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시 하남가두 백풍사회구역 공안아빠트단지에서 살고 있는 나의 이모 박오복에게는 자랑거리도 많다. ‘선진사업자’, ‘우수공산당원’등 영예증서와 상패들이 수두룩하다.
이모는 1932년 12월 왕청 향판(대성)에서 7남매중 막내로 태여났다. 1948년 12월 류수하소학교를 졸업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왕청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가난했던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말았다.
90세 넘는 이모 박오복
새중국의 탄생과 더불어 1949년 11월에 이모는 청년단에 가입했고 추천받아 촌학교에서 잡일을 하게 되였다. 교원이 부족할 때면 이모는 1학년 학생들에게 어문과 수학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1950년대초 재직원 학습을 거쳐 현중심사의 정식 종업원이 된 이모는 맏며느리로서 집안 살림을 잘 가꾸는 한편 사업을 잘해 1959년 11월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공안 부문에서 사업하는 이모부가 여기저기 자주 전근하게 되자 이모는 선후로 도문의약공사, 연길시 국영식당, 연길복무청사 등 단위들에서 사업하다 정년퇴직하였다. 1989년 연길서시장에서 옷장사를 하게 된 이모는 약소군체들을 접촉하는 가운데 이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고 사랑의 손길을 보냈다.
당시 딸 하나 있는 지체장애인 김미화 부부는 매대도 없이 대리판매를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이모는 주저없이 자기의 매대 절반을 무료로 넘겨주고 이들이 단독으로 장사를 하게 했다. 이모는 보따리를 이고 다니며 힘들게 도매해온 옷을 김미화에게도 넘겨주어 팔도록해 이들의 수입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과외보도반을 꾸리는 조카에게 김미화 딸을 맡겨 무료로 보도받도록 했는데 그의 딸이 대학에 가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서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17년 동안 이모는 애심행사에 한번도 빠짐없이 참가했으며 페품을 주어 판 돈을 사회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 뿐이 아니다. 이모는 코로나19가 발생한 당시 방역지원에 쓰라며 500원을 기부하고 당창건 100돐을 맞으며 당비로 1,000원을 바치기도 했다.
이모의 일상생활에는 신문, 잡지를 빼놓을 수 없다. 90세 넘는 오늘에도 이모는 로익장을 자랑하며 잡지를 꺼내 본다.
/김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