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1980년대 조선족가요계를 풍미한 김재분가수
40대이상의 사람들은 '장백의 새 아리랑' 선률을 들으면 떠오르는 가수가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선족가수 김재분(48세) 은 남녀로소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1980년대에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가수다.
일전 2012년 연변TV방송국음력설야회 '추억의 옛 가수'코너에 초대되여 '산간의 봄은 좋아'의 록음과 록상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30년만에 다시 찾은 연변무대는 의미가 컸다고 했다. 그동안 도시도 많이 변했고 TV방송국의 시설도 선진화된데다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어서 좋았단다. 1990년대이후 한때 조선족사회의 시선에서 사라져 '잊혀진 가수'로 지냈기에 연변에서의 무대가 더욱 그리웠던것이다.
길림성 매하구 영성촌에서 태여난 김재분, 어려서부터 음악적재능을 보이면서 학교문예대에서 독창가수로 활약하였고 음악선생님의 전문적인 가르침을 받으며 차근차근 기본기를 다졌다. 1981년 금방 고중을 졸업한 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당시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서 단원을 초빙하고있었는데 농촌에 살고있는지라 면접소식을 까맣게 모르고있었다. 마침 학교문예대의 옛친구가 알려줘 한달 늦게서야 면접을 보았지만 독특한 중저음의 음색으로 단번에 예술단선생님을 매료시켜 합격되였다.
예술단에서 3개월동안의 전문적인 학습으로 창법기교를 탄탄히 다졌고 유일한 중저음가수로 데뷔하였다. 또한 그의 목소리와 창법, 정서에 맞게 제작된 '장백의 새 아리랑'과 '산간의 봄은 좋아'두곡은 그의 데뷔와 함께 큰 히트곡이 되였으며 1982년에는 북경에서 개최된 전국소수민족성악콩클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큰 인기를 얻었다. 라지오방송과 텔레비죤방송에 잇달아 출연했으며 전국순회공연도 수없이 다녔고 조선족이 있는곳이라면 운남, 광서까지 공연을 다녔고 길게는 두달씩 외지공연을 하였다.
처음에는 무대경험이 없어 박수소리에도 놀라고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로 긴장했지만 백지상태인 자신을 믿고 노래를 제작해준 예술단에 감사해하며 자신의 가수꿈을 실천하기 위해 창법과 기교련습에 더욱더 열중하였다. 그뒤로 자신감을 되찾은 그는 무대에 서기만 하면 맛갈스런 노래와 뛰여난 가창력으로 관객의 흥을 돋구었으며 걷잡을수 없는 매력으로 무대를 휘저었다.
1984년, 더욱 큰 무대를 갈망하던 그는 길림시조선족문화관 아리랑예술단에 합류하였다. 이때로부터 연변지역 조선족무대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김재분과 관련한 갖가지 루머가 떠돌았지만 그는 나름대로 한족을 대상한 큰 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기 료녕전력계통의 문공단에 초빙되여 한족예술단과 함께 공연을 하다가 1992년부터는 동북전력계통의 문공단에서 활약하였다. 독특한 중저음음색과 뛰여난 가창력으로 한족사회에서도 인정해주는 실력파조선족가수로 향항, 오문 등 지역과 조선, 한국 등 국제무대에도 서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료녕성소수민족문예공연에서 1등상은 물론 유일한 조선족으로 '전국백명청년예술가'에 선정되였고 료녕성전력부 민족, 통속, 미성 등 분야에서 모두 1등상을 거머쥐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봄축전에서는 금상을 수여받는 실력파가수로 성장했다.
한때 연변예술학교 교원초빙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가수생활을 포기할수 없었다. 예술인으로서의 초심을 견지하면서 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로 주류사회의 무대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초원', '나의 집'등 몽골족노래들도 부르면서 해마다 20, 30회의 전국공연을 다니고있으며 료녕성 각지 조선족문화관의 초대가수로 요청이 끊이지 않고있다.
최근에는 중앙TV의 초청을 받고 훈련에 매진하고있는 김재분은 "현재 주류무대에서 많은 공연을 하고있지만 조선족들이 나의 노래에 환호하고 열광하던 전성기를 잊을수 없다."면서 "조선족들을 위한 무대에 자주 오르는것으로 그들의 사랑에 보답하겠다."고 했다.
/인터넷료녕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