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수능시험인 가오카오(高考)를 앞두고 중국 언론이 현 중국 최고지도부 7명이 대학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을 조명해 눈길을 끌고 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报)는 중국 최고지도부를 구성하는 시진핑(习近平), 리커창(李克强), 장더장(张德江), 위정성(俞正声), 류윈산(刘云山), 왕치산(王岐山), 장가오리(张高丽) 등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명의 대학 입학 과정을 소개했다.
▲ 1997년 칭화대학 재학 시절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 최고 명문대인 칭화(清华)대에 입학하기까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혁명원로인 부친 시중쉰(习仲勋)이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고초를 겪자, 1969년 하방(下乡) 활동에 지원해 산시성(陕西省) 옌촨현(延川县)의 산골마을에서 6년간 생활을 했다.
시 주석은 '출신'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가입원서와 공산당 입당원서를 각각 8번, 10번씩이나 썼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시 주석은 1975년 추천을 통해 어렵게 칭화대학에 입학했다. 시 주석은 과거 회고문에서 "'붙여주면 들어가고 아니면 그만두지'라는 생각으로 1지망, 2지망, 3지망을 모두 칭화대로 썼다"고 할만큼 칭화대학 입학을 원했다.
당시 지역의 교육국 간부가 시 주석의 입학을 적극 지원했으나 칭화대 입학관리 담당자는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결국 부친이 일하는 공장의 간부가 "시중쉰 동지는 인민내부의 갈등에 속해 있을 뿐, 자녀의 학업, 취업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증명서를 써 준 끝에야 칭화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시 주석은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공부한 끝에 대학을 졸업했고 20년 후에는 다시 칭화대학 대학원에서 마르크스사상과 정치교육을 전공하고 '중국 농촌의 시장화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상무위원 7명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리커챵 국무원 총리는 1977년 유일하게 가오카오를 보고 대학에 입학했다.
리커창 총리는 당시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베이징대 입학은 사치라고 생각하고 1지망으로 안후이성 사범대, 2지망으로 베이징대학을 지원했다. 하지만 베이징대는 우수한 성적의 리 총리를 주목했고 우선선발권을 사용해 그를 입학시켰다.
리 총리는 대학시절 단어와 단어 해석을 빼곡히 적은 노트를 들고 다니며 열심히 외우는 공부벌레였다. 이 때문에 리 총리는 대학교 3학년 시절 1만자가 넘는 '영국헌법자료' 책자를 번역할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췄다.
공부 외에는 농구를 취미생활로 즐겼다. 리 총리와 함께 숙소생활을 한 후난성(湖南省) 고급인민법원 쑹카이추(宋凯楚) 부원장은 "농구실력을 평범했지만 비교적 민첩하고 대범한 플레이를 했다"고 밝혔다.
서열 3위안 장더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은 상무위원 7명 중 유일하게 해외 유학경험이 있다. 그는 연변(延边)대학을 졸업한 후 1978년부터 1980년까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유학했다.
위정성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은 하얼빈(哈尔滨)군사공정대학에서 미사일 탄도제어시스템을 전공한 공학도 원래 정치보다는 군수산업에 종사해 국방과학을 연구하려는 꿈을 가진 '이상주의자'였다.
류윈산 상무위원은 네이멍구(内蒙古)의 지닝(集宁)사범학원을 졸업한 뒤, 신화(新华)통신의 네이멍구지사에서 7년 동안 기자생활을 했다. 독서를 즐겨 했으며 적지 않은 산문을 썼다.
1973년 시베이(西北)대학 역샤과를 졸업한 왕치산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는 대학 입학 전 박물관 직원, 연구원 등의 이력이 있으며 졸업 후 공산당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 연구원으로 발탁되며 경제, 금융 분야의 일을 하게 됐다.
푸젠성(福建省)의 작은 어촌에서 태어난 장가오리 상무위원은 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등 어려운 가정형편을 극복하고 샤먼(厦门)대학 경제과에 입학했으며 1999년에는 칭화대학과 모교인 샤먼대학 관리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온바오 박장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