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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18)—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1.10.07일 13:12
1946년초에 들어서서 첫단계의 토비숙청을 거쳐 동만근거지인 연변의 토비들은 기본적으로 숙청되여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이 마련되였다.

동만을 더욱 공고히하기 위해 항일련군의 주요지도자들과 연안에서 들어온 간부들은 항일전쟁시기 연안에 있던 항일군정대학과 같은 간부양성학교를 설립하여 혁명사업에 수요되는 대량의 기층간부를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길동군정대학 학생모집과 함께 연변대학 창설통지도 사회에 반포되였다. 많은 우수한 청년들이 길동군정대학뿐만 아니라 연변대학 학생모집에 응해나섰다. 하지만 당시 여러가지 여건으로 하여 연변대학창설은 뒤로 미루게 되여 조선족응시자들가운데 대부분은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조직편성한 조양천교도대에 가서 학습과 훈련을 받게 되였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전신인 조양천교도대에 입대한 최미사로인(82세 연길).


조양천교도대에 입대했던 연길시 최미사로인은 입대하던 경위를 이렇게 소개해주었다.

《나의 욕망은 대학에 가는것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연길에 연변대학이 선다고 해서 연길에 왔습니다. 46년초에 연길에 왔는데 연변대학을 세우는것을 미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험생들이 〈그저 이렇게 헤쳐지면 아된다. 그래서 집체로 정부에 제출하자.〉 이렇게 돼서 그때 김선이라는 수험생이 회장을 맡은 연변대학 수험생 학우회를 조직해 련락지점을 연길서시장쪽에 구길관이라는데 정했습니다 … 그래 〈어째서 연변대학을 세운다고 하더니 왜서 안세우는가?〉하니까, 그때 정부에서 말하는것이 〈세우려 하다가 형세가 변동이 되고 그리고 학교를 세울 조건이 완전히 구비하지 못하고있다.〉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어째야 하는가?〉고 하니 정부에서는 〈기다리면 몇년을 어떻게 기다리겠는가? 다른 곳에 련결을 할것이니 며칠 더 기다리라〉 했습니다. 이래서 기다리는데 며칠후에 구길관에 모이니까 조선의용군 5지대 판사처가 아마 연길에 있었겠지요. 그때 문정일동무가 우리한테 와서 몇번 연설도 하고 좌담회도 하고 이러는 과정에 〈5지대 조양천교도대를 세운다. 교도대라는것은 군정대학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조선의용군에 대한것을 들었습니다. 조선의용군이 어떻게 되여 동북에 나왔는가? 주총사령의 명령에 의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입대하고싶은 동무들은 어느때까지 조양천교도대가 어디쯤에 있으니 거기에 찾아가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안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조선에 가서 조선군대를 할 사람이 많겠으니 차라리 잘되였다고 했습니다 … 조양천교도대에 찾아가 입대를 하였습니다. 아마 며칠후에 입학식을 한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래서 참군했습니다. 그때 동기라는것은 하나는 더 배우자 그러니까 대학에 가서 공부를 더 하겠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에 나가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요하게는 이 두가지 목적으로 입대를 했습니다. 학습하고 단련하는 과정에 인생관이고 세계관이고 다 변했고 혁명의 도리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연변에 도착한후 태항산의 조선혁명군정학교 간부와 학원을 토대로 조양천에서 교도대를 조직하였다. 초창기 연변대학에 시험치려던 많은 조선족청년들이 교도대에 입대하여 1946년 6월에 이르러 조양천교도대의 학원수는 무려 1,300명에 달했으며 이들 전부가 조선족이였다. 박송파가 대장을 맡고 김세민이 교도원직을 맡은 조양천교도대는 녀성중대를 포함해 7개 중대로 편성되였다.  

조양천교도대에 참가했던 연길시의 장한철로인이 회억한데 의하면 조선의용군에서는 학원모집통보를 냈을뿐만 아니라 주동적으로 연변의 각지 조선족학교들을 다니며 우수한 청년들을 모집하기도 했다. 조선의용군의 주요간부였던 리익성과 김철이 직접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찾아가 학원을 모집한다고 했고 체질이 좋고 일정한 문화기초가 있으며 혁명열성이 높은 청년들을 교도대에 받아들여 정치와 군사 지휘관으로 양성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장한철로인과 은진중학교의 많은 학생들이 조양천교도대에 입대했다고 했다.

1946년 6월에 이르러 동북민주련군이 전략적철수를 완수함에 따라 연변은 동만의 확고한 해방구로 정치, 군사 중심지로 되였다. 길림성 당정군 지도부가 연길에 도착했고 길림지역으로부터 화전군정학교와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도 연길에 모여왔다.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는 연안의 항일군정대학 사생들을 바탕으로 설립된 학교이다. 연안의 항일군정대학 부분적 사생들은 동북에 진출한후 동북에서 학원들을 모집하여 학교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중 하장공과 도석도는 길림, 장춘 지역에서 새로 모집한 학생들을 모아 강의를 하면서 화전에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를 설립했던것이다.

하지만 국민당군이 장춘, 길림지역을 강점하면서 동만분교는 화전군정학교와 함께 연길에 오게 되였다. 그리하여 당시 연길에는 화전군정대학,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 길동군정대학, 조양천교도대를 비롯해 4개의 군정대학이 있게 되였다.

주보중을 비롯한 길림성 간부양성학원의 주요 간부들(1946년).

군정대학 교기(연길박물관 수장).

군정대학 학원들의 교재(연변박물관 수장).


동만근거지를 확고히하여 동북민주련군의 가장 유력한 후근기지의 하나로 되게 하려면 동만근거지의 생산과 정치선전을 크게 강화해야 했다. 그리고 나아가 동북근거지를 확장하고 전국을 해방하려면 군사와 정치적으로 합격된 여러 민족 간부가 대량 수요되였다. 이를 감안해 길동군구에서는 1946년 6월에 연길시 북대영에서 연길에 모인 4개 군정대학을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로 합병하였다.

도석도가 교장 겸 당위원회 서기를 맡고 주사환이 정치위원을 맡았다.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는 합병초기 2,600여명 학원이 있었는데 제1대대 520명은 한족학원이고 제2대대 780명과 제3대대 1,300명은 전부 조선족이였다.

당시 국민당군이 동북에서 우세를 차지하자 숨어있던 토비들이 다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흑룡강 목단강지역에서 본격적인 토비숙청을 진행함에 따라 부분적 토비잔여세력이 연변의 왕청쪽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동만의 정규부대는 국민당군의 공격을 막는 제1선에 나갔기때문에 연변지역에는 유력한 부대가 없었다.

길림성 당위원회와 정부, 군구는 연변의 군정대학 학원들을 조직해 잔여토비를 숙청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동만분교의 학원들은 4개 부분으로 나뉘여 왕청 라자구를 비롯한 각지에 파견되였고 현지의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학습과 군사훈련을 진행했다.

적과 싸우면서 연길까지 철수해온 화전군정학교 학원들은 일정한 전투경험이 있었다. 서계영로인이 회억한데 의하면 그는 당시 기관총수로 라자구 토비숙청에 나갔다.

《46년 6월경이였습니다. 북대영에 와가지고 6월 며칠날에 라자구에 들어갔습니다. 화전에서 나온 사람들이 전투경험이 있어서 선발대로 들어갔습니다. 자동차 세대로 갔는데 내가 앞에 기관총을 걸었습니다.연길에서 떠나서 대흥구로 해서 계관라즈로 해서 장자구까지 들어가니 긴장했습니다. 토비들이 있다고 해서 장탄을 했습니다. 라자구에서는 전투를 안했습니다.

하로무즈구, 상로무즈구, 동흥, 삼도하자 등지에 있었는데 1대대 한족 학우들이 하로무즈구쪽에 가 있었습니다. 정치공세, 무장공세를 했습니다. 토비가족들에게 와해공작을 했습니다. 애민공작도 하고 포위하여 한 300여명 귀순시켰습니다. 나와 장춘에 있는 김경의 아버지가 항일간부인데 우리 15명을 데리고 동녕에 갔습니다. 동녕에 가니까 박퇀장이라고 있었는데 토비를 숙청했습니다.

동녕하고 왕청현간의 교통이 차단되였는데 우리가 토비를 숙청하고 교통을 소통시켰습니다. 로흑산에 가면 로즈꺼우라는데 그곳에서 토비들과 좀 싸웠습니다. 그때는 한 60명내지 70명과 싸웠습니다. 안진유부대와 싸웠습니다. 한 300명을 귀순시키니 놈들도 우리를 겁나했습니다. 거기에 가니까 조선사람들이 애먹고 있었습니다.

조선사람부락에 갔는데 조선에 못가니 한곳에 모여서 목숨을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부락안에 일본놈들이 쓰던 대포와 총을 다 가져다놓고 독립자위퇀이라고 했습니다. 애들까지 전부 무장하고있었습니다. 우리는 9.9식 보총을 메였는데 그들은 애들까지 기병총을 가지고있었습니다 …우리가 흰기를 흔들면서 조선군대라고 했지만 처음엔 잘 신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부락에 들어 갔는데 소를 잡고 마당에 불을 피우고 옛날 조선의용군이라는 말을 들어본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알고보니 그들은 일제때 개척단에서 온 사람들이였습니다. 마지막에 우리 올 때 열다섯사람이 총을 다 바꾸고 새 권총 한상자하고 탄알하고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올 때 일본놈들이 쓰던 포를 싣고 왔습니다. 라자구 군정학교를 지원하겠다며 군마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져갔던 채소들을 부락민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말을 타고 대흥구에 오니까 학교는 룡정에 갔다고 했습니다.》

라자구 토비숙청사적지 고성교.

라자구 혁명렬사기념비.

토비숙청에서 희생된 부분적 조선족렬사 명단(라자구 혁명렬사 기념비).


동만분교의 학원들은 토비잔여세력을 철저히 제거하고 룡정에서 한동안 훈련과 학습을 진행했다.

1946년 10월 18일, 동북군정대학 동만분교를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로 개칭하고 성대한 개교식을 가졌다. 새로운 결정에 따라 주보중이 직접 학교 교장을 맡고 진정인이 정치위원을 맡았으며 강학빈이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전교 학생들은 3개 대대로 편성되였는데 제1대대는 한족학생으로 구성되여 6개 중대로 나누었다. 이 가운데 한족 녀학생과 조선족 녀학생을 합쳐 녀성중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원 길동군정대학과 화전군정학교 학원으로 제2대대를 편성하고 원 조양천 교도대 학생으로 제3대대를 편성하였는데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전부 조선족 학생이였다.


동북군정대학에서 공부한 김금옥 로인은 당시 학습과 생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정치과는 군이나 시사, 중국공산당 당사 그리고 인생관학습이였고 군사훈련도 했습니다 총의 구조를 다 외우고 사격훈련도 했습니다. 생활은 항일군정대학의 전통을 이어나갔고 연안의 조선군정대학식으로 진행하였다. 교원들은 조선청년들이 어째 옛날에 노화교육을 받았는가? 나라를 잃고 이렇게 되였기때문에 청년들이 일어나 혁명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일본놈들에게 압제를 받던 일을 생각하고 격정에 넘쳐있었습니다.

그래서 녀자들은 진정한 해방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학습도 잘하고 토론하면서 열렬히 발언하였습니다. 식사는 옥수수밥에 감자국이나 시래기국을 먹어도 재미있었습니다. 혁명가곡을 부르고 춤추면서 나날을 보내니 집생각도 안났습니다. 군정대학에 안 다니였더라면 이런 사상기초를 건립할수가 없었을것입니다.

당의 덕에 해방받아서 지식도 늘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정신도 기본상 수립되고 내가 입당한지 61년이 됩니다. 당과 인민을 위해서 끝까지 당원의 본질을 잊지 않겠다는 이 각오만은 있습니다. 군정대학을 디니면서 고생을 겪었기때문에 어떤 곤난이 있어도 전승할수 있고 또 용감할수 있습니다. 소박한 감정이 계속 남아있으며 안락한 생활에 특별히 머리를 안 씁니다.》


서계영로인은 학교생활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말은 조선혁명군사학교라 하지만 의용군들이 연안에 있으면서 항일대학에서 공부하는 사람들, 하북에서 일본사람들과 투쟁하던 의용군들, 그래 온 다음에 항일대학의 교육방침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말은 조선혁명군사학교라 하지만 모택동동지가 항일대학에 제시한 교육방침이였습니다.

견정한 정치방향, 기동령활한 공작작풍, 간고분투하고 용감히 분투하는 작풍, 단결 긴장 엄숙 활발…이러한 교육방침을 가지고 그대로 했습니다. 여기서 정치학이라는게 첫째 중국근대사, 조선근대사, 정치경제학, 마레주의에 들어가서 변증법적 유물론 그때 수평이 그 정도에는 안 도달했습니다.


정치경제학과 사회발전사, 중국현대사, 조선현대사 그리고 군사학이 많았습니다. 군사학은 야전에 나가서 야전작전, 시국이 긴장하니까 낮에 행군, 급행군, 천천한 행군, 긴 행군, 다음 병기학, 다음 지형지물 리용학, 포복하는것, 폭발병기학, 실탄사격 등이였습니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는 1947년 4월에 룡정의과전문학교를 부속의학원으로 접수하여 의료일군을 양성하기도 했다. 길림분교 부속의학원의 학생은 300명 규모였는데 전부다 조선족이였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는 군정간부를 양성하는 종합성 학교로서 1948년 2월에 이르기까지 4,800여명 우수한 군정간부를 양성해냈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 기층 행정간부거나 부대 기층 지휘원으로 파견되였다. 부대에 간 졸업생들은 련장, 지도원, 패장, 반장을 맡아 전사들을 거느리고 국민당군과 용감히 싸웠다.

지방에 내려간 졸업생들은 토지개혁과 전선지원사업을 지도하는 한편 현지 인민을 이끌고 생산을 적극 발전시켜 인민의 생활을 개선하고 전쟁에 수요되는 물자를 공급하는데 특출한 기여를 했다.그리고 기술학원들은 동북민주련군의 초기 포병학교와 공병학교, 항공학교에 진학해 특수 군사인재로 성장했으며 초기 철도병건설에도 적극 투입되였다. 뿐만 아니라 의술을 배운 학원들과 많은 녀성학원들은 선전대, 의료대, 간호대에 편입되여 해방전쟁에 큰 기여를 했다.

  룡정군정대학 의과대학 호사반.


(1957년까지 군정대학 룡정의과학원은 많은 의료일군을 양성했다)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개교 60주년을 맞으며 2006년, 동북군정대학 출신인 장한철선생이 작사하고 최미사선생이 작곡한 《청사에 길이 빛나라 모교여》라는 노래가 창작되였다.

폭풍 터져 길을 잃고 당황하던 그 시절에


젊은이들 나갈 길을 환하게도 밝혀주고


인민 위한 붉은 마음 심어주던 우리네 모교


아, 그 이름 청사에 길이 빛나라 빛나라


우리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여!


/ 김성룡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중앙인민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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