. 나중에 남편은 그래도 나의 선택을 지지해주었고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다시 새롭게 소통을 시작했으며 남편의 사업도 광주로부터 북경으로 옮겨졌다. 지금 남편은 늘 나에게 “이후 우리 집은 당신에게 의지해야겠소, 당신이 박사를 졸업하고 북경호구를 따낸다면 우리도 지금껏 헛수고는 하지 않은 셈이지.”라고 말하군 한다.

  지금 나는 박사공부 3번째 학기중에 있으며 매일매일 아주 바쁘다. 나는 12시에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 5시면 일어난다. 한주일에 적어도 7~8권의 책을 읽거나 관련 연구자료들을 읽고 분석을 진행해야 한다. 이외에도 매일 딸애에게 밥해주고 놀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하루하루 매우 충실하며 미래에 대해서도 신심으로 충만되여있다. 특히 행동영(行动营)에 가입한 후부터는 생활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듯 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말은 “너는 바로 너 자신이며 다른 사람에게 운명을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딸애에게 매우 미안하다. 그러나 근 2년간 딸애는 나의 류학생활에 붙어있었으며 이는 그 애의 인생에서 아주 얻기 힘든 경력이 되리라 생각한다. 남편에게도 나는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좋은 어머니와 좋은 안해가 아니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 자신이 아니다. 그들은 내가 왜서 이러한 선택을 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런 대화가 있는데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너는 누구로 되려 하는가”, “나는 나 자신이 되려고 한다. 왜냐 하면 내가 다른 사람이 되려 했으나 나중에는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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