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녀 대통령, 52년의 격세지감
박근혜 대통령이 5일 뉴욕행 전용기 내 회의실에서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조원동 경제수석, 배재현 의전장, 윤창중 대변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왼쪽 둘째부터 시계방향) 등과 회의를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마이크가 어색하다며 마이크 없이 회의를 진행했다. [최승식 기자]
6일 오전 8시(한국시간). 미국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동포간담회장에 박근혜 대통령이 들어섰다. 붉은색 옷고름을 단 미색 한복 차림이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방문에 이어 52년의 시차를 두고 그의 딸 박 대통령이 교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450여 명의 교민들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로 박 대통령을 맞이했다. 이어 박 대통령의 격려사가 시작됐지만 기립박수가 이어지는 바람에 박 대통령이 “앉으십시오”라며 좌중을 정리하고 나서야 행사가 진행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동포 여러분을 만나 뵐 때면 고맙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인사말을 했다. 이어 “지난 3·1절에 뉴욕 한복판 타임스스퀘어에서 독도 광고가 방영됐고, 작년 말엔 뉴욕주 하원선거에서 한인 역사상 최초로 김태석 의원이 당선되는 경사도 있었다”며 “대한민국이 동포 여러분의 자랑이듯 동포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이 계속되는 것 때문에 걱정이 클 것이지만 걱정하지 말라”며 “빈틈없는 안보 태세를 유지하고 미국·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공조를 강화하면서 단호하고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 채권에 대한 외국인들의 순매수도 계속되고 있다”며 “우리 경제가 북한의 위협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가 알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격려사가 이어지는 동안 15차례의 박수가 나왔다. 맺음말 뒤에도 한동안 기립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이날 간담회에는 성공한 한인들이 총출동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와 뉴저지 통합한국학교 중창단의 환영 음악공연도 이어졌다. 민승기 뉴욕한인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에게 투표를 했던 유권자가 함께하는 자리라 의미가 더 크다”며 “지속적인 경제발전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숨겨진 민생의 어려움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조국을 이끌어달라”고 당부했다. 강병목 전 뉴욕한인경제인협회장은 “동포 경제인들과 모국 중소기업 간에 경제교류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지원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언론들도 박 대통령의 방문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경제사절단에 삼성·LG 등 재계 거물이 포함된 사실을 집중 조명했다. USA투데이는 박 대통령을 “대한민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라고 소개하며 “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은 첫 대면에서 양국 공조 강화뿐 아니라 북한과 ‘조건부 대화’를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박 대통령의 방미는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의 방미 때와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1961년 방미 당시 김포공항에서 KNA(대한항공의 전신) 특별기로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전용기나 전세기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하네다 공항에서 미국 노스웨스트항공을 타고 앵커리지에 내려 다시 시애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애틀에서 또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시카고를 경유하고서야 워싱턴에 도착했다. 꼬박 사흘이 걸렸다. 박 전 대통령은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에게 베트남 파병을 제안하면서 한국처럼 자립 의지가 있는 국가에 차관을 제공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1917년생 동갑내기 케네디 전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박 전 대통령은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고, 그들의 임금을 담보로 한 1억5000만 마르크의 차관을 얻어냈다. 반세기 만에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차관국’이 ‘투자국’으로 발전한 데는 이 돈이 초석이 됐다.
52년이 지나 박 대통령은 전세기 편으로 13시간30분 만에 뉴욕에 도착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정몽구 현대차 회장, 구본무 LG 회장 등 52명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경제사절단도 동반했다. 뉴욕 경찰은 박 대통령이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숙소인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이르는 동안 헬기 경호와 뉴욕 시내 교통통제까지 실시했다.
◆반기문 사무총장 면담=박 대통령은 6일 오전(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를 방문해 반 총장과 면담을 하고 한반도 문제와 상호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박 대통령이 2009년 한·EU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지원을 위한 특사로서 유럽에서 반 총장을 면담한 이래 3년 반 만이다.
뉴욕=신용호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