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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에 대한 단상/김관웅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09.08.14일 12:39
김관웅

모택동은 전쟁의 항가리수(行家里手)-전문가요 천재였다. 낡은 국가기계를 파괴하는 전문가였다.

모택동은 맑스주의 폭력혁명의 리론을 중국의 실정에 알맞게 적용하여 중국의 국정에 부합되는 무장투쟁로선을 채택하였다. 이미 레닌에 의해 10월혁명의 경험이 있었지만 결코 교조주의적으로 레닌이 걸었던 길을 뒤쫓아 가지 않고 스스로 중국의 실정에 맞는 무장투쟁의 길을 개척하였다. 러시아 10월혁명처럼 도시에서의 폭동을 통한 정권탈취가 아니라 광범한 농촌을 장악하고 나중에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여 종국적으로 전국의 정권을 탈취하는 무장투쟁로선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은 무장대오를 이끌고 산간벽지 정강산에 들어가 혁명근거지를 건립하였고 1935년 준의회의에서 중공의 지도권을 장악하게 된 후에는 중국혁명을 승리에로 이끌어왔다. 1949년 10월 1일, 새로운 국가기계 -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기에 “모주석만 따르면 승리하고 모주석을 따르면 행복하네”라고 문혁시기에 불렀던 노래말은 전쟁시기의 모택동에게는 완전히 부합되였다. 모택동의 중국혁명의 불멸의 기치였고 백전백승의 거의 "신(神)"적인 존재이였다.

이처럼 독창적인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하고 그것을 성공시켜왔던 모택동이였기에 맑스-레닌주의를 교조화 하는 것을 가장 반대했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기계를 건설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국태민안(國泰民安)의 나라를 건설하는 면에서 모택동은 전쟁의 천재를 발휘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전쟁과 경제건설은 아주 다른 두 가지 분야였기 때문이였다. 황차 모택동은 경제학을 전문적으로 연구를 해온 경제전문가도 아니요, 나라를 건설해본 경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토록 교조주의를 반대했던 모택동이였지만 “쏘련의 오늘이 우리의 래일”이라고 하면서 이미 사회주의 국가를 건립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하고 있는 쏘련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의 전쟁경험을 경제건설에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모택동은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소유제 면에서 단일한 공유제구조(국가소유를 그 형식으로 하는 전민소유제와 쏘련의 집단농장을 그 조직형식으로 하는 집단소유제)이고, 국가로부터 실시하는 통일적인 모든 것을 망라하는 계획경제(전 반 사회의 경제생활을 모두 국가에서 통일적으로 계획하고 배치하는 경제제도)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는 쏘련의 사회주의 패턴이 모택동에게 준 심각한 영향의 집중적인 반영인 것이다.

바로 상술한 쏘련패턴의 사회주의에로 이행하기 위하여 모택동과 그의 수하의 중공지도자들은 오래 동안의 탐색을 하여 왔다.

1949년 10월, 건국 후부터 1953년까지 중국에서의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에 관한 모택동과 류소기 이 두 당대의 두 령수인물의 생각은 완전히 같았다. 즉 너무 조급하게 과도를 하지 말고 신민주의의 질서를 공고히 하자는 것이였다.

그러면 모택동은 신민주의단계를 얼마 동안이나 예상했는가? 1949년 건국초기만 해도 모택동은 중국에서의 신민주주의단계는 적어도 30년 동안은 지속되여야 할것이라고 예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변하고야 말았다.

1953년 4월, 모택동은 “10년 내지 15년 혹은 보다 긴 시간 내에 국가의 공업화와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 공상업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를 기본상에서 완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신민주의단계를 30년으로부터 절반이상이나 단축시켰던것이다. 모택동의 이런 조급정서는 1953년 이후부터 분명하게 표현되기 시작했다.

1953년 12월, 모택동은 과도시기의 총로선을 다음과 같이 표술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부터 사회주의적개조가 기본상에서 완성되기까지를 과도시기라고 한다. 이 과도시기에 있어서의 당의 총적 로선과 총적 임무는 상당히 긴 시기내에 점차 국가의 사회주의 공업화를 실현하고 아울러 점차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공상업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를 실시하는 것이다. 이 총로선은 우리의 제반 사업을 비춰주는 등탑으로서 제반 사업이 이를 리탈한다면 우경 혹은 좌경 오유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후의 실천은 모택동이 주로는 사회주의에로 빨리 과도해야 한다는 조급정서로 인해 급진적인 좌경 오유를 범했음을 보여준다. 모택동은 농업합작화운동을 점진적으로 추진해 나가자고 주장한 등자회(鄧子恢)를 “포격(砲轟)"하였고, 조급정서를 반대하고 농업합작화운동을 천천히 보아가면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우경“이요, “종발아낙네들의 걸음걸이”요 뭐요 하면서 닦달질하였다. 모택동의 절대적 권위에 눌려 류소기, 주은래, 등소평을 비롯한 당중앙의 온건파들도 어쩔 수 없이 모택동의 주장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의 농업합작화와 인민공사의 실천은 등자회(鄧子恢)의 주장이 옳았음을 증명하였다. 진리는 많은 경우에는 소수인들에게 있다. 등자회는 당시 당중앙에서 소수였지만 진리를 대표하였다.

모택동에 의해 너무나 급속하게 추진된 사회주의적개조의 완수, 특히 인민공사화와 대약진의 모택동의 이런 좌경오류와 함께 전쟁문화심리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료심전역, 평진전역, 회해전역 이 세 차례의 대회전(大會戰)을 거쳐서 거퍼 4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내에 전국의 정권을 손안에 넣었듯이 대약진 같은 전민적인 대회전을 통하여 락후한 중국의 경제를 일신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에서는 30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신민주주의 단계는 거퍼 10년도 연장도지 못하고 거퍼 5,6년 사이에 직접 사회주의에로 과도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중국은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한 경제적인 기반을 별로 갖추지못한 채 사회주의사회 심지어 공산주의시회에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경제법칙을 무시하면 경제법칙의 징벌을 받게 되는 법이다. 인민공사화와 대약진운동 뒤에 나타난것은 3년 대기근이였고, 이 3년 기근 속에서 무려 2천여만 명의 민초들이 굶어죽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중국 땅에 재현되였다. 여기에서 자신을 반성했더라면 그래도 만절을 확보할 수 있었겠지만 모택동은 사회주의교육운동을 강행시켰고 끝내 착오적으로 문혁을 발동하기에 이른다. 좌적정치로선의 가장 맹위를 떨친 10년 “문혁”을 거쳐서 중국의 경제는 거의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 당대 력사와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력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생산수단의 공유제를 유일한 경제토대로 삼든지 모든 것을 망라한 계획경제를 실시하던지, 쏘련의 사회주의 패턴을 본보기로 삼았던지 모두 중국의 국정에 부합되지 않았으며, 중국의 실제에 근거하여 창조적으로 신민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 이행하는 구체 로선과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패턴을 탐구하는데 불리했던 것이다.

야심가 림표가 "모주석의 말씀은 한 마디가 만 마디를 당한다"고 뻥튀기를 하고, "모택동사상은 당대 맑스주의의 최고봉"이라고 춰올리고, 모택동을 "수백년만에 하나 나올까말까한 천재"라고 치살렸지만 모택동은 결코 모든 면에서의 천재는 아니였다. 모택동은 확실히 전쟁의 천재, 파괴의 천재였다. 건국의 영웅이요 제일 공로자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건국후의 경제건설과 치국(治國)의 천재는 아니였다. 만일 모택동이 워싱톤처럼 독립전쟁이 끝난 후 두기의 대통령으로 만족하고 격류용퇴(激流勇退)를 했듯이 1956년 8차 대회에서 올바른 정치로선을 선택한 후에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더라면 아무런 흠도 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만절(晩節)을 확보했을 것이다. 전쟁, 혁명, 파괴의 천재로 남았을 것이다.

태양에도 흑점이 있는데 신이 아니고 인간인 이상 누가 결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인간인 이상 모택동도 례외일수 없다. 모택동의 만년의 오유는 그저 무위(無爲)로만 끝난 것은 아니다. 등소평의 말처럼 “모택동의 만년의 좌경 오유가 주는 뼈아픈 교훈은 중국이 드팀없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데 대단한 작용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하는 것이리라.

2008년 11월 20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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