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투어가우주에 사는 테오 마이어의 하루 일과는 휴대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와이파이가 꺼졌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시중에서 파는 전자파 차폐막이 쓸모없다는 것을 몰랐던 몇 년 전까지 그는 와이파이 공유기를 차폐막으로 덮어놓은 뒤 잠을 자곤 했다. 지난 9월5일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만난 마이어는 “의사들로부터 인체가 회복되는 수면 시간만이라도 와이파이를 꺼놓는 게 바람직하다는 얘기를 들은 뒤 보통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는 타이머를 설정해 와이파이를 끄곤 한다”며 “휴대전화도 잠잘 때뿐 아니라 필요가 없을 때는 대체로 비행기 모드로 해놓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위스 사람들은 특히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전자파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이가 많다”며 “주변에서도 절반가량은 잘 때 와이파이를 끄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9월 초 찾은 스위스에서 만난 시민들은 대체로 전자파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다. 생활편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하긴 하지만 유해화학물질이나 방사선과 마찬가지로 전자파 역시 될 수 있는 한 노출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태도였다. 마이어는 “스위스 시민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건강에 신경을 더 쓰는 편이고, 건강에 해로운 오염물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향이다보니 전자파에도 신경을 더 많이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5월과 9월 스위스 곳곳에서 열린 5G 반대 시위는 스위스 시민들의 전자파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9월21일 베른의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3000명이 넘는 스위스 시민이 모여 5G 기지국 설치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는 5G 설치에 반대하는 주제로 이뤄지고 있는 시민들의 단체행동 중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였다. 이탈리아나 독일 등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주제로 집회가 열린 적이 있지만 참가 인원은 수십명에서 수백명 수준에 불과했다. 그만큼 많은 스위스 시민들이 5G 기지국 설치 반대 주장에 공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5G 기지국의 전자파가 기존의 이동통신 기지국보다 인체와 환경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5G 도입은 인권 침해 범죄”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규명되기 전까지 5G 도입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집회를 주도한 시민단체와 의사단체 등은 5G 기지국 설치 중단을 위해 국민투표도 추진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1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으면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스위스에는 지난 9월 현재 334개의 5G 기지국이 설치돼 있으며 일부 주에선 시민들의 요구로 기지국 설치가 연기된 상태다.
스위스 시민들의 5G 기술 도입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스위스의 한 온라인 시장조사 사이트가 지난해 5월과 지난 5월 조사한 5G 도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는 긍정적 입장 78%, 부정적 입장 22%였다. 그러나 올해에는 긍정적 입장 56%, 부정적 입장 44%로 부정적 입장이 배로 늘었다.
5G 도입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동통신과 전자파 노출에 대해 현재보다 강화된 규제를 만들어야 한다며 서명운동에 돌입한 상태다. 내년 4월15일 서명운동이 마감되는 국민청원에는 대중교통에 5G 무선장비가 설치되지 않은 좌석을 마련하고, 공공건물에 전자파에 노출되지 않는 공간을 만드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 전자파 과민증을 겪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료 상담센터를 만들고 이동통신 기지국 등을 설치할 때 반경 400m 이내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 등도 담겨있다.
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