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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48]중국조선족미술계를 빛낸 화백 석희만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3.08.20일 11:27
석희만은 연변대학 미술학부의 창시자이자 조선족 서양화단을 이끈 선구자의 일원이다. 아울러서 그는 중국현대미술의 변화와 전개라는 력사적인 맥락에서 주목되는 화가이며 미술교육가로 명망이 높다.

석희만은 거의 한세기에 걸친 파란만장한 인생과정에서 격변하는 력사적사건들과 미술사조를 거치면서 중국조선족의 지도자적인 화가, 미술교육가, 미술활동가, 민주인사로 폭넓은 활약을 펼쳤으며 중국조선족의 근현대미술사 전개에 핵심적인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석희만은 1914년 8월 20일 조선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에서 태여났다. 1921년 8월 20일, 행복해야 할 여덟살 생일날은 석희만에게 평생 걸머져야 할 불행의 출발점이 되였다. 소학교 1학년생이였던 그는 이웃집에서 설치한 철봉대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땅에 떨어져 오른팔의 관절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가난한 형편에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집에서 모친의 치료를 받은것이 전부였는데 수개월후 오른팔을 전혀 쓸수 없게 되였다. 도립병원으로 옮겨 반년간 치료를 받았지만 오른팔은 완전히 마비되여버렸다.

그는 원래 어린시절에 왼손잡이였었다. 왼손으로 밥을 먹을 때마다 부친이 매질까지 해가면서 오른손잡이로 고쳐놓았던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는 부득이하게 다시 왼손잡이가 된것이다.

그런 왼손잡이 그한테는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같은또래들 가운데서 남달리 그림을 잘 그렸다. 마침 소학교 담임선생도 그림에 관심이 있었기에 석희만에게 《너는 장애인이기에 앞으로 화가가 되거라. 그래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정상인으로 살아갈수 있다》고 권고했다. 오른팔 장애로 인해 인생을 제대로 살수 없게 될가 고심하던 그에게 담임선생의 이 한마디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1931년 4월 룡정에 있는 동흥중학교로 전학을 왔다. 이 학교에서 석희만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무산계급에 대해 알게 되였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정치형세에는 무관심했고 오로지 공부와 그림에만 정진했다. 중학졸업후 석희만은 고향인 조선 무산에 돌아가지 않고 룡정에 남았다. 석희만의 대표작 《로인독보조》

1935년 3월 석희만은 화가의 꿈을 펼치고저 일본류학의 길에 올랐다. 그해 4월 그는 도꾜 일본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5년동안 류학했는데 이 학교가 바로 현재의 일본미술대학이다.

류학기간 열렸던 일본 대형미술전시회 《제8회 독립미술가협회전》과 일본독립미술가협회에서 개최한 《제9회 미술전시회》에서 석희만의 작품들이 줄줄이 입선되였다. 미술학교를 졸업하는 해인 1939년 여름방학에 석희만은 조선 함격북도 청진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청진 마루미백화점 3층에서 열린 전시회는 날마다 사람들로 복새통을 이루었으며 많은 그림들이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류학을 마치고 다시 룡정으로 돌아온 석희만은 4년 동안 교편을 잡다가 화가의 꿈을 펼치러 장춘으로 향했다. 당시 장춘에는 많은 화가들이 집결되여있었으며 매우 활동적인 지역이였다. 그가 장춘에서 간판업을 차리고 점차 활기를 띠게 될 때였다. 1947년, 석희만은 룡정에서 교원생활하던 때의 제자를 만나 연변에서도 그를 애타게 찾고있음을 알게 되였는데 그중에는 연변대학의 박규찬선생도 있었다.

그렇게 석희만은 장춘에서의 간판업을 접고 1949년 12월 연변대학 교원으로 취직했다. 1951년부터 연변대학에서 미술전과 2년제 대학생을 받아들였고 석희만은 2년 동안 미술교수를 담당했다. 연변대학 미술학과 졸업기념사진

석희만은 1957년 7월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초청을 받고 김태희, 조득현 등과 함께 연변예술학교를 창립하고 부교장의 직임을 맡게 되였다. 그해 미술학부에서는 학생을 대량으로 모집하였다. 그러나 그해 전국적으로 진행된 반우파투쟁의 여파가 연변에도 파급되였다. 1959년 우격기회주의분자에 대한 투쟁이 진행될 때 석희만을 비판하라는 상급의 지시가 학교에 시달되였고 석희만은 1960년 7월 북경에서 열리는 《제3차 전국문학예술계대표대회》에 참석할 대표자격까지 박탈당하였다. 그해 12월 전 학교 범위에서 석희만에 대한 비판이 진행되였는데 내용인즉 그림에서 황토색을 사용하였으니 자산계습사상에 물든것이라고 터무니없이 몰아붙였으며 작품《로인독보조》에 한족을 그려넣지 않았다고 지방민족주의분자라는 황당한 루명을 씌워 보름 넘게 비판하고 상급인 길림성에 고발서류를 제출하기도 했다.

1961년 6월, 중국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통전부에서는 여러면의 조사를 거쳐 석희만이 무고하니 원 직장에 복귀하라는 결론을 내려주었다. 이후 석희만은 예술 창작과 사업에 몰두하였으며 서양화《농악무》와 같은 좋은 작품들을 많이 제작하였다. 그는 그 이전 1957년 5월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로 당선된바 있으며 1960년 6월 제3기 전국미술전시회에 파스텔화 《팔가자풍경》을 출품하여 입선의 영광을 받았다. 직장복귀후 1962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10주년 경축 미술전시회에 유화《사과배노래》를 출품하였는데 이 작품은 연변박물관에 소장되였다. 1963년에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3기 전국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고 같은해 중국미술가협회 길림성분회 부주석으로 당선되였으며 길림성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추천되였다. 파스텔화 《장백산천지》,1980년대 작품

1966년 《문화대혁명》의 시작과 함께 예술대학의 학생모집이 정지되였고 모든 교육활동은 통제되고 학교가 페쇄에 이르렀다. 정치운동의 피해로 석희만은 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집중영》에 붙잡혀들어갔다. 석희만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홍위병들에게 모조리 압수당했을뿐만아니라 나중에는 그림을 그리지도 못하게 되였다. 농촌으로 쫓겨나 《로동개조》를 하는 10년 동안 석희만은 그림을 한점도 그리지 못했다. 황금보다 더 소중한 10년 시간을 이렇게 《문화대혁명》에 빼앗긴것이다.

1976년 《사인무리》가 거꾸러진후 1980년 8월 석희만은 《우파》모자를 벗고 예술학교부교장직으로 복귀되였다. 작품을 지도하고있는 석희만선생

또한 1985년 7월 석희만은 연변예술학교 부교수로 승진되였다. 50여년 동안 연변예술학교는 중등전문학교에서 3년제 전문대학, 4년제 본과대학으로 발전하여 예술교수분야에서 풍부한 경험과 교훈을 쌓았으며 연변지역을 위주로 여러곳에서 졸업생들의 활약으로 빛나는 발전과정을 거듭하고있다. 현재 연변미술교육이 이처럼 발전할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석희만의 교육자 및 교육행정가로서의 업적과 갈라놓을수 없다. 2003년 12월 20일 석희만은 89세를 일기로 일본 도꾜에서 타계하였다.

석희만은 자신의 미술교육정신에 대해 이렇게 적고있다. 《사람을 구분하는 주요한 특징은 바로 개성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개성을 무시하면 도저히 그 사람을 평가할수 없다.》, 《작가에게 있어서 개성은 그 작가의 성격, 풍격을 형성시키며 그 작품을 특징지어준다. 그러므로 성격, 풍격이 형성되여야만이 비로소 명성을 날릴수 있다. 》, 《인간의 사유는 시대의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특정된 시대, 또는 사회에 대한 의식형태의 반영은 해당 시기의 사회모습을 특정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나는 예술이 곧 특정한 시대의 반영으로서 그것은 인간의 사상과 자연대상의 혼합체라고 정의를 내렸다.》

연변대학 미술학원 리승룡원장은 《석희만은 급변하는 력사의 사회적상황과 서양화단에서 자신의 예술 의지와 신념을 확고하게 관철시켰다. 만년에 접어들어서는 자연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정서를 힘찬 필치와 색채를 통한 표현주의적경향으로 그려냈는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주체적인 신념을 관철시킨 노력의 결실이였다》고 평가하고있다.

참고문헌: 《화가 석희만의 생애와 작품세계》 리승룡 저

《석희만 회화문선》 석희만 저

편집/기자: [ 김영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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