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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념비(56)—흑산대호산 저지전(상편)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02.26일 07:55
1948년 9월말, 료심전역이 개시되자 동북야전군 각 종대는 신속히 금주방향으로 이동하였다. 뒤늦게 주둔지를 떠난 동북야전군 10종대는 신민지역에서 1종대 3사와 회합한후 새로운 명령에 따라 심양으로부터 출동한 국민당의 서진병퇀을 견제하게 되였다.

한달 남짓한 동안 10종대는 료요상이 거느린 국민당 10만 서진병퇀을 끌고 드넓은 료서지역에서 기동령활하게 싸왔다. 그들은 적군을 만나 조금 싸우다가 곧 후퇴하였으며 기회를 기다리다가 고립된 적을 하나하나 제거하였다.

료요상은 장개석의 엄명을 어길수 없어 10만군사를 이끌고 심양을 빠져나왔지만 포위된 금주를 구하려 하지 않고 계속 눈치만 보고있었다. 그는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서진할것인가 아니면 위립황의 명령에 따라 심양으로 돌아갈것인가 또 영구쪽으로 길을 헤쳐 바다로 도주할것인가를 두고 계속 망설이고있었던것이다.

10종대의 유인전술에 끌려 료서지역에 들어선 료요상은 10월 13일 창무를 점령하고 금주에 집결한 동북야전군의 보급선을 차단했다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곧 금주가 함락되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료요상은 무모하게 금주로 진격하지 않은것을 다행으로 생각했고 또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를 고민하고있었다.

반년 남짓이 큰 싸움을 하지 못한 10종대 장병들은 금주가 해방되였다는 소식을 듣자 더욱 속이 탔다. 그들은 꿈속에서라도 통쾌하게 적과 싸우고싶었던것이다.

10월 17일 오전, 국민당군은 신민부근에서 10종대 30사 89퇀의 진지를 공격하였다. 89퇀 장병들은 적의 공격을 세차레 물리치고있을 때 부근의 88퇀과 90퇀이 반격을 가해 1000여명 적을 소멸하였다. 하지만 상급의 명령은 역시 철수였다. 그리하여 10종대 장병들은 흑산, 대호산부근에 도착했다. 이제는 더 후퇴할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료요상의 서진병퇀이 금주로 공격하든지 아니면 심양이나 영구로 철수하든지 반드시 경유해야 될 요새였던것이다.

료동의 중요한 교통요새 신민.

10종대 30사 련지도원 김응삼.

10종대 30사 89퇀의 련지도원으로 있었던 반석의 김응삼로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응삼) 《료서작전이 시작되여 행군하여 신민이 아니라 신립툰으로 가서 거기서 전투 한번 하고 후퇴를 하는데 한 2백리 후퇴한것 같습니다. 흑산현에서 우리는 대호산에 있고 89퇀은 대호산과 흑산현성이 린접한 곳에 자리잡았습니다. 흑산은 28사, 대호산은 우리 30사가 지켰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호를 파고 작전준비를 하는게 처음이였습니다. 뭔가 하면 전호가 산병호로부터 패에서 련으로, 련으로부터 영으로 규모가 넓어졌으며 전호너비가 1.5메터, 깊이가 1.6메터여서 상병원을 멘 담가대도 마음대로 다니게 만들었습니다. 그냥 파고있었습니다. 료요상군이 창무를 공점했기에 동복을 공급받지 못해 몹시 추운 고생을 하였습니다.》

금주와 장춘이 련속 공산당의 손에 넘어가자 장개석도 최후발악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한달 남짓이 대규모의 병력이동과 치렬한 접전을 거친 공산당부대는 지칠대로 지쳤을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동진과 서진의 전략을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고 동북의 문호인 금주를 공략해야만이 동북의 수십만 병력을 관내로 철수시킬수 있었기때문이다.

일본이 투항한 후 장개석은 미얀마작전경험이 있을뿐만 아니라 미국제 무기로 무장된 최정예부대를 동북에 파견했었다. 국민당군의 5개 주력중 신1군과 신6군이 모두 동북에 파견되였던것이다. 그는 이 최정예부대가 그냥 소멸되는것을 원치 않았다. 장개석은 두률명을 심양에 파견해 작전을 감독하게 하고 금주탈환에 최선을 다할것을 서진병퇀 사령인 료요상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료요상은 동북에서의 국민당의 실패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그는 금주를 공격할것이 아니라 심양이나 영구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디로 철수하든지 반드시 흑산-대호산을 지나야 했다. 그러니 흑산-대호산작전은 그에게 있어서 생사가 달린 전투였다.

금주를 해방한 후 사령부벽에 붙은 작전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있던 림표사령원은 료요상 서진병퇀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흑산-대호산의 지형과 금주의 상황을 비교하던 그는, 과감히 료서대작전을 펼쳐 동북의 마지막 국민당주력인 료요상 병퇀을 소멸할 웅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 웅대한 작전계획을 완수하려면 흑산-대호산부근에서 활동하고있는 10종대가 금주부근의 동북야전군주력이 모두 당도할 때까지 료요상 병퇀을 반드시 저지해야 했다.

동북에서 최후의 결전을 진행하고있는 국공량당 수뇌부는 모두 흑산-대호산을 눈박아보고있었다. 흑산-대호산지역에서 동북국민당군 최정예부대인 료요상병퇀 10만 대군을 막아싸울 동북야전군 10종대는 방어전에 능해 《철혈부대》로 소문난 부대였다. 비록 1947년 10월에야 야전군 10종대로 편성되였지만 소속된 각 부대는 제1차 장춘쟁탈전, 림강보위전, 황화산전투, 백룡산전투, 공주령전투를 치른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지고있었다.

10종대 28사는 동북민주련군 총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던 팔로군 359려단을 주축으로 편성되였다. 이 부대에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에서 보낸 대량의 조선족장병과 목단강지역에서 토비숙청을 하던 조선족부대가 포함되였다.

10종대 29사는 장춘쟁탈전에 참가했던 장춘과 길림지역 여러 민족 청년들로 조직된 부대였다. 때문에 29사에는 장춘과 길림지역 조선족청년들이 대량 포함되였다. 그리고 동만독립사를 개편한 10종대 30사는 조선의용군 제5지대를 바탕으로 확대편성된 유명한 조선족퇀을 포함해 대량의 연변지역 조선족장병들을 포함하고있었다.

1948년 10월 21일 밤, 동북야전군총부의 명령을 받은 10종대 사령원 량흥초는 즉각 여러 사장들을 불러놓고 작전회의를 열었다. 아군은 10종대 3개 사단과 1종대 3사, 료남독립 2사를 합쳐 5개 사단의 병력으로 10만에 달하는 막강한 적군을 저지해야 했다. 상급에서는 흑산-대호산부근에서 료요상병퇀을 3주야 저지하면 곧 승리한다고 지적하면서 목숨으로 진지를 지킬것을 요구했다.

흑산-대호산은 료서지역에 길게 뻗은 의무려산(医巫闾山)산맥의 한 부분이다. 해발 800여메터에 달하는 길게 뻗은 의무려산산맥은 흑산-대호산지역에 와서 해발이 갑자기 100메터 정도로 낮아졌기때문에 이곳은 자동차, 땅크, 대포로 무장한 대병퇀이 통과할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되였다. 산맥을 에돌아 대호산부근으로 나가려면 60킬로메터 길게 뻗은 소택지가 있기때문에 그곳으로는 대부대가 지날수 없었다.

흑산저지전 전략지도.

싸우고있는 동북민주련군 장병들(자료사진).

흑산저지전 전적비.

101고지의 전적비.

10종대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각 사단은 신속히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주요 방어임무를 맡은 28사 82퇀과 83퇀은 대백태자(大白台子)에 견고한 진지를 만들고 또 길목에 반땅크호와 함정을 파놓았다. 하지만 흑산현성동부의 101고지 수비임무를 맡은 84퇀은 큰 곤난에 봉착했다.

흑산주변에서 가장 높은 101고지는 흑산현성과 대호산을 한눈에 굽어볼수 있는 중요한 진지였지만 산이 모두 암석으로 되여 도저히 전호를 팔수가 없었던것이다. 곡괭이로 내리치면 그냥 불꽃만 튕길뿐 암석땅은 끔쩍하지도 않았다. 무진 애를 써봐도 그렇다 할만한 전호를 팔수 없게 되자 지휘원들은 현성으로부터 대량의 모래주머니와 목재, 철근을 가져다 겨우 방어진지를 구축해놓았다.

10월의 동북은 한류가 드닥쳐 밤기온은 령하 11도까지 내려갔다. 창무가 료요상에게 점령당하면서 후방의 보급품이 전선으로 수송될수 없었기때문에 이때 전사들은 모두 혿옷으로 지내며 추위에 견뎌야 했다. 하지만 전사들의 전투적 열의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동북야전군 10종대 28사 83퇀 3영 8련의 지도원 김교진은 회억록에서 이렇게 적고있다.

《10월중순에 우리는 흑산에 도착했다. 이때 우리 장병들은 료요상이 이미 그물에 걸린 고기신세로 되였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전사들은 누구나 할것 없이 드높은 전투열의를 안고 싸움을 청원했다. 각 반과 패에서는 모두 청원서와 립공서를 써서 상급에 바쳤다. 그때 련장 량생옥동지가 병원에 있었기에 내가 전 련을 대표해 영 당위원회에 청원서를 바쳤다.

청 원 서

하루속히 혁명을 완수하고 전 중국의 로동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8련 장병들은 영 당위원회에 전투임무를 청구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구비하고있다.

첫째, 우리 련은 56명 당원과 43명 열성자를 가지고있으며 28명 투탄수와 11명 저격수를 가지고있다.

둘째, 우리는 적의 손에서 빼앗은 미국제 기관총과 자동보총이 있다.

셋째, 우리는 장가루와 백룡산에서 싸운 경험과 교훈이 있다.

이러한 조건을 구비한 우리는 어떠한 적과 싸워도 이길 신심이 있다.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임무를 줄것을 영 당위원회에 청구한다. 우리는 기필코 임무를 완수할것이다.

8련 전체 장병 대표 김교진

나는 이 청원서 초고를 지금까지도 간직하고있다.

10월 23일 새벽에 영장과 교도원은 각련 련장과 지도원을 데리고 영부에서 5리쯤 떨어진 사단부에 갔다. 나는 병원에서 갓 출원한 량생옥련장과 함께 사단부로 갔다.

사단부에 도착하니 하경적사장이 〈흑산을 사수하고 진지와 생사를 같이 하라!〉는 동북야전군 사령부의 전문을 전달하고 직접 전투명령을 내렸다.

사단부에서 회의를 마치고 련에 돌아오니 새벽 2시가 넘었다. 하지만 련의 전사들은 누구도 자지 않고 련부 마당에 모여 전투임무를 기다리고있었다. 그러자 련장과 나는 곧 전투동원을 진행하기로 했다. 량생옥동지는 먼저 적정을 설명하고나서 〈전투가 곧 시작됩니다. 우리 사단은 명령을 받고 흑산에서 료요상병퇀이 도주하는것을 막게 되였습니다. 금주로부터 오는 형제부대들이 와서 료요상병퇀을 포위, 소멸할 때까지 우리는 진지를 사수해야 합니다!〉련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나서 주변의 전사들을 바라보면 힘차게 말했다. 〈동지들, 상급에서는 가장 어려운 임무를 우리 련에 주었습니다. 우리는 대백태자를 3주야 지켜 싸워야 합니다!〉 전사들은 명령을 듣고 모두가 기뻐하였다. 그들은 〈꼭 임무를 완수하고 전공을 세울것입니다!〉라고 힘차게 대답했다.》

1948년 10월 24일, 흑산-대호산에 당도한 국민당군 료요상병퇀은 곧바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민당군은 막강한 포병을 조직해 포사격을 가했고 시탐적으로 부분적 병력을 파견해 이곳저곳 공격했다. 진지는 삽시에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국민당군은 28사가 수비하고있는 대백태자진지를 공격하기 위해 집중포사격을 가했고 71군 272퇀을 동원해 아군 28사 83퇀 3영 진지를 공격했다. 그리고 4개 영의 병력을 집중해 29사 86퇀을 공격해 치렬한 접전을 치렀다. 또한 국민당군 신6군은 30사 진지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였다.

이날 오전, 시탐공격을 마친 국민당군은 드디어 주요한 공격방향을 가장 중요한 흑산 101고지로 돌렸다. 공방전은 시작부터 아주 치렬하였다.

101고지부근에서 전투상황을 목격했던 30사 89퇀의 련지도원 김응삼로인은 이렇게 회억하였다.

(김응삼) 《상급으로부터 결심이 아주 컸습니다. 동북인민해방군 총부로부터 각 종대에까지 금주를 해방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시 방어전을 해야 했고 심양에서 나오는 료요상부대를 방어해야 했습니다. 28사가 지키는 101고지는 바로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101고지라는건 등고선을 말하는데 해발 101메터의 작은 산입니다. 흑산에서 큰 산에서 내려오는데 앞은 개활지였습니다.

료요상병퇀이 평지로부터 공격해오는데 포탄이 몇천발이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포탄을 보니까 그부근의 한개 영이 하루사이에 녹아났습니다. 그 이튿날은 다른 한개 영이 나가고 뺏기우고 그걸 밤에 나가 다시 빼앗구, 포탄이 많이 떨어질 때 한 2만발이 떨어졌습니다. 료요상은 직계부대이니 무기장비가 그렇게 강하고 미얀마에서 작전하던 부대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루 싸우니 내가 기억하기에는 사흘 싸웠는데 우리 앞에 적정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1영이 거기 가서 지원하라 합니다. 부영장이 정훈일이라고 그분이 우리를 거느리고 달려갔습니다.》

흑산현 렬사릉원의 강철8련 립공계획서.

흑산현동부 여러 고지를 수비하고있는 28사 84퇀 각 부대는 련속 세차나 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놈들은 101고지와 부근의 92고지앞에 수백명 시신을 남겼지만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12시쯤되여 국민당군은 재차 공격을 가했다. 놈들은 101고지를 향해 집중포사격을 했을뿐만아니라 4개의 폭격기를 동원해 무차별 폭격을 가했으며 수천명 돌격대를 조직해 네번째 공격을 발동했다. 101고지는 불바다에 잠겼고 84퇀 2영의 대부분 장병들이 희생되였다. 4련 진지에는 지도원을 비롯해 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고 탄약이 떨어지자 총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돌입해 10여명 적을 찔러넘긴 후 장렬히 희생되였다.

/중앙인민방송국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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