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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 김관웅

[중국조선족문화통신] | 발행시간: 2012.02.09일 09:47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

-13억 한족(汉族)을 사례로 하여

김관웅

차례:

1. 동물세계의 코끼리와 흡사한 한족

2. 한족은 어떻게 형성되였는가?

3. 순종 한족은 어떻게 생겼었는가?

4. 순종으로서의 한족은 이미 사라졌다

5.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

1. 동물세계의 코끼리와 흡사한 한족



중국의 문화언어학의 개척자인 북경대학 교수 라상배(罗常培)는 일찍 1950년에 “중화민족은 원래는 많은 부족을 융합하여 이루진것이다”[①]라고 지적한바 있는데, 여기서 “중화민족”은 바로 한족을 지칭한것이다. 1955년 4월 25일, 모택동은 중공중앙 정치국확대회의에서〈10대 관계를 론함(论十大关系)〉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발표하여 “한족의 인구가 많은것 역시 장기간 많은 민족의 혼혈로 형성되였다(汉族人口多,也是长时期内许多民族混血形成的)”고 보다 명확하게 지적한바 있다.

1970년대부터 중국에서 1가구 당 자식 한명씩 낳는 산하제한정책을 국책으로 정하여 강력하게 실시하는 바람에 전 세계 인류 총인구에서 한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하강선을 긋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중국의 인구는 전 세계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사실 14억을 웃도는 중국 총인구에서 한족 인구가 92%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한족은 당시나 지금이나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이다. 쉽게 말하면 이 지구상의 사람들 중 4,5명 당 한 명 꼴로 한족이라는 말이다. 한족이 손에 손을 잡고 늘어선다면 지구를 여덟바퀴를 에돌수 있다고 한다.

중국의 56개 민족의 중의 일원으로 된 어른춘족(鄂伦春族), 허저족(赫哲族) 같은 만명 미만의 소수민족에 비하면 한족은 그야말로 높은 산이나 깊은 바다 같은 존재이며, 유럽의 룩셈부르크 같이 10만명 미만이거나 중동의 카타르 같이 백만미만의 소국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코끼리와 쥐의 비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사 프랑스, 독일, 한국, 월남 같은 중등 규모의 나라들이라고 해도 그 인구는 하남, 산동, 사천, 광동 같은 중국의 한개 성의 인구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한족의 덩치는 이런 중등 규모의 인구를 가진 나라나 민족에 비해도 코끼리 대 여우, 늑대, 노루, 사슴 같은 꼴이라고 할수 있다.

한마디로 한족(汉族)은 세계 인류사회에서 마치도 동물세계의 코끼리 같은 존재하고 할수 있다.



2. 한족은 어떻게 형성되였는가?



한족은 중국 대륙과 대만을 위수로 하여 동남 아세아와 북아메리카 그리고 유럽 등 세계 각지 160여개 나라에 분포되여 있다. 이를테면 싱가포로의 총인구의 77%, 말레시아 총인구의 56%를 차지한다. 중국 대륙에서 한족이 총인구의 92%, 대만에서는 총인구의 98%,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각각 총인구의 95%와 97%를 차지한다. 전 세계 160여개 나라에 널려있는 화교의 총 인구는 4천만명에 달한다. 화교만 해도 어지간한 중등 규모의 나라나 민족의 인구보다 많다.

이처럼 한족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으로서 이미 13억을 넘어섰다. 명실공히 동물세계의 코끼리 같은 존재로서 많은 민족들의 혼혈(混血)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럼 중국에는 진정한 한족은 존재했었는가? 존재했다면 이들의 원초의 모습은 어떠했었는가? 그리고 한족은 어떠한 “진화”과정을 거쳐 코끼리 같은 거대한 덩치를 갖게 되였는가?

기원전 5천여년 전부터 한족의 최초의 주체였던 화하족(华夏族)은 황하류역에서 기원하여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여 신석기시대에 들어섰으며 아울러 선후로 모계씨족사회와 부계씨족사회의 단계를 거쳤다. 기원전 2700년 지금의 섬서성 중부지역에 살고있었던 희(姬)씨 성을 가진 부락의 수령은 황제(黄帝)였고, 그 남쪽에는 염제(炎帝)를 수령으로 하는 강(姜)씨 성을 가진 부락이 있었다. 이 두 부락은 늘 다투었는데, 끝내 반천(阪泉)이란 고장에서 큰 싸움을 벌리게 되였는데, 황제가 염제를 이겼고, 그 후에는 두 부락이 련맹을 맺었다. 이 희(姬)씨와 강(姜)씨 부락은 련맹을 맺은 뒤에 주변의 여러 부락들을 무력으로 통합하였는데, 화하족(华夏族)의 전신은 이로부터 산생되였다. 지금의 섬서성 중부에 있는 황릉현(黄陵县)에는 황제(黄帝)의 묘라고 전해져 내려온 황제릉(黄帝陵)이 있다. 이 황제릉에는 1만여 그루의 천년로송들이 교산(桥山)에 줄지어 솟아있는데, 이 황제릉은 한족 기원의 상징으로 떠받들리고있다.

물론 한족은 한꺼번에 형성된것이 아니라 하(夏), 상(商), 주(周), 초(楚), 월(越) 등 여러 민족들이 서로 뒤를 이어 굴기하면서 화하민족의 대융합중에서 점차 형성되여 오다가 최종적으로 진시황의 “대일통(大一统)”을 통하여 형성되였다.

특히 진시황의 정치제도, 형법, 화폐, 문자, 도량형 등을 통일한 “대일통(大一统)”의 조치는 화하족으로 하여금 보다 확정적으로 공동한 문화를 향유하게 하였으며 따라서 보다 확고한 인간공동체를 형성할수 있게 하였다. 진왕조(秦王朝)는 비록 국운이 짧았지만 그뒤의 한왕조(汉王朝)가 진왕조의 문물제도를 이어받아 “대일통(大一统)”사상과 리념의 지도하에 화하족으로 하여금 한족에로의 발전과 전화(转化)를 완성할수 있게 하였다.

한왕조(汉王朝)가 중국을 통치한 400여년 동안 이 시기 중국의 판도는 전례없이 넓어졌으나 한족 인구는 의연히 황하(黄河), 회하(淮河)류역에 집중되여 있었다. 서진(西晋)말년으로부터 중국 서쪽과 북쪽 동북쪽의 소수민족들이 중원을 거듭 침입하여 들어오게 되면서 한족의 인구는 점차 장강(长江), 주강(珠江) 및 중국 동남부에로 대규모적으로 이동하여 가게 되였다. 서진으로부터 수왕조의 통일국면이 이루어지기까지 한족들은 중앙아세아와 중국 운남성 일대에까지 확산되였다. 료금원(辽金元)시기를 거쳐서 명청(明清)시기에 이르러 중국 남방의 한족인구는 북방의 한족인구를 초월하게 되였다. 청왕조 초기에 통치민족으로 부상한 만족은 중국 동북지역을 저들의 발상지라고 하면서 한족들이 동북으로 이동하는것을 엄금하는 봉금(封禁)정책을 실시했지만 청왕조 후기에는 동북변강을 충실히 하기 위하여 한족들이 동북에로 이동하는것을 허락하였다. 20세기 초 장작림(张作霖,1875-1928)이 동북을 통치하고 있었던 시기에 대량의 산동성의 한족들이 동북으로 이동하여 왔다.

그리고 명나라시기로부터 동남 아세아 각국에로 한족들의 이민물결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중국 동남 연해지역의 적잖은 한족들이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로 이민하는 물결이 일었다. 21세기 해외에 살고있는 화교의 총인구는 3975.8만명에 달하고 161개 나라에 분포되였다. 즉 화교만 해도 어지간한 중등 규모를 갖춘 국가의 인구와 맞먹는다.

이러한 장구한 력사적행정속에서 한족이 중국과 세계 각지에로 확산된것은 한 면의 일이고 다른 한면으로 중원에 입주했던 동이, 북적, 흉노, 선비, 거란, 녀진, 몽골, 만족 등 수많은 민족들은 한족이 영위하고 있는 선진적인 문화와 거대한 인구적우세에 인해 거듭 한족속에 동화되여 봄눈처럼 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이를테면 장백산과 흑룡강 사이의 드넓은 동북의 산야에서 살아왔던 금나라시기의 녀진은 200만 명 이상 중원에 이동해 갔으나 거의 모두 한족으로 동화되였고, 청나라 때 3백년 가까이 중국을 통치했던 만족은 산해관을 넘어서 중원에 쳐들어간 인구가 역시 200만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언어, 문자를 포함한 자기의 민족문화를 거의 다 잃고 한족화되였다.

반대로 한족은 마치도 굴리면 굴릴수록 더 커지는 눈덩이처럼 날이 갈수록 커져서 나중에는 13억명을 웃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맘모스 같은 거대 민족으로 거듭났다.



3. 순종 한족은 어떻게 생겼었는가?



한족들은 자신을 염황자손(炎黄子孙) 혹은 황염자손(黄炎子孙) 혹은 황제자손(黄帝子孙)이라고 한다. 염황족은 화하족의 전신이고 또 화하족은 한왕조 이후에는 한족으로 개칭되였고, 당왕조 때에는 또한 당인(唐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럼 순종(纯种) 한족은 구경 어떻게 생겼었는가?

고고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의 연구와 발견에 의하면 염황자손(炎黄子孙)은 인체생리학적으로 세계의 기타민족과 구별되는 특수한 생리적인 특징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가래(铲)모양의 문치(门齿)가 났다고 한다. 웃이몸 복판에 난 두대의 문치의 두변은 옅은 골이 패여서 릉(棱)이 생겼고 그 중간은 좀 패여 들어가서 마치도 가래모양을 갖고있었다고 한다.한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런 형태의 문치를 갖고 있지만 백인종들 가운데서 이런 문치를 갖고있는 이들은 다만 8.4%를 차지하고, 흑인들가운데서는 다만 11.6%를 차지할뿐이라고 한다.

둘째는 갓난애의 엉덩이 요천골 부위에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청색반(青色斑) 혹은 청회색반(青灰色斑)이 나타나는 생리현상이다. 약 2살 정도가 되면 이 반점이 사라지는데, 백인종, 흑인종이 낳은 아기들의 엉덩이에는 이런 반점이 없다. 몽골인종들 속에 이런 생리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여 일명 “몽골반(Mongolian spot)”이라고 한다. 이 “몽골반”은 한족만이 아니라 몽골족, 만족, 조선족 등 만-퉁구스어족이나 몽골어족에 속하는 여러 민족들의 아기들의 엉덩이에서도 이런 “몽골반”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이 “몽골반”을 두고 녀자들의 생산을 관장하는 녀신 삼신할미가 배안에 있는 태아가 이제는 밖으로 나갈 때가 되였다고 발길로 엉덩이를 툭 찬것이 그만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해석했다.

세번째는 내차주름(内眦褶,epicanthic fold )이 있다는 점이다. 눈의 내각 부위에 상안검(上眼睑)이 조금 아래로 뻗어있기에 루부(泪阜)를 덮으면서 자그마한 피부주름이 나있는데, 이를 “몽골주름(蒙古,Mongolian Eye Fold )”이라고 한다. 한족을 비롯한 중국인의 대부분이 이런 주름을 갖고있지만 백인종이나 흑인종에게는 이런 주름이 없다.

인류학자들은 이상의 세가지 생리적특징이 바로 한족이 염황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체질인류학적특징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특히 가래모양의 문치는 구석기시대의 먼 조상에까지 소급되여 올라간다고 인정하고 있다.

염황자손은 황색인종으로서 키는 중등이고 피부색깔은 담황색(淡黄色) 또는 종황색(棕黄色)이며, 머리카락은 검고 곧으며, 눈알은 심갈색(深褐色)이고, 코는 넓이와 높이가 중등이고, 얼굴을 편평하고, 입술은 너무 두껍지도 않고 너무 얊지도 않고 몸에 털이 적다. 이것이 바로 한족을 비롯한 중국인들의 체질인류학적인 특징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남방인과 북방인의 용모는 적잖은 차이가 있다.

장강을 계선으로 하여 장강 이북의 북방인들은 일반적으로 눈이 좀 작고 눈섭이 우로 치켜 올라간 편인데 이를 흔히 “봉의 눈(丹凤眼)”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눈귀에 몽골주름이 뚜렸하고, 코는 높고도 좁고, 입술은 일반적으로 엺고, 얼굴모양은 높고 넓으며, 머리모양은 짧고 넓으며 키는 비교적 크다. 중국의 북방인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몽골, 녀진, 조선족들과 많은 류사성을 갖고있다.

장강 이남의 남방인들은 일반적으로 눈가죽이 비교적 길게에 째여졌기에 외형상으로 눈이 비교적 동그랗고 크다. 그리고 몽골주름은 그다지 뚜렷하지 않으며 코는 좀 낮고 넓으며, 입술은 비교적 두텁고, 얼굴모양은 낮고 좀 갸름하며 머리형태는 좀길고 넓지 않으며, 키는 비교적 작다. 남방인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동남아세아의 월남인, 캄보디아인, 버마인, 태국인들과 많은 류사성을 갖고있다.



4. 순종으로서의 한족은 이미 사라졌다



사람들은 흔히 한족은 중원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럼 중원은 어디인가?

중국 력사상에서 중원의 공간적범위는 주로 지금의 하남성과 산서성 남부, 강소성 서부, 안휘성 북부의 일부 지방을 포함한다. 바로 이런 점을 감안하여 적잖은 학자들은 상술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만을 비교적순수한 한족이라고 주장하여왔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해 이런 선입관은 힘없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이를테면 란주대학 생명과학학원 부교수 사소동(谢小东)은 중국 서북지구의 소수민족의 변천에 대해 DNA연구를 진행하고 나서 이런 주장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이런 주장도 틀린다. 상주(商周)시기 오늘의 서안(西安)에 도읍을 세웠던 서주(西周)는 긍정적으로 한족에 속한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춘추전국시기에 마찬가지로 섬서에서 발족한 진(秦)은 융(戎)이라고 정의를 내렸는바 융(戎)이란 바로 소수민족이였다.”



그러나 더 소급해 올라가면 지금의 하남성 안양에 도읍을 정했던 상(商) 역시 그 이동경로를 본다면 지금의 하북성이나 료서 일대에서 활약했던 화하족이 아닌 동이(东夷)계통의 한 강력한 부족이 중원에 입주하여 헤게모니를 잡은것으로 된다.

그리고 재미 있는 현상은 중국의 한족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을 “염황자손”이라고 하지만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황제(黄帝)는 지금의 감숙성 심양(沁阳)으로부터 천수(天水) 일대에서 기원했으며, 염제(炎帝)는 섬서성 동부와 섬서성 서부 사이의 황토고원 일대에서 기원하였는데, 이러한 지역은 실제상에서는 중원에 속하지 않는다.



“이 지방은 북적(北狄)의 세력범위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 한족은 다만 어느 한 시기의 지역적인 획분에 불과하였으며 이 민족은 특정한 의미를 갖고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주변지역과 구분하기 이하여 만들어낸 이름이였다.”



그리고 중국력사의 변천에 따라서 설사 한족지구라고 정의를 내렸던 고장의 주민들도 여러차례 대규모의 이동을 하였다. 말하자면 수자리를 살거나 전란을 피하거나 귀양살이를 하거나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한족은 줄곧 중원으로부터 남방으로 이동하였다. 물론 명청 이후에는 중국의 동북이나 내몽골지방으로도 많이 이동하였다.

주지하다시피 객가인(客家人)들은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 등으로 인해 중국사회가 대동란에 휩싸였을 때에 중원에서 장강 이남으로 여러차례 대규모로 이민하여 형성된 한족이민집단이다. 연구에 따르면 지금의 객가인들이 오히려 비교적 순수하게 당시 중원 한족의 문화전통을 계승하여오고 있다. 이를테면 객가인들은 지금도 중고시기의 중원 한어의 고어(古语), 고음(古音)이나 민속들을 많이 지켜오고 있다. 이를테면 객가어(客家语)는 고한어(古汉语)의 특성들을 고스란히 계승하여 오고있는데, 이를테면 객가어(客家语)는 비교적 완정한 입성음미(入声韵尾) [-p],[-t],[-k], [-m], [-l]를 보존하고 있기에 후기 중고한어(中古汉语, 唐宋 二代를 기준으로 삼음)와의 계승관계가 비교적 명확하다.[②] 바로 이런 까닭에 객가어(客家语)로 당시(唐诗), 송사(宋词) 같은 중고한어(中古汉语)로 된 시(诗)나 사(词)를 랑송하면 그 운률 면에서 보통화(普通话)보다 중고한어(中古汉语) 운률의 원모습에 훨씬 더 가깝다.[③]중원 한족들이 사용하는 한어는 오히려 거듭되는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과 혼거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많은 변화가 발생하 중고시기 고한어나 한족의 민속 등 전통 한족문화의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

이런 의미에서 객가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의 한족인지만 지금 그들은 소소족군(少数族群)의 형태로 살아오고 있으며 오히려 한족이란 이 거대한 공동체속에서 소수자로 전락되고 말았다. 물론 이들 객가인들 역시 당지의 남방 여러 소수민족들과 전적으로 절연된 상태에서 고립적으로 살아온것은 아니므로 그들의 문화에도 적잖은 남방 소수 민족들의 문화적요소가 섞여있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중국에 순종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것은 장기간의 대규모적인 인종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속에서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의 나라들에서 부단히 한족과 융합되여 왔던것이다. 대규모의 혈액검사를 통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족만이 아니라 중원으로 입주한 소수민족의 래원 및 그 귀추에 대해서도 확실한 증거를 얻게 되였다.

중국의 한족은 명실공히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 같은 존재였다. 이를테면 중원에 쳐들어 왔던 선비, 녀진, 거란, 몽골, 만족 등 소수민족들은 주동적이였던 피동적이였던 얼마 동안의 세월만 흐르면 모두 례외없이 한족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이를테면 광동성 동완의 용(容)씨나 산동성 봉래의 모(慕)씨는 모용선비의 후손이며[④], 실크로드를 따라서 서역으로부터 중국에 들어온 수많은 회교도들이 한족으로 동화되였다.[⑤] 고구려가 멸망되여 중원으로 끌려간 고구려인 28만 명은 모두 한족으로 동화되였으며, 금나라 때 중원으로 이동해 간 녀진인 200만명 이상은 모두 한족속에 흡수되였다. 1637년 병자전쟁 때에 청나라군대에 의해 포로되여 심양으로 끌려왔던 수십만명의 조선인들은 후일 만족이나 한족으로 동화되였다. 이런 사례를 들자면 그야말로 부지기수이다.

화하족은 한족의 초기의 주체였었지만 그후의 력사발전 과정에서 동이(东夷), 서강(西羌), 북적(北狄), 남만(南蛮) 등 주변의 소수민족들과 장구한 세월속에서 부단히 융합되여 하나의 거대한 한족을 형성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13억 한족들 중에는 단 한명의 순수한 혈통도 없다. 잡종강세가 한족에게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고 할수 있다.



5.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



미국의 학자 베네딕 안델센(Benedic Anderson, 1936- )은 민족주의연구의 경전적인 저서《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산포》(1983)[⑥]에서 “코페르니크스식의 정신”으로 남들이 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색을 펼치면서 민족감정과 문화근원으로부터 착수하여 부동한 민족의 속성을 탐구하면서 민족, 민족의 속성과 민족주의를 일종 “특수한 문화의 인조물(特殊的文化的创造物)”[⑦]로 간주하였고, 민족을 “일종 상상의 정치공동체(一种想象的政治共同体)”[⑧]라고 정의를 내렸다. 안델센이 이 책에서 언급한 상상은 결코 날조가 아니라 그 어느 인간공동체의 아이덴티티의 형성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인지과정(cognitive process)이였으며, 따라서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라는 이 명칭이 가리키고 내포하고있는것은 결코 “허구적인 가짜 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일종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사실(lefait social)”이다. 이 주관/인지주의의 정의는 안델센이 전반 론증의 기조를 확정지었다. 말하자면 이렇게 함으로써 “민족”이란 이 특수한 정치적상상(인지)이 가능하게 될수 있는 조건과 력사과정을 탐구하려고 하였다. [⑨]

안델센은 “상상의 정치공동체”로서의 민족의 굴기는 주로는 종교신앙의 령토화, 고전적인 왕조가족의 쇠락, 시간관념의 개변, 자본주의와 인쇄술 사이의 상호 작용, 국가방언의 발전 등 여러 가지 요소에 의존한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베네딕 안데르센이 지적한 이러한 상술한 요소 외에도 다른 요소들도 “상상의 동동체로서의 민족”의 형성과 굴기에 많이 작용하였으며 따라서 민족의 형성과 굴기는 단지 자본주의라는 이 특정된 력사단계와만 련관되는것은 아니다. 특히 서구와는 많이 다른 력사과정을 거쳐온 중국 같은 나라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베네딕 안델센의 상술한 견해에 미흡한 점은 존재하지만 진부한 민족주의자들의 편협한 “순혈주의(纯血主义)”적인 민족관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는 민족을 단순한 혈통의 공동체가 아닌 “상상의 공통체”로 보고 그 상상의 주요한 내용적령역이 종교신앙, 정치제도, 과학기술, 언어, 문자 등 문화와 련관되여 있다는 점에서는 미상불 올바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 단적인 사례를 유태인의 종교신앙과 중국 한족의 한자(汉字)를 통해서 보기로 하자.

유태인이 세계적으로 가장 응집력이 강한 민족공동체로 수천년동안 강인하게 살아남을수 있은것은 결코 단순히 혈통에 의한 동일성에만 의존한것이 아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의 각국에서 유태 복국주의자들의 호소를 받들고 이스라엘에 몰려온 유태인들은 심지어 피부와 생김새도 많이 달라졌다. 이를테면 에티오피아 같은 동아프리카에 온 유태인과 독일 같은 서구에서 온 유태인들은 수천년 동안의 격리와 각자의 거주국에서의 당지 토착민들과의 혼혈로 인해 생리적으로는 많이 달라졌지만 유태교에 의해 굳건한 종교신앙의 동일성을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이 갖고있는 “우리는 모두 유태인”이라는 이 아이덴티티는 동일한 혈통이나 공동한 언어문자 같은것이 아니라 주로 종교신앙이라는 이 문화적인 상상속에서 만들어진것이다.

중국의 한족이 하나의 거대한 “상상의 공동체”로 될수 있었던것은 물론 여러가지 복합적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중에서 표의문자(表意文字)로서의 한자가 지극히 중요한 기능과 작용했다. 진시황이 “동일한 문자로 글을 쓰라(书同文)”고 하여 문자를 통일한 이래 중국은 지방 마다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자기의 특수한 방언들을 갖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의문자인 한자에 의해 부동한 방언을 구사하는 중국 각 지방의 한족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수 있게 되였으며 따라서 문화의 동일성을 서로 확인할수 있게 되였다. 만일 가정하여 중국에서 표의문자인 한자가 아니라 알파베타 같은 표음문자로 통일하였더라면 아마도 유럽이 서로마,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수십개의 민족국가로 형성되는 과정을 밟았던것처럼 사분오렬되였을 개연성이 상당히 많다. 이런 의미에서 표의문자인 한자는 한족을 하나의 거대한 “상상의 공동체”로 응집시키는 가운데서 지대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으며, 따라서 한자가 없었다면 아마 한족도 없었을것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그도그럴것이 베네딕 안델센의 지적한것처럼 “민족”이란 이 “상상의 공동체”는 최초에 그리고 가장 주요하게는 문자(열독)을 통하여 상상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동일한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공동체는 바로 “민족”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⑩]

문이재도(文以载道)라는 말을 풀이할것 같으면 언어문자가 수레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종교신앙이나 사상 같은 관념형태의 문화는 이 언어의 수레를 타고 도처로 다니는 도(道)같은 존재라고 할수 있다. 한 사람이나 한 가족의 문화적인 아이덴티티는 종교신앙이나 사상 같은 관념형태의 문화적상상에 의해 형성됨을 “중국의 최후의 대유(大儒)”라고 불리고있는 량수명(梁漱溟,1893-) 개인과 그가 속한 량씨가문을 통해 분명하게 알수 있다.

량씨가문의 족보에 의하면 량씨의 시조인 예센테무르(也先帖木儿)는 원나라 황실에 속했는데, 세세대대로 하남성 여양(汝阳)에 살아왔다고 한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예센테무르는 원세조(元世祖) 후비레(忽必烈)의 다섯째 아들 허커치(和克齐)의 아들이라고 한다. 지원 17년(1280년)에 허커치는 운남왕으로 책봉되였고 후에는 영왕으로 다시 책봉 받았다. 원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예센테무르의 후예들은 명나라에 귀순하였다. 당시 귀순하여 살아남은 몽골족들은 대부분 성을 바꾸게 되였는데, 하남성 여양은 전국(战国)시기에는 위(魏)나라의 도읍 대량(大梁)에 속했으므로 량(梁)을 성으로 삼게 되였다고 한다. 량수명의 고조부 때에 량씨가문의 일부분은 계림에로 이주하게 되였으나 량수명의 조부와 부친은 모두 북방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였으므로 량씨네 이 한갈래는 북경에서 살게 되였다. [11] 부계의 혈통을 추적한다면 량수명은 몽골족이다. 그러나 량수명의 아이덴티티는 결코 혈통이 아닌 문화에 의해 형성되였던것이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80세의 고령에 이르러서까지 시종 중국의 전통문화를 사랑하고 중국을 사랑하면서 살아왔으며, 자기의 사상과 실천으로 “유자(儒者)의 풍골(风骨)”을 과시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은 가장 올곧게 중국문화의 도통을 이은 사람, 즉 “중국 최후의 대유(大儒)”로 자기의 일생에 종지부를 찍었던것이다. 만년의 량수명과 량수명사상연구가인 아이카이(艾恺)라는 이딸리아 학자와 대담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당신은 성인입니까?”라는 아이카이의 물음에 량수명은 “나의 리해로는 성인의 생명과 인격은 보통사람보다 높은데, 나는 공자(孔子)나 왕양명(王阳明) 같은 분은 성인(圣人)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아이카이가 “당신은 자신이 한낱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묻자 양수명은 “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한테 보통사람과 다른점이 있을수 있는데, 그것은 내가 흡사 바라보았다는 점입니다. 멀리 바라보았다는 점입니다……또렷하게는 보지 못하고 마치도 안개속에서 바라보듯이 어렴풋이 바라보았다는 점입니다. 안개속에서 공자는 어떠하고, 왕양명은 또한 어떠한가를 멀리서 바라보았다는 점입니다.”[12]



여기서 볼수 있듯이 량수명의 문화적정체성은 혈통적으로칭키스칸이나 쿠비라이 같은 몽골족의 제왕장상과 련결되여 있는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중국 한족의 공자나 왕양명 같은 사상가들과 련결되여 있다.

곽말약은 시선 리백(李白)을 중앙아세아의 수엽성(碎叶城)에서 태여났다고 고증했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리백은 혈통적으로는 한족이 아니지만 그의 시는 가장 중국적인것이며 따라서 리백은 중국의 력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명인중의 한 사람이다. 《홍루몽》의 작자 조설근 역시 만족이지만 그가 《홍루몽》에서 그려낸것은 전반 중국의 문화였다.

베네딕 안델센이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주장한것은 민족은 결코 생리적각도에서의 동일한 혈통에 의존한 공동체가 아니라 문화적인 공동체로서 그 아이덴티티는 문화적상상에 의해 만들어지는것임을 지적한 말이다.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임을 가장 여실하게 증명해주고 있는것이 이 세계에서 가장 큰 민족공동체인 13억 한족이라고 할수 있다. 즉 한족이란 이 민족공동체의 비할바 없이 강력한 민족적응집력은 결코 단순히 혈통에 의존한 뉴대가 아니라 문화적인 뉴대에 의존하고 있으며 문화적상상에 의존한 공동체임을 지적한것이라고 풀이를 해도 대과(大过)는 없을것이다.

유태인이나 한족은 바로 이러한 다양한 문화적상상에 의존한 민족공동체로서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 안델센의 주장에 대한 가장 유력한 주석으로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태인이나 한족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많은 민족은 모두 단순히 혈통에 의존한 혈연공동체라고 하기 보다는 “상상의 정치공동체”라고 하는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우리 조선민족도 례외일수 없다. 조선민족 역시 전통사회에 많은 민족들이 조선민족의 구성원으로 동화되였다. 이를테면 가야국의 왕비 허황옥을 인도의 아난타국에서 온 녀자라고 하며, 조선민족의 성씨중의 태(太)씨는 발해국 종실의 성 대(大)씨에서 유래하였으며, 청해 리씨는 녀진인부락의 추장인 퉁두란(佟豆兰)을 그 시조로 모시지 않았던가. 요즘 한국의 시골들에는 지금 필리핀, 베트남, 우즈베크, 페루 등 세계 방방곡곡에서 온 녀성들이 날로 늘어나고 명실공히 다원문화의 사회로 나아가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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