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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23] 김시자 《정통민속식품도 산업화 규모화 그룹화에로》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11.15일 10:56
특별기획: 중국조선족기업인[23]


ㅡ길림성김시자민속식품유한회사 리사장 김시자를 만나

프로필:


김시자 (金时子)


1956년 생


1972년 9월ㅡ1979년 영길현 삼가자향 화평소학 교원


1980년ㅡ1985년 장춘경제개발구 락동촌 6사 사장


1986년 ㅡ1995년 장춘시춘진식품공장 공장장


1996년 ㅡ2001년 장춘경제기술개발구 《민속촌개장집》 경리


2001년ㅡ현재 길림성김시자민속식품유한회사 리사장


사회직무 및 주요영예:


길림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부리사장.


장춘시조선족부녀협회 부회장.


1999년 장춘시인민정부로부터 모범개체호 영예 획득.


2000년 장춘시인민정부로부터 선진개체공상호 영예 획득.


2000년 장춘시민족단결진보 선진개인으로 당선.


2004년 전국소비자만족단위로 당선.


2006년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위원회로부터 감사패 수여받음.


《시대의 발전은 정통적인 민속식품 제작에 새로운 내함을 부여했다. 천년의 정통적인 수공생산으로부터 현대화 ,규모화, 산업화, 그룹화의 방향으로 발전해야만 진정으로 시대의 흐름에 알맞는 민속식품의 새로운 비전을 실현할수 있다》.


《정통적인 민속식품으로 전국시장 나아가 세계시장을 누비며 김시자민속식품을 광범한 소비자들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믿을수 있는 우리 민족의 브랜드로 부상시킬것이다》.


요즘 장춘시구태경제개발구 카륜공업구 북측에 2만 2000평방메터의 땅을 구입하고 2000만원의 선차투자로 1만 2300여평방메터의 3층 공장건물을 건축하느라 팽이처럼 바쁘게 돌고있는 조선족녀성기업인이 있다.


민속식품으로 창업을 시작해서 장장 25년을 걸어오면서 장춘시 조선족사회에 《김시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많은 일을 해왔다. 조선족사회의 크고 작은 행사에 민속식품을 무료기증하는것은 물론 현지 조선족사회 각 협회의 활동에도 선금을 선뜻히 내놓았다.

11월 5일 오후 기자와의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김시자리사장은 직원이 금방 병원에서 달여온 중약부터 마셨다. 2002년 암으로 큰 수술을 받고나서 신체가 많이 허약해진 김시자리사장은 새 공장 건축으로 분주하면서 약은 달고 다녀야만 했다. 한국에서 구입한 2억 4000만원(한화)짜리 자동화생산라인이 새 공장의 락성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이렇게 취재까지 한다니 긴장해나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한 일에 비해 너무나 겸손하고 소박한 첫마디에 기자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자기자랑도 할줄 모르고 열심히, 부지런히, 알차게 기업을 성장시킨 그녀, 장춘시 조선족사회에서는 듬직하고 후더운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담 큰 녀자, 통 큰 녀자, 털털한 녀자, 큰일 하는 녀자 ,인정있는 녀자, 틀거지 없는 녀자……


곤난에 굴복하지 않는 끈기 그리고 시장에 예리한 안목

찰떡 가공부 일각.


《1985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고 가장 잊을수 없는 한해였다》.

1985년 락동촌의 수전이 기업용도로 징용되면서 농업을 위주로 하던 락동촌 주민들은 시장경제의 물결속으로 사정없이 휘말려들게 됐다.

당시 김시자도 모든 재산을 팔고 현금 만원까지 꿔서 친구, 친척들과 함께 북경, 천진에 가 식당을 경영했다. 그러나 낯선 곳에 가서 경험도 없고 또 생각밖으로 여러가지 문제가 생겨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고향에서 가지고 온 돈도 거덜나고 적당한 항목을 잡지 못한 김시자는 북경, 천진 두 도시사이를 전전하면서 길거리에서 김치를 팔기 시작했다. 북경, 천진에서의 2년동안은 김시자의 일생가운데서 제일 어렵고 막막했던 나날이였다.


1987년 어린애를 돌보기 위하여 장춘으로 돌아온 그녀는 2년동안 김치를 팔아서 모은 돈 2만원에 락동촌의 담보로 향으로부터 2만원의 대출을 받아 춘진식품공장을 꾸렸다. 첫 시작은 순조로왔지만 1989년 원재료가격이 상승하면서 공장의 경영이 다시 곤난에 봉착하게 됐다.

《어떻게 하나 공장을 살려야 한다》 .


김시자는 반년동안의 시장조사를 거쳐 조선족식품이 광범한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있음을 발견하고 조선족이라는 우세를 리용하여 경영항목을 전변, 김치, 떡 등 민속식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제품의 판로가 생각밖으로 좋았고 매일 천여근의 조선족전통떡이 불티나게 팔렸다. 장춘역, 백화상점, 국제무역청사, 인방지하, 구아, 자동차성 백화상점 등 큰 상점에 지정판매점을 개설했고 장춘시 100여개 크고 작은 식당에 공급하기도 했다.


판로가 열리고 생산이 확대되자 1997년 김시자는 480평방메터의 3층집을 확건하여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해마다 국가에 12만원의 세금을 납부하고 련속 6년 장춘시정부로부터 모범개체호 영예를 수여받았다.


식품공장을 경영하면서 김시자는 또 장춘시경제기술개발구에 민속촌개장집을 경영했는데 1995년 개업시초의 10상으로부터 1999년에는 65상으로 발전, 하루에 개 30-40마리씩 잡을 정도로 손님이 북적였다.

후에 장춘시에 개장집이 여기저기 서면서 경영상 영향을 받게 되자 김시자는 단연히 개장집을 접었는데 이는 김시자민속식품공장의 시초자본축적에 튼튼한 발판으로 됐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한시도 배움에 게으르지 않았다


김시자의 책상우에는 항상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료녕신문 , 장백산, 청년생활 등 조선문 신문, 잡지가 차곡히 쌓여있다. 일하는 짬짬에도 글을 읽기 좋아한다. 매일 저녁 책을 보는것이 이제는 습관처럼 배였다.


김시자는 기업을 운영하면서 선진기술에 대한 학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01년부터 김시자는 한국에 가서 한국의 선진기술을 학습하기 시작했다. 호사다마라고 2001년 김시자의 첫 한국행은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려행비자가 거부당한것이다.

장춘에서 김시자를 잘 료해하는 길림신문, 장백산잡지사, 길림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에서 련명으로 령사관에 공문을 보내기도 했고 나중에는 김시자가 직접 다년래 수여받은 상장을 한가방 메고 령사관에 찾아가기도 했다.


결국 김시자의 회사와 사적은 령사관의 담당령사를 놀래웠고 《조선족사회에 이렇게 훌륭한 분이 있는것을 정말 몰랐다. 앞으로 우리 민족사회를 위해 더욱 많은 일을 하기 바란다》고 하면서 당장에서 비자를 발급했다.


이렇게 이룬 한국행이 2001년 8월 8일이였다. 그러나 구학의 길은 결국 순탄치 않았다. 류통기한이 긴 제품을 개발하려고 한국을 찾았는데 그가 고찰한 한국공장이 즉식제품을 생산하는 업체여서 그의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이렇게 김시자의 첫 한국행은 아무런 수확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귀국했다.


두달후 다시 한국으로 떠났을 때도 일주일동안 현지고찰을 했지만 큰 수확이 없었다. 마지막날 실망에 잠긴 김시자가 안산의 모 슈퍼에 들렸을 때 카운터에 놓인 떡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자세히 보니 떡의 류통기한이 한달이였다. 《바로 이것이다》. 김시자는 당장에서 떡을 한박스 사서 중국으로 가져와 류사한 제품을 생산하는데 착수했다.

그해 12월 다시 한국행을 택한 김시자는 직접 그 떡공장을 찾아가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 허나 한국사장은 기술을 배워주려고는 하지 않고 한물이 간 자기회사의 중고기계를 김시자에게 팔려고 시도했다.


전전긍긍한 끝에 결국 한국에 있는 친척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제일 큰 경창정밀기계공장을 찾게 되였고 그 인연이 오늘까지 지속되고있다. 김시자는 당장에서 돈 4000만원(한화)을 모아 기계를 구입하고 기술을 배웠다.

허나 기계를 중국에 들여와서 조립하려고 하니 또 문제가 생겼다. 한국경창공장은 김시자가 규모가 작은 가정식떡방을 경영하는줄 알고 가정용 떡기계를 보내왔던것이다. 이는 공장의 생산수요를 만족시키기에는 태부족이였다.


이렇게 구입한 기계로 2년동안 쓰고나서 시장전망이 생각보다 좋아 2003년 다시 한국에 가 1억원(한화)을 들여 떡기계를 구입했다.


《우리 직원들은 한가족이다》


김시자는 새로 건설한 공장건물에 작업장, 사무실, 회의실, 활동실 외 또 직원들을 위한 가정식숙소도 마련했다. 60평방메터좌우의 가족숙소를 11개 만들고 25평방메터좌우의 개인숙소를 21개 만들어주었다.


숙소는 개인집처럼 아담하게 장식됐고 벽지도 붙히고 침대, 옷장, 쏘파, 주방의 기본용품, 태양에너지 온수기, 이불 등이 모두 갖추어졌다.


근일 구태시 개발구 사회복무국의 왕영순국장이 공장건물을 시찰하고 나서 《옹근 구태시에도 이런 기업이 없다. 조선족녀성이 이런 기업을 만들었다는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고 하면서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


현재 회사에는 60여명의 직원이 있는데 김사자는 직원들을 자식처럼, 형제처럼 생각하고 자기가 해줄수 있는것은 뭐든지 다 해주고있다.

《항상 어려운 시기에는 귀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김시자는 《귀인들의 도움이 있어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회사를 오늘까지 경영할수 있었다》고 늘 말한다. 장춘시조선족부녀협회, 장춘시조선족중학교를 비롯한 장춘시 조선족사회 각계의 지지가 있었기에 어려운 고비고비를 이겨낼수 있었다고 말한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열심히 기업을 운영하는 그녀의 정성은 현지 사람은 물론 국내 기타 도시 및 해외의 합작파트너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하여 기업운영가운데서 기술혁신이나 자금조달이 잠시 어려울 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선뜻이 내밀었다.

《어려울 때 도와준 고마운 분들은 그 은혜를 꼭 배로 갚겠다》.


김시자는 자기를 도와운 고마운 분들을 항상 기억하면서 언제든지 기회만 되면 잘 보답할것이라고 밝혔다.


《힘만 된다면 얼마든지 하고싶다》


김시자는 현재 사회적으로 길림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부리사장, 장춘시조선족부녀협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면서 기업인으로서 사회적인 환원활동을 활발히 해왔다.


해마다 조선족사회의 크고 작은 행사에는 물론 일상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통큰 씀씀이를 보였다. 지금까지 장춘시 조선족사회에 기부한 돈과 물건이 30여만원에 가깝다. 그리고 대리어머니로 활약하면서 불우학생 돕는데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기업을 창립할 때는 잘 살아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허나 지금은 자기가치를 실현함과 동시에 더 큰 사회적가치를 실현하고퍼요. 지금 저는 투입과 생산규모를 확대함과 동시에 재간이 있는 지식청년과 경험이 있는 정리실업인원, 땅을 잃은 농민들을 채용하여 기업인재를 충실히 하고 온당하게 발전하고 창신하고저 해요》.


김시자는 기업을 장대시키면서 사회에 더욱 많은 취업기회를 제공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잘 살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고저 노력을 아끼지 않고있다.

제품은 전국 각지로 판로가 열렸다.

길림성김시자민속식품유한회사 소개:


길림성김시자민속식품유한회사는 연구개발, 생산, 판매가 일체화된 다원화 실업회사이다. 전신은 1987년에 설립한 장춘시춘진식품공장이고 2001년 주식제유한회사로 전변했다.


해마다 500톤의 밀가루제품, 300여톤의 옥수수제품, 1200여톤의 찹쌀제품, 300여톤의 야채제품을 생산한다. 김시자민속식품유한회사 본사 산하에는 상해제1분회사, 한국민속김치공장, 한국민속떡공장, 옥수수식품가공공장,한식랭면공장이 있다. 직원이 60여명이고 년 생산액이 2500만원좌우이다,


현재 원 공장부지는 장춘시경제기술개발구에 자리잡고있다. 2010년 장춘구태경제개발구 카륜공업북구에 2만 2000평방메터의 공업용지를 구입하고 새 공장을 건축하고있다.


현재 김시자브랜드의 찹쌀떡, 한식콘후레이크, 한식찰떡파이, 한식전통떡, 한식민속김치, 한식랭면 등 한국특색이 있는 6대 계렬 50여가지 식품을 생산경영하고있다.


제품은 동북 3성, 북경, 상해, 천진, 훅호트, 태원, 제남, 남경, 합비, 대련, 무한, 의우, 복주, 장사,계림,심수, 곤명, 귀양, 성도, 중경, 서안, 란주, 서녕, 태원 , 석가장 등 전국 각지로 판매하고 있다.


11월 15일 새 공장으로 이사하여 생산라인을 조립하고 생산에 투입했으며 명년에 정식 오픈하여 성대한 개업식을 할 예정이라고 김시자는 밝힌다.

일부 제품들1

일부 제품들2

편집/기자: [ 장춘영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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