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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慧能) 대사의 머리를 베어간 신라 승려[제7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6.01.19일 10:58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남창(南昌), 이 도시는 중국 사람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 고장이다. 남창을 모른다고 하면 수부로 소재(所在)한 강서성(江西省)은 물론이요, 중국 대륙의 사람이 맞느냐고 의심할 정도이다. 사서에 한 페이지로 기록될 만큼 아주 특별한 역사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고장이기 때문이다.

  이맘쯤 퀴즈를 하나 내놓는다면 과연 어떨지 싶다. "남창이라고 하면 곧바로 머리에 떠올리게 되는 단어가 뭐지요?"

  잠깐, 남창은 도시 역사가 오랜 것으로 유명하다. 한(漢)나라 고조(高祖) 5년(B.C.202) 성읍을 구축하면서 벌써 그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남창은 시초에 '남방의 창성(昌盛)', '남부 변강의 창대(昌大南疆)'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이 지명은 약 2천년 동안의 풍운변화를 거치면서 여러 번이나 바뀌었다. 한나라 때는 예장(豫章)이라고 했고 당(唐)나라 때는 홍주(洪州)라고 했으며 송(宋)나라 때는 융흥(隆興)이라고 했고 명(明)나라 때 비로소 남창이라고 정명(定名) 되었다.

  그러나 여기의 어디에도 정답은 있지 않다. 실은 상상력이 어느 시대까지 날아가는지를 알아보는 퀴즈가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퀴즈라면 대륙의 누구든지 딩동 하고 골든 벨을 울릴 수 있다.

  "그거야 기의(起義)', '의병을 일으킨다'는 의미의 '기의'이지요."

  바로 이 '기의' 때문에 남창은 종국적으로 '영웅의 도시(英雄城)'로 불린다. 과연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 옛말이 그른 데 없나 보다. 1927년 8월 1일, 일명 '8.1기의'라고 일컫는 '남창기의'가 일어났다. 남창에서 일어난 이 무장반항사건은 중국공산당이 독립적으로 영도하는 무장투쟁과 혁명군 창설의 서막을 열었다. 이로써 민국(民國, 1912~1949)의 군사수도에서 공화국의 군기(軍旗)가 최초로 휘날린 것이다.



81기념관, 혼잡한 관객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철난간으로 진입통로를 만들었다.

  '남창 8.1기의 기념관'은 시가지를 남북으로 종단(縱斷)한 장강의 동쪽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그때 그 당시 기의를 친솔한 지도자들이 머물던 총지휘부의 옛터라고 한다. 평일이지만 삼삼오오 관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기념물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정말로 남창 하면 빠뜨릴 수 없는 특이한 명물로 되고 있는 듯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옛터는 원래 관광객을 상대했던 강서성 대여행사(大旅行社)가 1924년에 세운 건물이라고 한다.

  기념관을 나선 후 곧바로 택시를 불렀다. 행선지가 우민사 佑民寺라고 했더니 기사는 짐짓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다.

  "예? 사찰을 찾는 외지의 손님은 정말 오랜만인데요."

  기사의 말을 따른다면 외지의 여행객들은 대개 '8.1기념관'을 찾으며 고찰 우민사를 찾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고 한다. 기사는 실은 우민사가 남창의 손꼽히는 명물이라고 말하면서 고찰을 도외시하는 현실에 무척 아쉬워했다.



아파트 사이에 끼워있는 산문을 돌사자가 지키고 있다.

  우민사는 남창 시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불교 사찰이다. 지방문헌인 《남창부지(南昌府志)》의 기록에 따르면 사찰은 양무제(梁武帝) 태청(太淸) 원년(547)에 세웠다. 우민사는 원체 앞뒤가 7,8백 미터에 달하는 큰 사원이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훼손되었고 1986년에 사찰을 재건했다. 1991년에 비로소 산문(山門)과 천왕전(天王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약사전(藥師殿) 등을 완성했다. 명색이 천오백년의 고찰이지 뚜껑을 열고 보면 기껏해야 30년에 불과한 신찰(新刹)인 셈이다.

  "그래서 토박이들은 아니라고 해요, 고찰의 옛 귀퉁이를 차지한 모양새라고 하지요."

  문득 차가 멈춰서 웬 일이나 했더니 벌써 사찰에 도착했단다. 정말이지 기사가 귀띔하지 않았더라면 사찰을 얼핏 지날 뻔 했다. 사찰은 천 년 전의 옛 위용을 아파트의 회색의 수림 속에 깊숙이 묻어버리고 있는 듯 했다.



사찰 안쪽에 있는 한적한 지장전.

  우민사는 경학(經學)을 강의하던 남창의 옛 도장이었다. 신라의 많은 승려들이 보리심을 등불로 삼아 남창에 와서 구법을 하고 귀국했다. 객당에 있던 젊은 승려도 반도의 승려들이 우민사에서 수학(修學)한 옛일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몇 년 전에는 한국 스님들이 사찰에 비석을 세우기까지 했는데요."

  그가 말하는 비석은 한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曹溪宗)의 종사(宗師) 도의(道義)의 입당구법(入唐求法) 기념비였다. 이 기념비는 사찰 동불전(銅佛殿)의 뜰 모퉁이에 우뚝 서서 옛 기억을 더듬게 하고 있었다.

  동불전의 이 구리불상은 약 20년 전에 새롭게 주조한 것이었다. 가경(嘉慶, 1796~1820) 연간 주조했던 시초의 구리불상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훼손되었다고 한다. 이 구리불상은 우민사의 구리종과 보현사(普賢寺)의 철불(鐵佛)과 더불어 남창의 '삼보(三寶)'로 불렸다.

  현지에는 "남창이 암만 가난해도 3만 6천근의 구리가 있다"고 하는 속담이 있다. 이 민간 속담은 바로 우민사의 구리불상을 이르던 말이라고 한다.

  동불전에서 만난 스님은 옛 구리불상의 행방을 묻는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홍위병'들이 톱으로 머리랑 켜서 구리불상을 폐철더미로 만들었다고 하지요."

  '홍위병'은 중국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에 산생된 특수한 산물로 대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주종을 이뤘다. "낡은 사상과 문화, 풍속, 습관을 타파한다."는 것을 표방한 사회운동은 홍위병운동과 더불어 중국 대륙을 강타했다.

  보현사의 철불도 이 시기에 사찰과 함께 훼손되었다. 현재는 구리종만 홀로 남아 '삼보'의 옛 이름을 떠올리고 있다.

  옛 구리종은 우민사 서쪽 골목에 있는 종루(鐘樓)에 있었다. 웬 아파트의 마당에 있는 이 종루는 안내가 없으면 미궁의 궁전처럼 찾기 힘들다. 사찰 입구에서 입장권을 팔고 있던 여성 신도는 아예 옛 구리종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유독 구리종이 잔존하게 된 원인이 아닐지 한다.

  각설하고, 조계종의 종사 도의는 속명이 왕원적(王元寂)이며 법명이 명적明寂이다. 784년 당나라에 유학, 광부(廣府)의 보단사(寶檀寺)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훗날 그는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 즉 지금의 우민사에 와서 중국 선종(禪宗)의 9대조 지장(智藏)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9대조 지장은 8대조 도일(道一, 709~788)의 수제자이다. 도일은 7대조 회양(懷讓)에게서 득법(得法) 한 후 개원사에 도장을 열고 불법을 설파했다. 그는 선후로 제자 130명을 두었는데, 이런 제자는 훗날 모두 일방(一方) 종주(宗主)의 고승으로 되었다. 도일은 이 때문에 개원사의 개종(開宗) 조사로 추대된다. 도일 본인도 속성이 말 마(馬)이기 때문에 불문 제자들에 의해 마조(馬祖)로 존숭되며 또 마조 도일이라고 불린다.



남화사에 공양되고 있는 혜능 법사의 진신.

  중국의 선종(禪宗)은 6대조 혜능(彗能)에 이르러 남북종(南北宗)으로 나뉘었다. 남선종(南禪宗)은 혜능으로부터 시작된다. 8대조 마조 도일은 자심즉불(自心卽佛) 즉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로 된다"고 설파한다. 도일이 있던 지명을 딴 홍주종(洪州宗)의 참모습이다. 그런데 이 홍주는 황제(黃帝) 시대 음악을 관장하던 홍애(洪厓)가 수도하던 고장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도교의 발원지가 또 불교의 일파인 홍주종의 발원지로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우민사는 홍주종으로 인해 비로소 해내외에 명성을 날리게 되는 것이다. 신라 승려 도의는 남창에서 바로 이 홍주종을 익히고 반도의 서라벌에 돌아갔다.

  기실 우민사에는 홍주종에 앞서 선림(禪林)을 들썽케 한 비사(秘事)가 있다. 수학(修學)을 왔던 신라 승려 김대비(金大悲, 생몰일 미상)가 6조 혜능의 머리를 훔쳐가려 했던 것이다. 구리불상을 톱으로 켰던 '홍위병운동'은 이처럼 천 년 전에 벌써 일어나고 있었다.

  《조계대사별전(曹溪大師別傳)》과 송(宋)나라 이후의 《육조단경(六祖壇經)》은 혜능은 "내가 죽은 뒤 동방의 인물이 내 목을 탈취하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제자들은 이 말을 기억하여 혜능의 목 부분을 쇠로 감아서 탑에 모셨다. 아닐세라, 당나라 개원(開元) 10년(722), 김대비가 육조 혜능의 머리를 얻어 해동에서 공양하려고 했다. 김대비는 역사(力士) 장정만(張淨滿)에게 2만냥을 주어 육조탑(六祖塔)에 가서 혜능의 머리를 훔치게 했다.

  이때 한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김대비는 육조대사의 머리를 훔쳐서 신라로 무사히 귀국했으며 이것을 지리산의 쌍계사에 공양하였다. 쌍계사의 탑전에 있는 육조 정상탑(頂相塔)이 바로 그것이라고 전한다. 중국측의 기록은 이와 다르다. 722년, 괴한이 육조탑에 접근하자 그를 붙잡았다는 것이다. 관아는 국법으로 다스리면 중죄가 되겠지만 고승 공양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죄를 사면했다고 한다.

  사실상 혜능의 진신(眞身)은 현재 광동성(廣東省) 남화사(南華寺)에 공양되고 있다. 정말이지 지리산 쌍계사의 육조 정상탑의 진실은 무엇인지 궁금한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그때 괴한 장정만이 칼로 혜능의 목을 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목에 감은 쇠 때문에 종당에는 머리를 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혜능의 목 등 육신을 철로 가공한 사실을 미화하려고 일부러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혜능의 '진신(眞身)'은 실제로 가공품의 조각상이라는 것이다.

  시야비야를 떠나서 혜능의 '진신'은 칼에 의해 '참모습'을 드러낸 적 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1940년대에 있은 일이라고 한다. 어느 날, 남화사에 일본군 몇 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진신'이 거짓이라고 의심하고 칼로 '진신'의 등에 작은 구멍을 냈다, 이 구멍으로 육신 내부의 골격과 내장이 드러났다. 이 몇 명의 일본군은 불교 신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육신보살'에게 절을 올린 후 다소곳이 물러갔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화가 복으로 된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닐지 한다. 일본군의 칼은 혜능의 잔등에 상처를 남겼지만 또 이 때문에 완정한 남화사를 세상에 남겨놓았다. 일본군이 '진신'에 경외심을 품지 않았던들 남화사가 잿더미로 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진신'이 참혹한 법난을 당한 것은 '문화대혁명' 시기였다. 혜능의 '진신'은 홍위병들에 의해 밀차에 실려 사찰 소재지인 소관(韶關)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진신'은 가짜이고 사람을 속이는 '물건'이라는 것. 홍위병들은 혜능의 머리 위에 승려들의 밥그릇인 바리때 발(鉢)을 덮어씌우고 얼굴에 '나쁜 놈'이라는 글자까지 써놓았다고 한다.

  《불원화상법회(佛源和尙法滙)》의 서술에 의하면 이때 홍위병들은 혜능의 잔등에 쇠막대기로 사발 크기의 구멍을 뚫고 오장육부를 꺼내 사찰의 전당에 아무렇게나 던졌다고 한다. 불원(佛源, 1923~2009)은 그때 남화사에 있었던 승려로 훗날 모 불학원(佛學院)의 초대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육조 혜능의 영골(靈骨)은 이 불원 선사 등에 의해 비밀리에 보존되며 1979년 당시 광동성 최고 지도자로 있던 습중훈(習仲勛)의 명령에 의해 사찰에 다시 공양된다. 사찰에서 천년을 이어오던 법난(法難)은 이로써 한 단락을 맺게 되는 것이다.



옛 종루로 가려면 사찰에서 나와 왼쪽 골목길로 한참 들어가야 한다.



철문 안쪽의 중앙에 있는 건물이 옛 종루이다.

  우민사의 천년의 역사를 전하는 종소리는 끝끝내 들을 수 없었다. 구리종을 보관한 종루에 자물쇠가 잠겨 있었고, 열쇠를 관리하는 승려가 마침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종루 아래의 뜰에서는 종소리 대신 웃음소리가 간간이 터지고 있었다. 끼리끼리 모여 앉은 동네 사람들이 그 무슨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정말이지 대륙과 반도의 과거와 현대, 거짓과 진실이 하나로 뒤섞여 남창의 고찰에 소설 같은 굴곡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있지 않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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