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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60인]《고아들의 아버지》 사랑이야기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09.12.23일 09:44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 기획보도(56)

화룡시희망복리원 리문철원장의 한가지 소망은-고아, 장애인, 가난한 학생...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줄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줬으면


리문철 프로필:

1954년 10월 화룡의 한 가난한 문화인 가정에서 출생.

1970년 10월-1974년 9월 화룡시 서성진 룡포촌 하향청년 단지부서기, 민병련장.

1974년 10월-1975년 10월 화룡시 부동산계통 로동자.

1975년 10월-1976년 12월 화룡시 토산향에 사회주의교육공작대로 내려감.

1976년 12월-1979년 11월 화룡종자공사 기술원, 검사원.

1979년 12월-1980년 12월 길림성 남파공작대로 해남도에서 육종시험에 종사 .

1980년 12월-2001년 6월 화룡종자공사 과장, 부경리, 소장.

2001년 6월 -현재 화룡시희망복리원 원장, 화룡시 정협 상무위원, 연변주정협위원.

2000년이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서 수여한 《꽃망울프로젝트 최우수 조학상》, 《차세대배려선진개인》, 《연변감동10대인물》, 《길림성로력모범》, 《2008중국적십자회원의 별》, 《길림성도덕모범제의상》, 《전국민족단결선진개인》, 《전국5호문명가정》, 《전국공익사업걸출인물》, 《전국5.1로력메달》 등 중앙급 7차례, 성급 8차례를 포함 도합 50여차례 영예 획득.

2009년 9월 20일 제2회전국도덕모범선발표창활동에서 전국도덕모범제의상 수상.

선후로 《길림신문》, 《연변일보》, 《중국민족화보》, 연변TV방송, 길림일보, 로동자일보, CCTV, 인민일보, 신화통신 등 많은 지방 및 중앙급 보도매체를 통해 사적이 전국에 널리 알려짐.

리문철은 1954년 12월 화룡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는 병환으로 일을 할수가 없었고 그와 그의 누나도 병약한 몸이였다. 어머니 혼자 힘으로 강변에서 모래를 쳐 온집식구를 먹여살려야 하는 형국이였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소학교를 다닐 때 문철이는 새옷을 입어본적이 없었고 원족 가본적도 딱 한번밖에 없었다. 원족을 가려면 맛있는것을 도시락에 싸가지고 가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안되였던것이다.

소학교를 다닐 때 있었던 일을 그는 항상 잊지 못한다. 그때 그가 쓰는 공책이란 검고 엷은것이였는데 연필 살 돈도 없어 늘 연필 끄트머리까지 나무가지에 동여매여 쓰다보니 조금만 힘을 주어 글을 써도 공책에 구멍이 펑펑 뚫리기 일쑤였다. 그때 그가 다니는 반에 젊은 녀자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는데 한번은 그가 쓰고있는 공책과 연필을 들여다보시더니 갑자기 《너 이것도 책이라고 가지고다니니? 너 아빠, 엄마는 이런걸 너에게 주어 학교에 보낸다니?》 하고 몹시 화를 내시는것이였다.

그날 귀가때 그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어느 길모퉁이에 숨어서 정말 오래동안 울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머리에 열이 나면서 며칠 앓아누웠다. 그런데 토요일날 저녁인가 담임선생님이 그의 집으로 찾아오셨다. 등에는 애기를 업고있었고 왼손에는 달걀구럭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공책, 연필 등 학용품이 들려있었다.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 한발 막대기를 휘저어도 거칠것 하나 없는 가난한 살림형편을 보시고난 선생님은 자식공부 하나 변변히 대주지 못하여 미안해하시는 어머니의 자책어린 말씀에 눈시울을 붉히시였다. 그후 선생님은 자주 문철의 집으로 찾아오셔서 그에게 보충수업을 해주곤 하셨다.

문철이는 선생님이 선물하신 학용품을 정말 소중하게 다루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둠속의 등불과도 같은것이였습니다. 그 일은 나의 머리 속에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 감동적인 영상으로 남아 나를 고무하고 채찍질합니다.》

30여년전인 1974년도에 있은 일이다. 갓 스무살난 리문철은 농촌에서 뽑혀와 화룡시방산관리소에서 로동자로 일하고있었다. 그때 단위에 종업원숙소가 없어 그는 한 개인집 방을 세내여 들었다. 그집 주인은 박씨였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감옥살이를 하고있었고 그의 안해는 병으로 앓는데다가 고정수입도 없이 아이 다섯이나 데리고있었다. 아이들중 큰 아이는 14살이였고 작은것은 6살밖에 되지 않았다. 수입이라야 그가 집세로 내는 8원이면 고작일 터이였다. 정말 살아갈 길이 막막한 집이였다. 그 집을 훌쩍 떠나 다른 집을 찾으려고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량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눌러앉기로 마음을 굳히고 우선 매달 39원되는 월급을 몽땅 이 집에 맡겨 살림을 유지하게 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봄에는 그집 애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 나물을 캤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았으며 가을에는 이삭주이를 하고 겨울에는 산에 가 땔나무를 해왔다. 낮에는 출근을 하고 밤에는 아이들의 숙제지도를 해주었다. 짬이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감옥에 가 아이들의 아버지를 면회하고 매번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는 사이에 개혁개방이 시작되여 세상이 살만해졌다. 박씨네 살림은 점차 호전되기 시작했고 아이들의 학습성적도 많이 올라갔다. 맏이는 학급의 단지부서기로 되였고 둘째는 학급장으로 되였으며 넷째는 전국소학생스케이트시합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다. 박씨도 열심히 개조를 해서 복역기간을 2년 줄이고 1987년에 앞당겨 출옥해 가족과 단란히 모이게 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여 의지가지없는 고아, 가정살림형편이 어려운 학생, 지체장애자 그리고 형기가 차 석방됐거나 로동교양에서 풀려나온 인원들을 도와주고 교양하고 안치하는 사업과 떨어질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였다고 리문철은 회고했다.

1982년이였다. 화룡시 투도진에 어려서 부모를 여읜 아이가 있었는데 형님집에서 초중까지 다녔다. 그러나 고중에 시험쳐 붙은 후에는 학비를 이어대지 못해 더는 공부를 할수가 없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리문철은 그 아이를 데려다 키우며 공부시키는게 어떨가 하고 안해 채명자와 상의를 했다. 1979년에 결혼한 리문철, 채명자 부부에게는 그때 아직 아이가 없었는데 누님이 병으로 사망한지 얼마 안되여 두 외조카를 데려다 키우고있었다. 10여평방메터밖에 안되는 비좁은 집에서 네 식솔이 붐비는 삶이 원래 기구한데 16살나는 고중학생 하나를 더 데려다 키운다는건 누가 봐도 머리를 저을 일이였다. 그러나 난색을 짓던 안해는 끝내 남편의 뜻을 따라주었다. 그러는 안해가 너무 고마웠다.

아이를 집에 데려와서 보름만인가 안해가 병으로 입원하게 되였다. 한 병실에 해금이란 녀자애가 있었는데 너무 울어서 눈이 다 부어있었다. 여러번 캐물어서야 그애는 자기가 고아라고 실토정했다. 안해가 퇴원하자 그애를 집에 데려왔다. 하여 집식구가 또 하나 늘었다. 아이 셋만 키우고 공부까지 시키려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는데 그후 아이를 하나 낳자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매달 39원의 로임으로 아이 둘을 공부시키고나면 남는것이 없었다. 그때 그들은 정말 굶기를 밥먹듯했다고 한다.

때마침 개인창업열이 한창 오를 때였다. 당시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학습을 마치고 화룡시종자공사에서 근무하고있던 리문철은 창업을 해서 돈을 벌기로 마음먹고 안해와 함께 회사에 출근하는 한편 과외시간을 타서 가축사양을 벌였다. 후에는 아예 단위에 적을 남겨둔채 로임도 받지 않고 나와 곰사육장을 꾸렸다. 그 수입은 기대했던바 이상으로 짭짤했다. 그 수입은 전부 고아들 부양과 학생들 보조에 씌여졌다.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그러니 집이 너무 비좁아 집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돈을 다 아이들 부양과 보조에 쓰다보니 1987년에 와서야 18평방메터짜리 초가집을 2000원에 팔고 교외에 땅을 얻어 66평방메터되는 벽돌집을 짓게 되였다. 이 집을 지을 때 림시 세방에 들 돈이 없어 길가에 비닐텐트를 쳐놓고 옹근 7개월을 그안에서 살았다. 천신만고 끝에 66평방메터짜리 아담한 집이 지어져 드디여 친척친구들에게 잠시 맡겼던 여섯명의 고아를 모두 불러들였다.

《여기가 바로 너희 집이다. 이제 너희들은 다시 떠돌뱅이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시름놓고 살면서 공부도 열심히 잘해야 한다. 다들 알았지?》

처음엔 아이들이 먹고 잘 곳을 마련하는데만 신경을 쓰다보니 아이들의 사상교양에 등한했다고 한다. 그러던중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는데 몇몇 애들이 밤중에 남몰래 어디로 사라져서 장밤 온 시내 PC방을 샅샅이 훑은적이 한두번이 아니고 집안에서 돈도적사건이 생겨 애들이 도적을 쫓아내야 한다고 소동을 벌이는 일까지 생겼다는것이다.

《그래서 먹고 자는 일과 학비대주는 일만 해주면 다 끝나는게 아니라는걸 알게 됐습니다. 그들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리상이 있는 인간으로 키우는것이 먹이고 재우는것보다 몇갑절 더 중요한 일이라는걸 통감하게 됐지요.》



화룡시희망복리원 한가족

그후부터 실제로 아이들에 대해 생활상 관심도 게을리 할수 없지만 사상교양에 몇갑절 더 신경을 쓰게 됐다는것이다.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이면 애들을 데리고 화룡시13용사기념비, 청산리항일유적지에 가서 혁명전통교양을 하였으며 또 연변과기대를 견학하여 아이들의 리상을 키워주었다. 자금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아이들에게 해마다 각종 신문, 간행물을 1000여원어치 주문해서 짬짬이 보게 하였고 다달이 독서모임을 한차례씩 열어 독서심득을 나누게 했다.

아이들에게 남을 관심하고 도울줄 아는 품성을 키워주기 위해 매년 청명절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렬사비앞에 가서 벌초를 하였으며 친인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제물을 사가지고 친인의 묘소를 찾아가 제를 지내게 하였다. 명절이나 휴가에는 아이들과 함께 홀로 계시는 로인들을 찾아가 마당청소도 해드리고 빨래도 해드리고 창문유리도 닦아드렸다.

사스로 세상이 바짝 긴장하던 때 《사랑의 헌금》활동도 가지고 성금 900원을 모아 기부했으며 복리원 근처의 한 집에 가스폭발사고가 났을 때 부상자치료를 돕기 위해 애들은 소비돈을 280여원 모아 의연했다. 사천지진때에도 리문철은 매일 중앙TV 뉴스를 집체로 시청, 아이들이 자각적으로 모은 돈에 자기 돈을 보태 애들의 요구대로 999원 99전(救救救)을 만들어 시적십자에 헌금하였고 그외 그자신도 따로 1000여원을 시농업국당위에 특수당비로 바쳤다. 이런 일들을 통해 아이들은 사랑의 마음을 키워갔다.

리문철이 고아를 데려다 키우고 가정이 빈한한 학생들을 부조한 사적이 《길림신문》에 크게 실리고 그뒤 연변TV에서도 찾아와 그의 사적을 취재해갔다. 얼마후 《고향의 아침》프로에 그의 사적이 2집 시리즈로 보도되였다. 화룡시교육국의 리직퇴직간부들이 그의 사적을 보고 감동된 나머지 쌀, 기름을 사들고 돈도 모아가지고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한구들 가득한 손자손녀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어선 안된다. 이 아버지는 너희들의 은인이다. 아버지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자라거라. 학습을 잘해서 장차 아버지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우리는 석양에 걸음이 빠른데 너희들은 앞날이 창창한 나라의 기둥감들이다. 건실하게 잘 자라서…

그날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할것없이 모두 울었다.

리문철의 사업을 지지해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해마다 설명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입쌀, 과일 등 식품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위문을 왔으며 물만두를 가득 빚어가지고 오기도 했다. 전화로 관심과 문안을 표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다. 그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관계부문의 일군들도 찾아와 함께 해결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2001년도 리문철은 낡은 공장건물을 구입개조한 뒤 관계 부처의 협력과 지지밑에 화룡시희망복리원을 설립했다. 공안부문에서는 희망복리원 아이들에게 집체호구를 등록해주었다. 하여 고아들에게는 명실공히 자기의 포근한 집이 있게 되였다.

그해 연길감옥에서 리문철을 교양보도원으로 특별위임하여 정기적으로 감옥에 가서 형기가 차 감옥을 나오는 석방인원들에게 출옥교육보고를 해달라고 했다.

어느 한번 연길감옥에 강연하러 갔을 때 리문철은 형기가 거의 끝나가지만 돌아갈 집이 없는 왕모의 사정을 알고 그가 석방되는 날 주동적으로 감옥까지 찾아가서 왕모를 데려다 희망복리원에 입적시켰다. 또한 그에게 인력거를 사주어 생계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절도범죄자인 주모는 만기석방된 후 그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는 두말없이 사법부문과 향정부에 찾아가 주모에게 농사에 필요한 생산대부금을 해결해주었다. 장춘에서 농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또 주모에게 려비를 대주면서 박람회에 참가하여 치부의 길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최근 그는 또 3명의 출옥인원과 원조커플이 되였다.

이처럼 다년래 시종 변함없이 이른바의 《불량자》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도와주고 교양하였으며 한사람 한사람 사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돌려세웠다. 《내가 도와준 청소년 치고 다시 죄를 짓고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이것을 다시 없는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리문철은 말한다.

어느 날 박문길이라는 청년이 희망복리원에 찾아왔는데 그는 자기는 최근 연길감옥에서 출옥한 자로 감옥에서 리문철의 강연을 들은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당신이 말한 그 일들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보나마나 당신은 허풍치는데 불과하지요. 오늘 세상에 당신이 말한바와 같은 그런 사람이 있을수 있습니까? 나는 그 많은 고아와 빈곤한 학생을 정말 수양하고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오늘 이 집을 찾아온겁니다.》

이어 그는 도전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마음이 그렇게 좋다면 나를 수양할수 있다고 지금 감히 장담할수 있습니까?》

리문철은 즉시 시원한 대답을 주었다. 《안될것 없소. 원한다면 지금 바로 우리 집에 짐을 풀어도 되오. 》 그는 말한대로 복리원에 머물었다.

어느 날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리원장님, 리원장님한테 두손 들었습니다. 당신이 실지 한 일은 당신이 말한것과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많더군요. 저의 목적은 당신이 말한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직접 내눈으로 보려는것이였는데 이 며칠간에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이 사회에 당신과 같은 사람이 몇분만 더 있어도 좋을텐데…》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보시다싶이 나는 몸이 튼튼한 사람입니다. 제가 여기서 고이 리원장이 끓여주는 밥만 먹고있을수는 없습니다. 제가 나가거든 그 자리에 가난한 아이 하나를 더 받아 기르세요. 나는 꼭 당신을 따라배워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가겠습니다. 후에 능력이 될 때면 꼭 와서 당신을 도울것입니다.》

리문철은 복리원의 아이들이나 사회의 약세군체에 대해서는 씀씀이가 대범할 때가 많았다. 매년 설이 되면 그들 부부는 위문품을 가득 사가지고 독신로인, 지체장애자와 곤난호들을 집집이 방문하여 위로했다. 수년래 선후로 여러명의 빈곤학생에게 컴퓨터와 CD기 그리고 기타 생활용품을 사주고 석방인원들에게 장사를 하라고 자금을 대주었으며 고독한 로인들과 장애인들에게 식품이나 생활용품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든 자금이 해마다 수만원이 되였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늘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돈 한푼 함부로 랑비하지 않았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그는 친구들이 가지는 모임에도 웬만하면 가지 않았고 가라오케 같은 고소비 장소에는 더구나 드나든적이 없었다. 20여년래 그들 네 식구는 종래로 단독으로 지낸적이 없으며 따로 명절을 쇤 적도 없다.

그의 집에는 자금을 절약하기 위하여 택시도 마음대로 타지 못한다는 제도가 있다. 그 자신도 이 제도를 준수한다. 북경, 장춘, 상해나 사천 등 먼 곳으로 가도 침대차에 앉지 않고 앉은채로 자면서 먼 거리를 줄이곤 했다.

그의 딸 춘이(23 살)는 어릴 때부터 줄곧 아버지가 수양하는 고아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부모님들을 도와 나이가 자기와 같거나 자기보다 더 큰 아이들을 돌보군 하였다. 그런 춘이가 작년에 한국류학을 가게 되였는데 떠날 때 아버지에게 한 유일한 요구인즉 젯빠(MP3)를 선물해달라는것이였다. 리문철은 호주머니사정으로 그 작은 요구마저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친자식한테 너무 혹독하지 않은가 하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런 뜻으로 말했다.

-내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것이 아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아끼지 않을 부모가 어데 있겠는가? 나의 딸이 이 아비한테 유감스럽게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나의 딸은 어려서부터 친부모의 품에서 자라면서 가정의 따사로움과 부모의 사랑을 유감없이 받아왔다는것이다.

-하지만 내가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 곁에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없다. 그 유감은 무엇으로든 미봉할수가 없다.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좀 더 쏟는것은 그 애들이 친부모가 있는 아이들과 꼭같이 행복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소망때문이다.

35년래 리문철이 수양하고 도와준 아이와 석방인원은 모두 130여명에 이른다. 그들중 50여명이 북경, 상해, 운남, 사천, 대련, 장춘 등지의 대학에 입학했다. 금년에 나온 대학생만도 7명이다. 일본에 연구생으로 간 학생을 포함하여 연구생도 3명이 나왔다. 그의 딸애도 현재 한국 조선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 연구생공부를 하고있고 아들애는 청도대학 경제학부에서 공부하고있다. 현재 희망복리원에는 29명의 청소년이 있다.

2009년 9월 20일 제2회전국도덕모범선발표창대회에서 조선족으로서는 유일하게 표창받은 리문철은 《근 10년간 중앙, 성, 자치주와 화룡시에서 50여차 표창받는 영광을 지녔는데 이런 명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기자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이런 일들을 하는가고. 실상 나 개인으로 놓고말하면 그 무엇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답을 바라는것도 아니요 명예나 명성이나 그 어떤 관직을 바라는것도 아니다. 내가 그런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결코 이 길을 걷지 않았을것이고 30여년씩 견지할수는 더욱 없었을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를 바보라고 말한다. 바보라도 좋다. 물론 내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큰 대가를 치른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나의 조그마한 희생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결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명예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나의 명예와 관련해서 내가 바라는것이 있다면 오로지 나의 영향으로 고아, 장애인, 가난한 학생, 감옥에서 나와 사회사람들의 기시를 받으며 죽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줄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줬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소박한 소망뿐이다.

편집/기자: [ 박문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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