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손호준(62)씨가 승용차를 대기시켜 놓고, 우리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두 달 전 한국 방문 때, 친분관계를 맺었다.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뒤 출발했다. 흑룡강성 치치할시서 내몽고로 가는 협소한 차도를 교행 시 서로가 감속하여 진행 했다. 또 가물거린 가로등 불빛은 주위를 훤히 밝혀주지 못해,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둔 밤길을 뚫어 주었다.
2시간쯤 달려오자, 손 씨께서 이곳이 중국 흑룡강성과 내몽고자치구의 경계지역이지만, 옛날엔 원나라와 금나라의 국경이었다며, 지금도 흙으로 만든 둑이 길게 남았다고 한다.
산언덕을 넘어서니 환한 불빛이 쏟아졌다. 할빈공항서 '내몽고 찰란둔시 성길사한진까지 8시간 동안 먼 길을 달려온 셈이다. 밤늦게 우리 일행은 면소재지의 중심을 관통하여 조선족 거주지역인 '홍광조선족촌'으로 향했다.
손 씨 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곧장 여독을 풀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기상해 주변을 둘러보니 수전(畓)으로 아득히 펼쳐졌다. 더 멀리는 산 모양이 뾰족한 게 아니라 평평하고 나지막했다.
가옥은 붉은 기와와 붉은 벽돌로 지어져 7~9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치 우리 농촌의 자연부락처럼 띄엄띄엄 산재한 모습이다. 우리 농촌은 1반 2반으로 칭하는데, 이곳은 1대 2대라고 부른다.
총 254세대에 900명 살다가 한. 중 수교 이후 '한국 바람'으로 400명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200여 명은 돈벌이를 위해 왕래하고 있단다. 또 210명은 자식들 교육위해 대련 청도 위해 등지로 떠났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가 노인들만 살고 있다. 한국가면서 논농사는 한족들에게 빌려주고 1년에 1상직(1000평)에 중국 돈 8000원(한국돈 150만원) 받는다고 한다. 서로가 유익해 선호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농촌마을보다 순박하고 정감이 넘쳐 나 더 한국적이다. 내가 한국서 왔다고 하니 식사하고 가라며 팔소매를 잡아끈다. 집집마다 남새밭에는 옥수수 고추 오이 가지 들깨 등 심어놓고 찬거리로 만든다.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홍광조선족촌'에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은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 한 후, 대량의 조선인들이 중국 동북 각지로 건너왔으며, 이중 일부 소수는 이곳까지 들어온 것은 1926년 봄, 리관영(평북 출신) 외 56명(11세대)이 길림성으로부터 들어와 땅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짓다가, 1940년 가을, 일본 개척단이 들어와 조선인의 논을 강점하고 협박하는 바람에 그들은 모두 도망치듯 타지로 뿔뿔이 떠나고 말았다.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패망한 뒤에 조선족이 다시 돌아와 벼농사를 지으며 생활한 것이 점차로 커지면서 1958년에 홍광대대를 성립하고 1985년에 '홍광조선족촌'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이주 초기에는 낯선 땅에서의 생활은 비참했지만, 조선족 특유의 근면성과 노력으로 집안 형편이 점차로 나아갔다. 그들은 찰란둔 지역의 여러 민족과 함께 생존과 운명을 함께하면서,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발전시켰다. 특히 조선족들은'벼농사민족'으로 불려졌다.
논농사를 통해 정체성 협동성 조직성이 길러져, 어느 민족보다 응집력과 헌신정신이 강하다며, 또한 논농사에서 비교적 높은 재배방법과 오랜 경험을 쌓았다. 게다가 한전(田) 어업(江) 수공업 등에서도 조선족들만의 독특한 기술을 개발했다.
한편으로 조선족 촌장은 촌민들이 선거에 의해 선출하지만, 촌 당서기는 서류를 제출한 당사자의 주위여론 신임도 충성도 전과유무 성향 등 1년간을 면밀히 조사한 뒤에 이상이 없는 자를 당원들이 선출한다고 한다. 조선족 촌의 당서기는 조선족 출신이 가능하다고 한다. 또 한편 성길사한鎭(한국어. 칭기스칸面)에서는 30개의 작은 마을이 모여, 한개 면을 형성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조선족이 거주한 '홍광촌마을'이다.
조선족들은 대부분 한국을 드나들면서 삶의 질이 높아지고, 경제적 여유가 생겨나서 다른 민족보다 잘 살고 있다며 자긍심이 컸다. 뿐만 아니라 한국서 취업하여 살림살이에 큰 도움이 됐다는 긍정적 생각이 지배적이다. 손 씨는 지인을 통해 찰란둔시서 1995년에 발간한 홍보책자를 가지고와 글 쓰는데 참고하라며 건네준다. 잠깐 내용을 살펴보니, 일본 관동군이 1932년 3월1일 '만주국'을 건립을 선언할 때, 찰란둔시가 탄생한다.
그 당시 민족구성은 한. 만족 33900명 일본인 197명 몽고인 138명 조선족 59명 기타 민족 232명으로 기록되었다. 이미 여러 민족들이 어울러 살았다는 게 흥미롭고 이채롭게 느껴졌다.
우리 선조들의 피가 흐르는 내몽고 땅에서 조선인들의 숨결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도약을 이끄는 동력이 되어, 풍요를 구가하고 행복을 만끽하면서, 자손만대 번창하길 기원한다.
박정필 시인·수필가
인천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