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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35]중국조선족언론계의《큰별》-오태호선생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07.16일 14:10

오태호선생

오태호선생은 1928년 12월 24일, 길림성 연길현(현 룡정시)광개향 후동촌에서 출생했으며 1944년 룡정제2국고를 거쳐 1950년 10월에 연변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연변대학을 졸업한 후 오태호선생은 연변일보사의 기자로 취직하면서 1986년 4월 정년리직하기까지 장장 36년간 연변일보사, 연변인민방송국, 길림신문사 등 중국조선족 주류매체의 기자, 총편집으로 근무하면서 중국조선족언론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일심전력으로 인민대중을 위해 봉사

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불길은 연변에도 미쳤다. 조여드는 시국앞에서 연변대학에서는 지방정권에서 간부가 부족하여 대학생을 수요하는데 갈 사람은 나서라고 호소했다. 당시 연변대학 2학년생이였던 오태호는 대학의 호소를 받들고 솔선적으로 탄원해나섰는데 신문사에 배치받으면서 언론인의 첫 발자국을 내딛게 되였다.

당시 신문사의 이름은 《동북조선인민보》(연변일보의 전신)였는데 오태호선생은 편집부 농촌부에 배속되였다.

신문사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오태호는 신문기자의 준칙에 대한 기본훈련을 받았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일심전력으로 인민대중을 위해 봉사하는것》이였다. 그후 기나긴 기자생애에서 오태호선생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취재실천에 옮기면서 신문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만들어냈다.

오태호선생은 기자생활초기 취재때문에 많은 시간은 기층에 내려가 뛰여다녔다.

신문사에 들어온지 반년, 결혼한지 두달만에 오태호선생은 북만일대에 가서 그곳의 통신원들과 사귀며 신문원고를 쓰도록 동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불짐을 꿍져멘채 힘들게 객지를 떠돌아다니는 간고한 사업이였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1953년 12월 31일, 양력설을 하루 앞두고 오태호선생이 안도형 량병태 취재길에서 문마저 제대로 닫히지 않는 려인숙에 들어 가운데가 불쑥 솟은 구들에 취재가방을 베고누워 자꾸만 미끄러져 구석에 내려오면서 밤새 잠못이루던 취재길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1952년 봄철, 룡정시 개산툰진 선구대대에서 변소에 오지독을 묻고 인분을 모아 비료로 한다는 소문에 실사구시적으로 취재한다고 집집의 변소를 돌아다니며 기웃거려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이상한 사람취급받던 일도 있다.

오태호선생은 자서전 《인생에 부친 편지》에서 당시 그뿐만아니라 많은 기자들이 그처럼 단순하고 순진하고 성실했다고 쓰면서 아무런 고뇌도 없이 오직 보도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비바람과 눈보라를 무릅쓰고 낮과 밤이 따로없이 뛰여다니던 그 시절의 그 정신, 그 자세는 지금도 아끼고 또 아낄바라고 지적했다.



한평생 《실사구시와 렴결봉공》을 좌우명으로 삼아온 오태호선생

연변일보사 기자로 있으면서 오태호선생은 연변의 400여개 촌의 70%를 돌아다녔고 당시 120여개 공사가운데서 왕청의 십리평을 제외하고는 안 가본 공사가 없다고 하니 얼마나 취재일선에서 밤낮없이 뛰여다녔는지 짐작이 간다.

오태호선생은 1983년과 그 이듬해 선후로 길림성우수신문사업자, 전국우수신문사업자로 평의됐으며 전국신문사업자련합총서로부터 영예증서를 발급받았다.

한평생 《실사구시와 렴결봉공》을 좌우명으로 삼아온 오태호선생은《기자는 왕관을 쓰지 않은 왕》이라고 하면서 《기자는 사회의 가장 높은 직급, 그보다 한층 우에 서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83년 길림성 제6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된 오태호선생은1987년까지 5년간 연변인민의 대표인 동시에 조선족대표, 지식인대표로 나라사무를 관리하고 인민의 대변인으로 되여 인대대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리행했다.

오태호선생과 연변의 명인들

오태호선생은 당년에 중국조선족의 시대적 명인들이였던 황순옥, 김시룡, 최죽송을 제일 먼저 세상에 알린 기자이다.

지난 60년대(63년부터 64년 사이)오태호선생은 연길현 동성용공사 동성5대 달리동에서 밤을 묵어가며 황순옥을 취재하고 《한폭의 붉은 기발》이란 제목으로 반개면에 달하는 장편기사를 썼다. 당시 연변주당위 선전부 리휘부장은 황순옥의 사적기사를 먼저 읽고 너무 감동된다며 친히 사론을 쓰겠다고까지 자청했다고 한다. 하여 사론까지 배합한 황순옥의 사적이 《연변일보》에 실렸다.

이것을 시작으로 황순옥의 사적이 널리 알려지면서 제일 먼저 엽검영원수가 황순옥을 초청하여 북경군구에서 강용(講用)하게 하고 다음은 심양군구, 길림성군구에서도 황순옥을 초청하였다. 황순옥은 이렇게 모택동저작학습열성분자로 전국에 크게 소문났다.

60년대 오태호(왼쪽 첫번째)선생이 황순옥(왼쪽 두번째)에 대한 취재를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

50년대초의 김시룡에 대한 취재는 오태호선생이 초기부터 발이 닳게 뛰여다니며 했다고 한다.

특히 김시룡의 쏘련참관기는 취재한 그날밤으로 써내 이튿날부터 《김시룡 쏘련참관기》가 련재로 발표됐다. 오태호선생은 그후에도 김시룡을 수차 취재했다.

신풍대대 최죽송은 유지온상부터 시작하여 유리온상, 《새발모》로 크게 소문난 연변의 농업명인이다.

1950년대초에 연길시정부 제 1기 농업고 리광현고장이 《평북일보》를 가지고 신문사 농촌조 기자인 오태호를 찾아와서 《평북일보》에 조선의 김성제가 새발모농법으로 고산을 낸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여기서도 새발모를 하면 안되겠는가고 건의했다. 오태호선생이 최죽송을 찾아갔더니 자기 논밭에서 실험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해에 최죽송은 《새발모》농법으로 헥타르당 1만 6000근의 소출을 냈고 1952년에 전국풍산모범으로 되였다.

그후 오태호는 《최죽송농업사의 생산계획》이란 글을 발표했는데 《인민일보》에 한어로 번역되여 실리면서 최죽송을 전국적으로 크게 유명해지게 한 계기가 됐다.

1979년도부터 불어친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오태호선생이 부총편집을 맡은 《연변일보》도 진실에 립각해 실사구시하면서도 새로운 기상을 보도하기 위하여 여러모로 힘썼다. 잔혹한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신문실천에서 간부와 군중들에게 우려와 뒤근심이 많았다. 오태호는 이런 우려와 뒤근심을 마주하고 신문보도의 길을 개척해나가야 했다.

당시 화룡현 동성공사의 한 농민이 소를 500원에 사서 2000원에 판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과연 자본주의인지 아닌지를 두고 신문에서 지면토론을 진행했는데 찬반여론이 열렬했다. 연변대학농학원의 축산학자 김병진교수가 직접 당지에 내려가 그 소를 축산학적으로 고찰하고 틀림없는 특등소라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신문은 자본의주의가 아닌 정당수입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개혁개방초기 오태호는 《개혁만이 출로이다. 개혁하지 않고서는 출로가 없다》고 생각하고 당중앙 11기 3차 전원회의 정확한 로선에 대한 몸가집과 고백을 담은《시대의 주선률》이라는 문장을 신문에 발표함으로써 새로운 력사시기 새로운 시대적 여론인도 방향을 정확히 제시해주었다.

오태호선생과 《길림신문》의 창간

《길림신문》의 초창기 창간은 오태호선생의 로고와 갈라놓을수 없다.

1984년 8월 7일, 중공길림성위에서는 길림성내 조선족들의 조선문 성보출간의 간절한 요구를 받아들여 《길림조선문보》의 정식 출간을 비준했다. 이와 함께 당시 《연변일보》 주필이였던 오태호선생은 《길림조선문보》의 인원편제와 경비예산을 포함하여 신문창간에 대한 구체적방안 작성에 대해 지시받았다.

당시 《길림조선문보》창간의 구체적방안에 대해 오태호선생은《연변일보 5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있다.

《…오태호는 인원편제 50명, 경비예산 80만원 (그중 개발비 50만원, 정상경비 30만원)을 제출하였다. 1984년 6월, 성당위 선전부 부부장 서길정, 성당위 선전부 신문출판처 처장 왕문기는 주당위 부서기 김성화, 주당위 선전부장 리정문, 연변일보 주필 오태호와 함께 〈길림조문보〉의 인원편제와 경비예산을 협상하였다. 결국 인원편제를 30명으로, 경비예산을 65만원으로 금이 그어졌다. 인원편제와 경비예산이 적은것은 사실이지만 우선 신문을 내고 보자는게 오태호의 주장이였다…》

1985년 4월 1일, 《길림신문》은 창간되였으나 초창기의 애로점들이 적지 않았다. 우선 경비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못해 애먹었는데 그때 마침 성당위서기 고적이 연변에 와서 시찰차 《연변일보》와 《길림신문》을 찾아주었다. 당시의 《길림신문》의 겸임 주필이였던 오태호선생은 사업보고를 할 때 정상경비문제를 특히 보고하면서 수요되는 경비를 성에서 책임진다는 고적서기의 약속까지 얻어냈다.

그러나 성재정청에서 5일이내로 해결하겠다고 대답하고는 한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대답도 없자 주필 오태호는 화가 난 나머지 1985년 8월 10일, 중공길림성위 선전부에 이같은 상황을 보고하고는 《만약 9월 10일전으로 돈을 내려보내지 않으면 신문을 정간하겠다. 그때 가서 우리가 사전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지 말라》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보고를 올리기까지 하면서 결국 어렵게 《길림신문》초창기 경비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길림신문》이 초창기에 사무청사가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어렵게 보낼 때에도 오태호선생은 1985년 2월 14일 신문을 주관하는 성당위 부서기 류경지에게《우리는 사무실이 없어도 우는 소리를 하지 않고 헐망한 병사를 빌어쓰며 난로를 피우고 사무를 보고있다. 거기에는 전화도 없지만 우는 소리를 하지 않고 먼거리를 오가고있다. 자동차 한대 없어도 우는 소리를 하지 않고 제발로 걸어다니며 일하고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실사구시적으로 《길림신문》초창기의 어려움과 곤난을 반영하여 적극적인 해결을 바란 로심초사의 공적이지 않을수 없다.

초창기 《길림신문》이 《연변일보》로부터 분리되여 나오고 본사를 장춘에 옮기면서 현재 길림성의 유일한 조선문 성급당보로 당당하게 성장하기까지는 《길림신문》의 초대주필이였던 오태호선생의 숨은 공로가 깃들어있는것이다.

오태호선생은 1986년 4월에 정년리직하였으며 퇴직한 후에도 《세계를 가는 기자》, 《중국조선민족언론사》, 《발자취》총서 제7권 《풍랑》 주편, 《마닐라의 풍운》, 《연변일보 50년사》 등 다수의 가치있는 저서들을 편찬,출판해 중국조선족언론의 리정표적 저서들을 남겼고 박식과 풍부한 신문실천 및 성과들로 중국조선족언론계의 《큰별》로 떠올라 사람들의 애대와 존경을 받았다.

오태호선생은 2012년 12월 6일 오후 5시 30분, 연길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참고문헌: 《인생에 부친 편지》 오태호 저, 1997년 료녕민족출판사

《연변일보 50년사》 오태호 저, 연변인민출판사 1998년

《평생언론인 오태호》 연변일보 2012년 5월 11일, 리련화기자

《오태호선생과 자치주 60년 세월속 이야기들》 길림신문 2012년 4월 19일, 오기활기자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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