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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수기]나의 사과추억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04.17일 10:57
흑룡해 설을 쇠고 집 베란다에 쌓여있던 과일이며 음료상자들을 정리하다가 쪼들쪼들 말라든 반박스의 사과를 발견하였다..


해마다 설을 잘 쇠라고 아들이랑 처제들이 사과며 빠나나 같은 과일들을 상자로 들고오다보니 마음껏 먹고도 남아도는 판이다. 저렇게 쪼들어드는 사과는 버리지는 못하니깐 마누라가 또 믹스기에 갈아 쥬스를 만들어 소모할것이다. 사시장철 사과가 남아돈다. 없어서 못 먹던 세월이 배불러 안 먹고 싫어서 안 먹는 세월이 되고보니 그 옛날 사과와 맺은 인연들이 줄지어 떠오른다.


1953년 내가 일여덟살때 우리 집은 흑룡강성과 길림성의 경계지인 록도라는 자그마한 철도역마을에서 살았다. 철도가족이다보니 엄마는 일요일이면 나를 데리고 철도상점에 배급타러 가군 했다.

상점에는 장방형 나무상자의 옆면에 새빨간 사과그림이 그려져있고 그 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쓴 큼직한 상표가 붙은 사과상자가 있었는데 그안의 벼껍데기속에 주먹만큼한 사과들이 묻혀있었다. 사과도 희귀하고 조선글도 희귀하여 인상깊었다. 엄마등에 업힌 동생은 먹을줄 몰랐던지 엄마는 쌀을 사고 돌아올 때면 꼭 나에게 사과 한알을 사주시군 하였다. 내 기억에 그때 돈으로 한알에 1.000 원(지금의10전)이였다. 나는 한쪽 어깨에 자그마한 쌀자루를 메고 한손으로는 사과를 먹으며 엄마앞에서서 신나게 집으로 돌아오군 했다. 그때 이발이 빠졌는지 갉아먹는 사과에 밭고랑을 내면서 맛있게 먹던 일이 잊혀지지 않으며 지금도 그때의 맛이 입안에서 감도는것 같다.

엄마가 언제 또 쌀사러 가자고 부를가 은근히 기다릴 때도 있었다. 하루는 열이 나고 머리가 아파나 학교에 못갔다. 엄마는 맥없이 누워있는 나에게 사과를 깎아주었다. 한쪼각을 방금 삼켰는데 그만 속이 울럭거려 엄마치마에 왁 토해버렸다. 하지만 한참이 지난 후 머리맡에 놓인 사과냄새에 유혹되여 나머지 사과를 다 먹어버렸는데 그날 밤은 무사하여 이틑날 학교로 갔다. 그후부터 내가 골이 아프다 하면 엄마는 《네가 또 사과생각이 나는 모양이구나.》하셨고 나는 의례 군침을 삼키군 하였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60년대초 곤난한 시기에 우리는 기관사인 아버지의 전근으로 연변의 조양천진에 이사왔다. 그때는 돈은 있지만 상품이 너무 적어 부식품이며 과일따위들이 모두 부족하였다. 어느 일요일날, 형님이랑 두 동생이랑 모두 집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나를 불러 터밭에 낼 돼지똥거름 주으러 가자고 하는것이였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거역할수 없어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호주머니에서 사과 한알을 꺼내주면서 얼른 먹으라고 하였다. 그 세월에 어디에서 사과가 생겼는지? 왜 나만 《얼리》는지? 나는 많은 의혹을 삼키면서 그 사과를 《소멸》해버렸다. 후에 생각해보니 그때 아버지는 영양부족으로 손가락으로 다리를 누르면 자리가 깊숙이 나군 하였는데 내가 너무 철 몰랐다.


나는 1964년 8월 돈화현에서 사업에 참가한 후 그곳에서 문화대혁명의 동란을 거쳤다. 1974년 5월, 돈화시조직부의 왕동무와 함께 간부조사차로 대련에 출장간적이 있었다. 그때 대련에는 우리 고장에서 볼수 없는 사과가 많았고 값도 30전좌우였다. 주먹만큼씩 크고 고르며 겉에 새하얀 서리가 덮인 사과는 정말로 희한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와 왕동무는 사과를 10근씩 샀다. 나는 그릇이 없어 보자기에 싸들었는데 기차역에서 그만 보자기 한쪽끈이 풀리면서 사과가 와르르 쏟아졌다. 마치 닭알꾸레미 터진 격이였다. 그때의 사과는 지금 사과와 달리 어쩌면 그렇게도 연하게 사근사근한지... 기차에 올라 왕동무와 둘이서 깨여져 진물이 흐르며 거멓게 변해가는 사과를 밤새껏 군 떨어지게 먹었다. 집에는 금이 가고 검게 변한 사과 4알을 겨우 살려왔는데 어머니와 두 아이 그리고 안해가 한알씩 맛보게 되였다.


내가 돈화공상은행 강동판사처 주임으로 사업하던 80년대초 은행에서는 저금모으기 임무가 컸다. 나는 저축업무를 춰세우려고 어느 일요일 돈화주둔군부대를 찾아갔다. 그때 주둔군의 1호 수장인 류퇀장의 안해 쇼누나가 바로 우리 은행의 직원이였고 나에 대한 인상도 퍽 좋았다.


쇼누나는 류퇀장에게 쑈표(小朴)는 주임인데 사업열정이 높다며 은행 저축사업을 많이 도와달라고 청들었다. 통신원이 사과 4알을 들고 들어와 《보고!》하면서 거수경례를 하였다. 쇼누나는 사과 한알을 깎아주며 나더러 먹으라고 하였다. 나도 사과 먹어본 기억이 몇해 되였는지 알수 없었지만 인츰 집에 있는 어머니와 아이들 생각이 나면서 차마 먹을수 없어 그저 례의적으로 사양하였다. 돌아올 때 식솔이 많고 로임이 낮아 생활이 퍽 어려운 나의 실정을 잘 알고 내 속내를 꿰뚫은 쇼누나가 아이들에게 가져다 주라며 사과 세알을 기어이 넣어주는것이였다.


나는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아이를 보살피는 어머니앞에 사과 세알을 내놓았다. 어머니는 식칼(그때 우리 집엔 과일칼도 없었다)로 사과를 깎아 두 아이에게 주고 당신은 깎아낸 껍질을 씹는것이였다. 한알은 남겨두었다가 출근한 며느리에게 주려는 속심이였다. 나는 그렇게 남기지 말라며 사과를 뚝뚝 잘라서 억지로 권하였다. 두 아이가 정신없이 먹어버리고 어머니도 맛스레 자시는 정경을 보며 나는 경제형편도 어려웠고 상품도 귀하던 세월을 한탄했다. 과일이 그립던 그때의 세알의 사과가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니 안해가 아이 둘을 임신하는 기간 사과 한알도 대접못했으니 남편구실은 불합격이였다.

어느덧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불면서 우리 연변에도 과일이며 모든 부식품들이 풍성해지기 시작했다.


연변사과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룡정의 대소에도 궈광(国光), 푸스(富士),훙황왠쏴아이(红黄元帅), 썅죠(香蕉)따위의 사과들이 나기 시작했다. 1993년 가을 나는 과수전업호인 먼 친척의 청탁으로 사과 100 상자를 팔아주었다. 외지에서 사과 실으러 온 자동차를 안내하여 과수원에 갔을 때 많이 팔아주어 감사하다며 등외사과 한상자를 인사로 주는것이였다. 《감사》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던 그때의 일 역시 나의 사과추억속에 남는다.

2000년을 넘어서면서 시장에는 사과를 포함하여 남방과 해내외의 과일들이 사시장철 풍성하게 팔리고있어 《없어서 못 먹던》일은 영영 력사의 추억으로 남았다. 연변 훈춘에서 나는 맹령사과는 암예방에 좋다는 셀렌이 많이 함유되여 각광을 받으면서 2010년 사과절날 한알에 2000원에 팔리기까지 하였다.


지금의 사과들은 《농약》덕분에 벌레먹은것이 별로 없다. 농약도 전에는 수용성(水溶性)으로 쳤지만 지금은 비물에 씻기지 말라고 지용성(脂溶性)을 치기에 사과표면에 농약잔액이 있어 껍질을 깎아 먹으라고 권장한다. 기실 과일껍질에도 영양소가 많고 특히 귀중한 섬유소가 많기에 우리 집에서는 일찍부터 오존(O³)해독기를 갖추어놓고 과일이며 남새, 육류, 물고기 등을 전부 소독하여 먹는다. 오존소독을 거친 사과는 껍질채로 먹는데 습관되였다. 다만 손님이 오면 례의상으로 깎아서 권한다.


지난 설기간 한번은 손님들이 놀러 왔다고 사과를 한쟁반 깎아놓았다. 어른들이 손님들을 바래고 돌아오니 글쎄 6살짜리 손자놈이 남은 사과쪼각들을 칼로 오리며 이쑤시개로 꿰여 자동차모양의 《걸작》을 만들어놓았었다. 《사과놀이감》 만드는 손자놈의 배부른 장난에 우리는 욕도 못하고 우습기도 하고 놀라웁기도 하여 그 옛날의 사과맛을 되새겼다.


없어서 못 먹던 세월이 싫어서 아니 먹는 세월이 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입이 변했는지? 아니면? 잊혀지지 않는 동년시절의 그 사과맛을 다시 느껴볼수 없다. 과학자들이 써낸 글을 보니 지금의 사과나 감자가 50년전보다 50%의 영양소가 줄어들었다고하니 그 원인도 있는가부다.


아무튼 그 맛이 어떻게 변했더라도 사과는 여전히 과일의 《왕》으로, 애기 첫돌상, 잔치상, 제사상에 꼭 오르는 과일이다보니 우리 식생활과 떠날수 없는 현실이고 우리 집에 늘 있는 영양식품이다.


사과를 먹을 때마다 동년에 사과 사주시던 《엄마》가 생각나고 사과를 볼 때마다 로년의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제사상에는 제일 먼저 사과 세알을 꼭꼭 올린다. 언젠가 나도 저 세상에 가면 사과 세알 대접은 꼭 받을것이다.


/박철원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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