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 전화하셨었네요?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시죠?"
서울에 사는 직장인 윤명현(25, 가명)는 한 달 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 누군가 발신자 번호 표시를 조작해 자신들의 번호 대신 윤 씨의 번호가 표시되도록 한 탓이다. 미처 이 전화를 받지 못해 '부재 중 전화'로 표시된 경우 많은 이들이 다시 확인 전화를 걸면서 윤 씨에게 전화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윤 씨는 이 상황을 견디다 못해 가입한 이동통신사 고객센터에 해결책을 문의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막기 어렵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고객센터로부터 “(전화로 판촉행위를 하는) 텔레마케팅 업체가 했을 확률이 높다”는 안내가 이어졌다.
31일 취재 결과, 비단 윤 씨 뿐 아니라 이러한 사례가 전국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발신자 번호 표시 조작은 불법이지만, 해외 통신망을 경유할 경우 처벌이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편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오히려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셈이다.
최근 보이스피싱 등 휴대전화를 이용한 사기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텔레마케팅에 대한 비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070으로 시작되는 인터넷 전화(VoIP)나 02, 051 등 지역번호로 시작되는 일반 유선 전화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자, 관련 업계에서 발신자 번호를 임의의 휴대전화 번호로 표시되도록 조작하는 일이 크게 늘었다.
▲ 이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시작된 발신자 번호 표시 제도가 기술적인 허점 때문에 오히려 소비자를 울리고 있는 상황이다. 한 이동통신사 관계자는 “발신자를 알지 못하면 이를 차단할 방법이 없어 현실적으로 막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통사 측에서 윤 씨에게 제시한 대안은 사용 중인 번호를 포기하고 새 번호로 변경하라는 것이었다. 윤 씨는 “업무 상 필요한 번호를 바꾸자니 새로 알려야 하는 부담감이 있고, 그렇다고 계속 내버려 두자니 업무에 방해 받을 정도로 확인 전화가 오고 있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해당 이동통신사 관계자는 발신자 번호 표시 조작 가능 여부에 대해 “공식적인 네트워크 장비로는 여러 단계의 인증을 거치도록 돼있어 조작될 우려가 없다”고 확인했다. 다만 “인터넷 전화를 이용해 사설 교환기를 통하는 경우에는 자의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런 경우에도 발신 내역 등 과금 정보가 남아있으면 (조작 행위를 저지른) 당사자를 추적할 수 있지만, 해외를 경유하는 경우에는 이마저도 어렵다”고 답했다.
경찰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번호를 도용한 이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는 있지만 막상 쉽지 않다는 이유다. 경찰 한 관계자는 “발신자 번호 표시 조작 행위는 법으로 처벌 가능하다”면서도 이동통신사 설명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추적이 쉬운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