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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에서 뒤늦게야 밝혀진 반일독립운동가 윤낙세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15.08.14일 10:59
독립운동가 윤낙세에 대한 고찰

  (흑룡강신문=하얼빈) 윤낙세(1877 ~ 1929)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1910년대와 20년대에 간도와 러시아를 무대로 반일투쟁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대 초에는 권업회, 기독교우회 등 단체를 통해 군자금 모집 및 반일선전활동을 하였고 10년대 말에는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단에서 연락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경신년대토벌’이후에는 러시아 수이푼(秋豊)일대에서 한족공산당 위생부장, 고려혁명군 외교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반일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에 한국정부는 2013년 윤낙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낙세 독립운동가.

  자료의 부족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윤낙세의 공적은 지금까지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으며 역사의 뒤안길에 가리어 있다. 필자는 광복 70주년에 즈음하여 종래 주목받지 못했던 독립운동가 윤낙세를 통해 1910년대와 20년대 간도 및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해 고찰하려 한다.

  1. 간도로의 이주 및 반일활동

  윤낙세는 1876년 일본에 의해 "강화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877년 조선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하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날로 국운이 기울어지는 조선에서 동년과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민족과 나라를 구하려는 큰 뜻을 지니게 되었으며 반일운동의 터전으로 되고 있었던 간도(1)로 이주하였다.

  오늘날 연변지역의 대부분을 일컫는 간도는 두만강을 사이 두고 조선반도의 북부와 이어져 있으며 1860년대에 이미 조선인의 집단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조선인들의 수전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중국 당국은 이에 대해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고 조선에서는 간도를 조선민족이 이주할만한 福地라고 하였는바 1910년 조선이 일제에 의해 합병되면서 많은 조선인들이 새로운 생활의 근거지를 찾아 간도로 이주하였다. 1908년 간도에 거주한 조선인은 9만 1000명에 불과했으나 1911년에는 12만 7500명, 1912년에는 16만 3천명으로 증가하여 급속한 증가세를 보였다.(2)간도의 개발 및 조선인 집거구역의 형성은 윤낙세를 포함한 많은 반일운동가들이 간도를 활동무대로 선택한 주요 원인으로 되었다.

  1910년대에 간도에서는 여러 단체들이 활동했는데 특히 권업회(勸業會)(3)는 각지에서 토지를 구입하여 농장을 설립하는 것을 통해 반일정서를 가지고 있는 조선인들을 끌어 모았고 교육을 통해 이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경제적 실력을 배양함으로써 추후 국권회복을 위한 실제적인 일들을 하였다.

  상술한 배경에서 윤낙세는 간도에 이주한 후, 1912년 권업회의 명의로 당시의 연길현(延吉縣) 토문자(土門子-훈춘에서 동쪽으로 22-23리 떨어져 있음) 당시 러시아화폐 1,500원에 달하는 121耕의 토지를 구입하여 농장을 설립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인들을 규합하고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4)

  당시 간도에서는 기독교 등 여러 종교단체들도 종교 활동을 통해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는데 훈춘 선인 기독교우회(琿春鮮人基督敎友會)가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훈춘 선인 기독교우회는 1913년에 설립되었고 종교의 전파 및 계몽을 표방하였지만 실제 목적은 반일 정신을 고취하는데 있었으며 1916년에는 회원수가 2천명에 달하는 큰 규모의 단체로 되었다. 윤낙세는 1913년 혹은 1914년에 기독교우회에 가입한 것으로 보이며 1915년 12월 15일까지 과원(課員)으로 활동하였고 당시의 직업은 약업(藥業)으로 표기되었는바 농장을 경영하는 외에도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

  윤낙세는 상술한 단체들을 통해 반일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였으며 1918년 경에는 훈춘현 왕팔발'파'자(王八脖'把'子)에 거주하면서 흑룡강성愛琿縣의 조선인 반일 비밀결사조직과도 연락을 취해 공동으로 반일활동을 도모하였다. 윤낙세는 주로 훈춘지역 반일단체와 애훈현 비밀결사조직과의 연락 및 반일 반일인사들의 규합 등 역할을 하였으며 이르크츠크로부터 총기 수백정을 밀수하여 앞으로의 반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6)

  2. 항일무장투쟁에 투신 - 신민단 및 국민단에서의 활동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 거국적인 3.1운동이 폭발한 후 간도의 용정에서 3월 13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 독립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으며 이는 화룡, 훈춘, 왕청 등 간도 전역에 파급되었다.

  간도의 조선족집거지역에서 온양되고 있던 반일운동은 조선의 3.1 운동의 영향하에 폭발하였는바 용정의 3.13 반일군중집회가 그 발단으로 되었다. 당시 간도는 조선족이 약 76%를 차지하는 집거지역으로 이미 반일투쟁의 중심으로 되었다. 비록 3.13 운동이 군경의 탄압으로 인해 실패하였지만 같은 해 5월 1일까지 간도의 30여개 곳에서 반일군중집회가 50여차 열렸고 8만 1천여명이 참가하였다.(7)



윤낙세의 후손인 윤운걸씨(우 세번째)가 한국에서 열린 '2015년 제2회 호국영령 합동 위패봉안식'에 참가했다

  하지만 1919년 3-4월 사이에 간도를 중심으로 한 반일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실패하게 되며 반일단체들은 무력으로 일제에 대항하게 되는바 많은 반일무장대오가 조직되었다.

  1919년 당시 훈춘현 내에는 여러 단체들이 활동하였는데 대한국민회와 대한신민단이 가장 대표적인 단체였다. 국민회는 동구 대육도(東溝大六道) 아래의 훈춘 평야 및 황구(黃溝)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신민단은 흑정자(黑頂子) 일대 대판령(大盤嶺)의 동쪽 부락 및 라자구(羅子溝)와 동구 초모정자(東溝草帽頂子)에 두 개 곳에 나누어 있었다.

  대한 신민단은 구한말의 신민회를 계승한 단체로서 기독교 장로교파 목사이며 신민회 회원이었던 김규면(金圭冕)을 중심으로 주로 대한기독교(일명 성리교-聖理敎) 신도들이 1919년 3.1운동 직후 간도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이다.(8)1920년에 단원이 200명이 달하는 단체(9)로 발전하였는바 비록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훈춘지역의 주요 반일운동단체로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였다.

  상술한 단체들은 단체 구성원들이 반일무장투쟁에서 활약하는 외에도 당시 간도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들을 통해 반일 선전 및 정찰 등 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바 반일시위 운동이 고조되었던 1919년 경부터 윤낙세, 한경서 등은 일제에 의해 반일운동의 거두로 지목되었으며 이들의 거처는 반일단체의 연락과 정찰, 또는 반일활동을 위한 거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당시 윤낙세는 윤용서(尹龍瑞)·윤인송(尹仁松) 등과 함께 주로 훈춘경내의 동구 초모정자(東溝草帽頂子)의 춘화향(春化鄕) 왕팔발'파'자(王八脖'把'子)에서 대한 신민단(大韓新民團)의 연락부장, 국민단의 총찰로 활동하였다.(10)왕청현 및 러시아에 왕래한 행적도 뚜렷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11)

  3. 러시아 한족(韓族)공산당, 고려혁명군에서의 활동

  1919년 하반기부터 반일시위운동이 간도 및 간도와 조선 국경지대에서의 반일무장투쟁으로 표출되면서 간도를 포함한 해외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주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대규모의 토벌을 계획하였고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하였으며 이를 빌미로 간도에 출병하여 훈춘지역을 중심으로 한 간도지역에 대한 '경신년대토벌'을 감행하였다. '간도대토벌'이라고 불리는 '경신년토벌'로 인해 독립군이 토벌되어 반일운동은 저조기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학살된 조선인은 3만 명에 달했다.(12)

  '간도대토벌'로 인해 간도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당시 조선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던 러시아로 이동하였다. 윤낙세 역시 토벌을 피해 러시아 수이푼(秋豊)으로 이동하였으며 러시아를 무대로 한족공산당과 고려혁명군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토문자(土門子) 오지인 바라바시 북쪽지역에는 반일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왕래하고 있어 인심이 동요되고 있으며 반일사상을 가진 자들의 선전 및 모금은 일본군의 연해주 철병의 시작과 더불어 점차 조직적으로 이루어져 인심이 악화되고 있으며 일본과 중국 관헌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1921년 노령 수이푼(秋豊) 송전관(松田關, 일명 솔밭관)에서 한족(韓族)공산당이 조직되었는데 총사령 부장(部長)에 함경북도 온성군 출신인 최문세(崔文瑞)가 선임되었다. 한족공산당은 군부와 행정부로 나뉘어져 있었느데 군부(軍部) 병졸(兵卒) 150여명, 행정부(行政部) 병졸 약 6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매주 1회 반일 사상을 고취하는 경고문을 살포하여 반일사상을 고취하였고 한족공산당 경무부(警務部)에서는 통행권(通行券)을 발부한 후 통행권을 휴대하지 않은 경우, 소재 지역에서의 여행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한족공산당은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러시아 과격파들과 연합하여 반일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윤낙세는 한족공산당에 가입하여 위생부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13)러시아에 간 후에도 윤낙세는 러시아와 중국경내를 넘나들면서 반일활동을 하였는바 1922년 훈춘현 마적달(馬滴達) 지방에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14)

  1923년 포조(浦潮)공산당 고려부는 훈춘지역에서 당세(黨勢)를 확장하기 위해 한경서(韓京瑞)를 지부장(支部長)으로 지명하여 선전서의 배포 및 연락 등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윤낙세는 주병칠(朱丙七) 등과 함께 훈춘의 왕팔발'파'자(王八脖'把'子)에 내왕하면서 소총 수십자루와 탄약을 마차에 실어 러시아 중국국경을 거쳐 수이푼 지역의 반일단체에 수송해 주고 정보를 수집해 주었으며 선전활동을 하였다.(15)

  그 이후, 1924년 12월 러시아 수이푼과 스찬(蘇城) 부근에 있던 반일단체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으로 개칭되었는데 고려혁명군은 공산주의 이념을 표방함과 동시에 항일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독립군 부대였다. 고려혁명군 내의 정치활동은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지도하였고 윤낙세는 외교부장(外交部長)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윤낙세는 한경서 등과 더불어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하였으며 러시아와 중국경내를 넘나들면서 변경 및 기타지역에서 금품을 모아 총기를 사들이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16)이 시기 윤낙세는 기간 훈춘에 체류하면서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윤낙세, 한경서 등 19명이 일제에 의해 소환하여 조사를 받은 기록이 남아있다.(17)

참고문헌:

  (1) 현재의 용정, 화룡, 훈춘, 왕청지역을 가리킨다.

  (2) 《東北地區朝鮮族革命鬪爭資料彙編》(楊昭全, 李鐵環, 1990년),293면.

  (3) 1911년 5월 이종호(李鍾浩)·김익용(金翼鎔)·강택희·엄인섭 등이 주축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조직한 항일독립운동 단체이다. 권업회는 주로 조선인 지위의 향상과 반일투쟁을 위한 경제적 실력배양에 힘썼으며 조선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4)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2003) 제39권 117면,獨立運動史料(국가보훈처) 중국편⑨ 70면.

  (5)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2003), 제40권 112면,獨立運動史料(국가보훈처) 중국편⑨ 70면,琿春鮮人基督敎友會役員名簿에關한件(1916. 3. 13)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部-在滿洲의部 5.

  (6)排日鮮人의動靜에關한件(1918. 5. 6)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部-在滿洲의部 6

  (7) 《朝鮮族革命鬪爭史》(黃龍國编, 1988), 39면.

  (8) 《现代史资料》(姜德相编) 26,“朝鲜” 2, 177면. <독립운동에 관한 건>(國外日報제104호)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2003) 제41권 197~198면에는 김규만(金圭晩)으로 기록되어 있다.

  (9) 《東北地區朝鮮族革命鬪爭資料彙編》(楊昭全, 李鐵環, 1990년),454면.

  (10)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2003) 198면.

  自決運動團隊및 運動者의件(1919. 5. 8)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部-在滿洲의部 10

  琿春縣東溝지방의情況에關한件(1924. 11. 22),不逞鮮人行動其他에關한件(1924. 12. 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部-在滿洲의部 40

  (11)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67) 제5권 270면.

  (12) 《일본제국주의의 동북침략사》(김기봉, 방영춘, 권립编, 1987), 73면.

  (13)沿海州韓族共産黨의行動에 관한件(1922.5.12)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部-鮮人과過激派3

  (14)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67) 제5권 247면.

  (15) 《朝鮮獨立運動》(金正明, 1967) 제5권 256-257면

  (16)琿春縣東溝지방의情況에關한件(1924. 11. 22),不逞鮮人行動其他에關한件(1924. 12. 4)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部-在滿洲의部 40

  (17)琿春縣東溝지방의情況에關한件(1924. 11. 22),不逞鮮人行動其他에關한件(1924. 12. 4)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部-在滿洲의部 40



  [윤낙세 독립운동가 후손:장손 윤운일 연변총공회에서 근무,현재 퇴직,차손 윤운걸 흑룡강신문사 기자,차녀 윤운실 연변방직공장 기술원.]

  산동연태대학 외국어학원 우영란 교수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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