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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내의 조선사람들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4.17일 08:12
작성자: 김송죽

  독일군에 조선사람만이 아니라 타타르 등 아시아사람도

   (흑룡강신문=하얼빈) 작전 코드 이름이 였던 노르망디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기간 연합군이 거의 삼백만에 가깝게 2870,000명이나 출동하여 영국해협을 건너 유럽의 서부전장에서 벌렸던, 인류력사상 가장 야심 찬 대규모적인 전쟁이였던 것이다. 발생시간은 1944년6월6일 아침 6시30분이였고 8월19일 세나-마른강을 건너서야 전쟁은 비로서 끝난 것이다.

   해상에서는 수천수백척의 전함이 안개를 헤치면서 대안에 접근했고 공중에서는 미국의 중형폭격기와 전투기가 노르망디의 불란서 기지들을 맹렬히 폭겼했으며 독일의 “대서양벽”을 넘은 많고많은 공수부대가 락하산을 타고 공중에서 그곳에 서서히 내렸다.... 그야말로 인류력사상 기록을 올린 가장 대단한 상륙작전이였던 것이다!

   올해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상륙 70주년이 되는데 미디어 인터뷰에서 2차세계대전기간에 노르망디 등륙전에 참가했던 용사들은 다가 말하기를 최초의 독일군인은 독일사람인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아시아 사람의 몰골이였다고 회억했다.

   이는 사실이다. 독일군대가운데는 조선사람도 있고 타타르사람도 있었으며 몽골사람과 인도사람 등 아시아의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일은 력사학가들의 흥취를 자아냈던 것이다. 연구자들은 그 당시의 많은 당안들에서 그 내막을 똑똑히 알아냈다.

   원래 나치독일은 노르망디에서 많은 동양사람으로 구성된 “동양군대”를 폭탄과 탄알받이로 앞에다 내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동양 캠프”건 기개가 높다던 “인도군단”이건 다가 련합군의 광란적인 포탄과 폭탄에 어쩌지 못했으니 멸망에 이른 나치의 운명을 건져낼리가 만무였던 것이다.

   나치스 독일군은 쏘련을 맨처음 들이쳣을 때 쏘련군관병을 많이 포로했다. 그때까지도 나치스 독일은 “열등인종”을 자기들의 군대에 편입시켜 써먹을 궁리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941년 겨울 모스크바까지 박두했던 독일군은 감히 들이치지 못하고 비참히 패배함으로 하여 그들의 번개식 “전격전”은 파멸되였거니와 따라서 제3제국의 "동방정책"도 개변되였던 것이다.

   1942년 1월, 독일연방군은 쏘련의 소수민족중에서 자원봉사를 원하는 자들로 “동방군단”을 만들었는바 그것이 히틀러의 찬성을 받았다. 그리하여 “동방부대”가 이어서 생겨났는데 그것들을 라렬하면 “아르메니아군단” 11개, “아제르바이잔군대” 14개 대대, “그루지야군단” 14개 대대, 알제리인과 체첸인 등으로 구성된 “카프카스 이슬람 군대” 5개 대대, “투르케스탄 군단” 34 대대와 8개 대대의 “볼가 타타르군단”이였다. 1942년 8월 12일, 독일육군그룹은 그것들로 쏘련의 남쪽 칼 미크 자치공화국의 수도 옐리스타를 점령했다. 독일 장교들은 칼 미크지역에 있는 몽골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쏘련을 반대하는 선전을 하여 3000명에 이르는 칼 미크 몽고사람들을 모집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그들에 대해서 시름을 놓지 못했다. 이 부대들이 작전 할 때 반란을 하거나 역습하여 일격을 가할수도 있기때문이였다. 하여 그들은 캠프(营)를 단위로 하여 여러 독일군에다 분산시키고 만 것이다. 그래놓고 독일에서는 그것들을 통칭 “동방영”이라 불렀다. 1943년에 이르러 독일군에 98개의 “동방영”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80개 영이 동부와 발칸전쟁을 치른 것이다. 후에 12개의 캠프(营)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전송되여 가능하게 상륙할 수 있는 련합군을 저항하고 반격하게끔 포치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 독일군 제162보병사단은 독일의 "타자(异类)"였는바 그것이 “투르케스탄사단 ”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많은 병사들이 중앙 아시아 출신이였던 것이다.

   2차대전기간 독일군에서 발간한 <<신호>>잡지에 난 사진들을 보면 그 대부분이 황종인이였다. 그러나 그들 제162보병사는 선후하여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 전장에 나갔을 뿐 프랑스에는 가지 않았던 것이다.

   련합군이 노르망디에 등륙했을 때 맨먼저 교전한 것은 “동방영”

   1944년6월6일의 연합군이 노르망디 등륙전, 그때 해안방어임무를 맏은것은 독일국방군 제243해안방어사(师)와 제709해안방어사(师)에 속하는 여러개의 “동방영”이였던 것이다.

  그때 여러개의 “동방영”이 제709해안방어사(师)에 속하였다. 제709해안방어사를 보면 그 아래의 제739척탄병 연대에는 “동방캠프(영)”이 4개 있었는데 2개 “동방캠프(영)”는 사단장 빌헬름 폰이 직접지휘했던 것이다. 그당시 독일군의 부서를 보면 노르망디지구의 대부분을 “제2류부대”가 맡았는바 제243해안방어사의 정예부대는 경상적으로 동부 전선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련합군이 등륙한지 오라지 않아서 제7391대대 척탄병 연대역시 동부 전선으로 옮겨갔다. 그러다보니 부대주력으로 겨우남은것이 2개의 “동방영”뿐이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투경험이 부족한게 뚜렷한데다 해안방어공사를 구축할 책임까지 졌길래 몇달간 “동양 캠프”와 동일한 시간에 해안 요새를 구축 할 책임이 있다보니 고강도 노동으로 인해 “동방영”병사들의 체력은 많이 떨어졌던 것이다.

   미국의 역사 학자 스티븐 앰브 로즈가 쓴 책 에 기술된 것을 보면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때 두명의 조선국적을 가진 독일군을 포로했다는 것이다. 얼마안되여 그런 포로가 20명이나 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그 포로들이 원래는 다가 전에 일본군에 모집되여 일본군인이 되었다가 1939년에 폭발한, 일본과 쏘련간의 “Suno문한(诺门罕)”전투 때에 쏘련군에 포로되였다는것이다. 하여 심문해본 결과 일본국적이 아니니 일본과 쏘련간에 정전이 되자 일본인 포로는 다 일본에 돌려보냈지만 그자들과 함께 가두었던 그들 조선사람 포로만은 포로로 치지 않았고 그러다가 그들 다가 후에는 쏘련홍군에 가입한 것이라고 밝혔다.

  1941년, 쏘련위국전쟁이 폭발하자 그들도 부대를 따라 전선에 나갔다. 하여 그들역시 적잖은 쏘련사람과 같이 이번에는 독일군의 포로로 되고 만 것이다. 한데 독일군의 전쟁포로영의 열악한 환경에 견뎌낼 재간이 없게되니 그들은 이번에는 또 독일군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1943년에 “동방영”병사로 되어 “동양 캠프(营)”의 노르망디 수비대에 나섯다가 다른사람들과 함께 련합군손에 잡혀 포로병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기구하기가 그지없는 생령들이였다!

   독일군의 그 잡패무리는 상륙한 연합군 해륙공의 입체적인 타격에 얼마 배겨내지도 못하고 손들고말았다. 제709해안방어사의 전쟁보도에 밝혀진 것을 보면 처음의 10일내에 벌써 사망한 것이 4000명, “동방영”의 잔존인원들은 부득불 쉘부르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6월26일, 스리본중장은 자기가 지휘했던 “동방영”의 패잔병 800명과 함께 미국 제9보병에 투항하고말았다. 그 아래의 제243해안방어사 역시 형세가 좋지 않더니 6월말에 이르러는 노르망디 지역의 커랑탄반도 싸움에서 하나도 남지 않고 전멸되고 만 것이다.

   인도군단의 전쟁기여는 제로(빵점)

   노르망디 상륙 약 두달후에 련합군은 또 프랑스 남부에서 “기병행동”을 시작했는데 연합군의 앞에 블록은 히틀러의 “인도 군단”이였다. 그것은 독일군에 포로되였던, 영국 혹은 인도 적을 가진 포로들로 구성된 것이였는데 1943년9월에 불란서에 가서 대서양 연안의 방위를 책임졌던 것이다. 독일군 육군원수 에르빈 롬멜이 이 부대를 몹시중시하여 여러번이나 시찰하고 검열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나치상층의 믿음은 그닥지 않았는바 다른 “동방영”과 같은것으로 여기면서 “인도군단”을 캠프(营)로 뜯어 움직이도록 하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부대는 롬멜의 노력으로 “인도군단”의 주력이라 여겨져 그곳 비스케이의 베이보르도 지방에다 배치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는 그 “인도군단”이 라 카노의 보르도 지역에로 옮겨가 주둔했던 것이다.

   1944년8월15일, 연합군이 프랑스 남부에 상륙하자 “인도군단”은 카노를 시급히 떠나 런던근처에 있는 한 마을로 후퇴했다. 그 도중에 “인도군단”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퇴로가 차단되였고 “인도군단”의 알리칸 중위는 그만 사망된 것이다. 이것이 “인도군단”에서는 첫 번째의 전투사상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루와얼강을 건너 후퇴 할 때에 또 적측의 장갑부대를 만났던 것이다. 연합군에서는 이따위 특수한 “독일군대”는 아주 영 하찮게 여겼던 것이다. “인도군단”은 모든 방법을 다해 위험에서 벗어나려했지만 중도에서 련합군의 지속적인 진공에 시달렸다. 군관 둘이 또 격사됐다.

   1944년겨울, “인도군단”은 알자스에서 독일의 오베트스지로 철퇴했다. 그러다가 1945년5월 독일의 항복직전에 “인도군단”은 스위스로 도망치려하다가 미군의 포위에 드니 그만 그 자리에 무기를 놓고 오솝서리 투항하고 만 것이다.

  육군원수 롬멜이 전쟁에 기여하기를 애써 바랐던 그 “인도군단”은 이꼴로 제로(빵점)였던 것이다. 히틀러마저도 “인도군단”은 세상의 웃음거리라했다.2차대전이 끝났어도 독일군속에 있었던 그따위 “잡패군”의 운명은 갖지 않았는바 “인도군단”의 사람들은 인도에 넘겨져 거기에서 심판을 받았고 “동방영”관병들은 다가 쏘련에 넘겨져 거기서 죽을때 까지 감옥밥을 먹으면서 사상조를 해야했던 것이다.

  아래사진 들에서도 우리 동포 청년전사들의 몰골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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