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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아버지, 고맙습니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2.06.04일 16:42

고향집 동구밖에는 고향과 세상을 갈라놓는 자그마한 강이 있었는데 학교에 가거나 시내로 가려면 이 강을 건너 다녀야 했다. 하지만 장마철이면 물이 불어 다니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언젠가 콩크리트다리가 놓여졌고 사람과 소수레는 물론 식량을 꽉 박아 실은 트럭이 달려도 끄덕없었다. 모든 무게를 말없이 감당하면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다리, 장마가 지고 홍수가 닥쳐와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주는 이 다리를 지날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는 너무나 다리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마을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훌륭한 생산대장이였고 가정의 중임을 떠멘 가장이였고 효자였다.

일찍 열다섯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생활형편때문에 공부를 더는 할수 없게 된 아버지는 어머니와 녀동생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두메산골에서 뼈를 굳혔다. 그러다가 스물여섯에 나의 어머니를 만나 늦장가를 간것은 바로 곤난했던 70년대였다. 그때는 다 같이 큰가마밥을 먹는 세월이라 별로 로동적극성이 없어 누구도 선뜻 생산대장노릇을 하기 싫어했다. 일년동안 쉴새없이 일해도 한공(하루일 표준. 10부가 한공임)에 15전밖에 되지 않아 해마다 빚만 늘어났다. 바로 이때 아버지가 생산대장으로 선거되였다. 《누구나 부지런히 일하면 우리도 잘 살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선전하면서 사람들을 동원하고 로동의 선두에 서서 일을 본때있게 해재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해 한공에 75전이 되였다. 사람들은 기뻐서 야단이였다. 집집마다 빚도 줄어들고 어떤 사람들은 몇십원, 몇백원의 분홍을 손에 쥐여보게 되였다. 아버지께서 생산대장을 한 11년간중 최고로 한공에 1원 5전 되는 해도 있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신체는 몰라보게 축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과분한 요구 한번 제기해본 적이 없었다. 《우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않는다》 고 마을사람들은 어려웠던 시기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였던 아버지를 늘 외우면서 훌륭한 생산대장이라고 말한다.

고모가 시집을 가고 다섯식구가 사는 우리 집에서 아버지는 나와 남동생의 뒤바라지를 하기 위해 억척스레 일하셨다. 80년대에 농촌에서 도거리가 실시되고 나는 대학에 가고 동생은 시중점고중에 입학하게 되였다. 아버지는 우리 뒤바라지를 위해 남의 집 밭까지 양도받아 4헥타르나 되는 밭을 부치였다. 그리고 돼지치기도 하고 장사도 하면서 아버지는 일년 사시절 손발이 놀 사이 없었다.

봄이면 남먼저 밭갈이에 나서고 여름이면 땡볕에 살을 지지면서 김도 매고 후치질도 하고 가을이면 가을걷이에 분망했고 겨울이면 땔나무를 했다. 특히 늦오이철이 되면 아버지는 밤잠을 자지 못했다. 장에 가져다가 팔 오이를 뜯어서는 저녁에 물에다 깨끗이 씻어 먹음직한 오이를 광주리에 담아 수레에 싣고나면 밤 11시, 12시가 되였다. 밤 12시가 되면 아버지는 소수레에 늦오이를 싣고 어머니를 앉혀가지고 도문으로 떠났다. 밤길을 두세시간 가야 장에 도착할수 있었다. 아버지는 늦오이를 팔아서 번 푼돈이랑 모아서 매달 우리한테 보내주셨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우리 기숙사에 와서 돈 300원을 나한테 꼭 쥐여주면서 너무 아끼지 말고 먹을걸 사먹으라고 하셨다. 《아버지, 우리가 돈을 많이 써서 집에 돈이 없지요? 난 집에 돈이 없을가봐 늘 걱정돼요…》 하면 아버지는 《산 사람의 손에 왜 돈이 없겠어. 든든한 아버지한테는 저금도 있으니 근심말아.》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우리때문에 부모들이 집에서 심한 돈고생을 할가봐 늘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는 또 효자였다. 농촌에서 우수한 젊은이를 추천하여 공장에 배치하는 바람이 불때 아버지도 삼봉동석장에 추천받게 되였다. 할머니는 기뻐할 대신 조직에 찾아가 제발 아들을 보내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할머니는 장기환자이고 딸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로동력이 아들 한사람뿐인데 아들이 떠나가면 누가 나를 돌보겠는가 하는 리유때문이였다. 할머니가 아버지의 뒤다리를 잡아당겼지만 아버지는 할머니의 의사대로 고향에 남아 할머니를 돌보았다. 어머니가 시집 온 뒤에도 할머니는 셋째아들인 아버지와 함께 있고싶다고 하여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가 할머니를 모시게 되였다. 아버지는 한마디 원망도 없이 할머니가 아프면 약을 사드리거나 병원에 모시고 갔다. 할머니는 세상을 뜨기 4,5년전부터 치매증에 걸려 방에 한가득 재간을 피우는가 하면 남몰래 집에서 나가 정처없이 길을 헤매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힘들어할 때면 가끔 할머니의 방을 청소하고 겨울날 도끼를 가지고 강변에 나가 얼음을 끄고 할머니의 빨래도 해오군 하셨다. 한번은 일밭에서 돌아와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또 할머니를 찾아떠났다. 이집저집에도 없고 나중에 아래마을 도랑에 빠져 흙감탕이 된 할머니를 찾아 업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국 23년동안 할머니를 모시다가 나중에 하늘나라로 보내셨다.

아버지는 평범하고 진실하고 억센 로동인민의 훌륭한 품성을 지니셨다. 나는 아버지를 한없이 존경한다. 한평생 손에서 일을 놓을세라 일과 동무하면서 억세게 살아오신 아버지, 자식과 부모님을 위하여 모든것을 바쳐 살아오신 아버지, 아버지의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지도 이슥하다…

나는 오늘도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 서서 말없이 다리를 바라본다. 다리 저편에 아버지가 서계시는것만 같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거머쥔 잘난 아버지는 아니지만 다리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 모든 무게를 말없이 감당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아버지, 자식에게 커다란 정신적재부를 안겨준 아버지께 진심으로 드리고싶은 말 한마디가 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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