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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산 누출, 목이 아프고 뼈가 저려왔다

[기타] | 발행시간: 2012.10.23일 12:13

ⓒ시사IN 송지혜 10월5일 정부 재난합동조사단의 설명을 듣고 있는 봉산리 주민들(위).

경북 구미시 봉산리 마을 너머에 있는 공장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9월27일 오후 3시43분, 그날따라 심했다. 지금자씨(44)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공장에서 120m 떨어진 우사에 있던 소 45마리도 이상했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연신 침을 흘렸다. 그때만 해도 지씨는 '불이 난 건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0m 떨어진 옆집 축사의 소 40마리도 같은 증세를 보였다. 마을이장이자 남편인 박명석씨(49)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박씨는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할 때 나는 가스냄새다"라고 말했다.

아이들과 노인부터 아프기 시작

5분 뒤. 이장 박씨가 유독가스가 폭발했다고 방송했다. 주민들은 대피했다. 지씨는 자식 같은 소 걱정이 앞섰다. 봉산리로 시집온 이래 20여 년 동안 소를 키웠다. 구제역이 퍼졌을 때도 지켜낸 소였다.

사고가 난 (주)휴브글로벌은 LCD액정 세척제를 제조한다. 탱크에 담겨 있던 20t 불산가스를 저장장치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다. 이날 밤, 공장에서 제독 작업에 참여한 박 아무개 소방관은 "피부가 따가웠다. 안전모 은박이 뿌옇게 일어났다. 다른 대원들은 안경알이 틀어지고, 반점이 올라왔다"라고 말했다. 공장 노동자 5명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휴브글로벌에서 반경 700m 안에 생활하는 봉산리 주민은 250명. 이 가운데 거동이 불편한 노인 30여 명은 대피하지 못했다. 창문만 닫았다. 그러면 불산가스가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날 오후 8시, 사태가 심각해지자 구미시는 사고 지점 1.3㎞ 이내 주민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불산이 마을을 덮친 지 5시간째, 노인을 부축하던 180㎝, 80㎏ 체격의 이장 박씨도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경북도 제공 10월3일 경북도소방본부 헬기가 봉산리와 임천리 일대를 항공 촬영한 사진(위). 농작물과 나무가 누렇게 변했다.

사고 다음 날인 9월28일 새벽, 구미시는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대기 중에 불산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추석 연휴 외부인의 출입도 허용했다. 주민들은 여느 명절과 다름없이 지짐을 굽고 차례를 지냈다.

봉산리에 사는 100여 가구 가운데 70여 가구가 농사를 짓는다. 벼농사를 짓고, 멜론ㆍ사과ㆍ배ㆍ대추 따위를 키워 판다. 마을의 70~ 80%를 차지하는 70대 이상 노인도 손이 덜 가는 포도농사를 짓는다. 기자가 찾은 10월5일. 불산가스가 덮친 농작물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주민들은 먹을거리와 마시는 물도 불안해했다. "가을바람에 가스 냄새가 섞여 있다"라고 말했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아이와 노인들이 가장 먼저 증상을 드러냈다. 주민 이선이씨(48)의 막내딸 하늘이(8)가 기침을 심하게 했다. 동네 아이 희정이(3)와 영현이(4)도 열이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더니 기침을 했다. 봉산리 어린이 여덟 명의 증세가 같았다. 노인들은 속이 메스껍다고 호소했다. 주로 눈이나 코ㆍ목 등 호흡기를 불편해했다.

10월4일. 이동검진 차량이 마을을 첫 방문했다. 그동안 병원에 가기 위해서 시간당 한 대씩 오는 버스를 1시간 동안 타야 했다. 하지만 사고가 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시작된 차량 진료는 오후 2∼4시까지. 그나마도 토ㆍ일요일은 쉰다고 했다. 이선이씨는 거세게 항의했다. "누구를 위한 병원인지 모르겠다. 노인과 아이들이 아파하는데도 의사들이 휴일을 따지고 있다." 이틀 후 진료는 하루 6시간으로 확대됐다. 그럼에도 김정준씨(51)는 세 차례나 발길을 돌렸다. 이미 접수된 사람이 수십 명이라 이들을 진료하고 나면 업무시간이 끝난다며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목 아픈 고통은 참을 수 있다. 그보다 불산이 뼈를 녹인다는 보도가 사실인지, 과장된 것인지 의사에게 묻고 싶다"라고 말했다.

적은 농도의 불산에 오랜 기간 노출됐을 때 인체에 얼마나 해를 미치는지 조사된 바가 없다. 실제로 마을에 퍼진 불산 농도가 어느 정도인지 측정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고가 발생한 다음 날, 구미시는 주민들을 귀가시켰고 인근 공장은 가동됐다(52쪽 '풀뿌리 수첩' 기사 참조). 기자가 현장에 머문 기간은 3일에 불과했지만 저녁만 되면 심장이 요동치고 목이 아팠다. 오른팔 뼈와 손가락 마디가 무슨 이유에서 아픈지 알 수 없었다.

10월5일 오후 3시, 봉산리에서 10분 거리인 임천리 마을회관에서 주민 설명회가 열렸다.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가 주최했다. '서울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내려왔다'는 소문이 나면서, 봉산리와 임천리 주민 150여 명이 모여들었다.

ⓒ시사IN 조남진 쑥대밭이 된 고추 하우스.

누구 말을 믿어야 하나, 진실은 뭔가

이날 설명회에서 김정수 시민환경연대 부소장은 "농축산물을 폐기해야 한다. 칼슘 농도가 옅어져 뼈에 손상이 온다. 각막이 손상돼 실명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주민 설명회가 끝나자, 사고 현장 일대를 둘러보던 정부 재난합동조사단 한상원 단장이 마을회관을 찾았다. 그는 "토양과 공기는 이상이 없다"라고 말했다. '토양과 공기가 괜찮은데 식물은 왜 갈수록 더 괴사하느냐'라는 주민의 성토가 이어졌다. 한 단장은 답하지 못하고 10분여 만에 자리를 떴다.

어느 쪽 말을 믿어야 할지 마을 주민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이순옥씨(82)는 기자에게 "그래서 안전하다는 기가, 아니라는 기가?"라고 되물었다. 이어 "내년부터 농사를 지어도 되느냐" "수돗물은 안전하냐" "마을을 떠나야 하느냐" 따위의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좋다'는 시민단체 관계자의 말에 따라 노인들은 생수만 연거푸 들이켰다. 이씨는 한국전쟁 이후 이런 재난은 처음이라며 누렇게 변한 고구마밭을 지나 집으로 돌아갔다.

삭막해진 마을에는 뜬소문만 무성히 자랐다. 주민들은 '비가 오면, 불산가스가 묻은 철탑이 녹아내린다' '더 독한 약이 있는 공장이 수두룩하다. 구미가 통째로 폭발할 수 있다' '공장 사장이 일본인이다. 봉산리ㆍ임천리 땅을 다 사버린다더라' 따위의 근거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봉산리 마을회관으로 향하자 주민 50여 명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수확할 수 없는 주민들은 일손을 놓았다. 농사로 자녀를 학교 보내고 빚을 갚던 농민들은 생계가 막막했다. 임종학씨(55)는 곧 제대할 아이의 학비가 걱정이다. 그는 곱게 포장해 놓은 사과상자를 보며 오래도록 멈춰서 있었다. "(사고가) 조금만 더 늦게 터졌어도…." 임씨의 과수원에는 그가 일군 사과가 바닥에 흉물스럽게 떨어져 있었다.

ⓒ시사IN 조남진 떨어진 감. 봉산리의 모든 식물이 고엽제를 맞은 것처럼 하얗게 말라 죽었다.

이날 저녁, 밥상에는 된장국과 쌀밥이 올라왔다. 부녀회에서 차려준 마을식사였다. 이미 된장국으로 며칠을 난 참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 주민들은 마을에서 자급자족했다. 파, 양파, 배추, 들깨, 고구마 따위를 살 일이 없었다. 채소 같은 건 모조리 사라졌다. '잘게 다져진' 감자만 된장국에 퍼졌다.

그 많던 채소가 모조리 사라져

기자가 마을에 머문 사흘 동안 정계 인사들이 연이어 다녀갔다. 유영숙 환경부 장관을 비롯해 김태환 국회의원, 남유진 구미시장이 주민을 만나 악수하고 사진을 찍었다. 속 시원한 대책은 내놓지 못했다. 한 80대 주민은 "장관이 오면 무슨 말이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정부 말대로 정말 위험하지 않다면 왜 작물을 수확하면 안 되느냐"라며 속을 태웠다.

현재 상황을 정확히 설명해줄 사람을 데려오라고 외치던 이옥희씨(76)는 "대선을 앞두고 동네 주민이 들러리가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피해 주민 곁에 두어야 할 종합상황실을 시내에 설치한 것만 보더라도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마을회관에는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라면 상자만 쌓여갔다.

정부 재난합동조사단이 현장을 찾은 첫날인 10월5일. 박명석 봉산리 이장은 정부 관계자를 만난 뒤 "주민들에게 할 말이 없네…"라고 탄식했다. 정부가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튿날 마을회관에서 열린 주민대책회의에서는 주민 스스로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토록 처참해진 마을을 가스유출 사고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이주가 한창이던 10월6일 오후 4시, 봉산리 토박이 김점득씨(72)는 마을에 하나뿐인 슈퍼에서 이웃과 막걸리를 비우고 있었다. 기자가 "짐 안 싸시느냐"라고 묻자 그는 대뜸 "내가 이곳에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겠느냐"라고 되물었다. 반쯤 취한 그는 "농사꾼이 농사를 안 지으면 뭘 해야 하나…. 당장 거처가 마련되더라도 고향과 내 땅을 잃으면 어떻게 사나"라고 말했다.

10월11일 현재, 봉산리 주민 200여 명이 백현리 구미환경자원화시설로 이주했다. 임천리 주민 230여 명도 해평면 청소년수련원으로 옮겨 생활하고 있다. 마을에는 주인을 잃은 개와 침 흘리는 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미·송지혜 기자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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