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킬미,힐미' 화면 캡처
시작부터 좀 이상했다. 지난 12일 종영한 MBC 수목드라마 '킬미,힐미'(극본 진수완·연출 김진만 김대진, 제작 팬엔터테인먼트)의 주인공 차도현(지성 분) 이야기다. 그는 기세등등한 대기업의 직계 후계자에 화려한 학벌에 멀끔한 외모에 미식축구 선수까지 지낸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 왕자들이 즐비한 로맨틱 코미디를 다 뒤져도 남부럽지 않은 스펙의 주인공이었는데, 이상했다. 7개로 쪼개진 해리성 인격장애 증세 때문만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는 너무 잘났는데 너무 심약하고 자존감이 낮았다.
비밀이 풀린 건 극 중반이었다. 그는 아동학대의 피해자였다. 겉보기엔 멀쩡한 재벌 후계자 아버지는 아들이 제 기대에 못 미칠 때마다 주먹을 들었다. 심지어 아들이 아니라 무고한 의붓딸을 때렸다. 무기력하고도 공포스럽게 폭력을 지켜본 아이는 직접 폭력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의 인격은 산산이 조각났다. 극단의 폭력성을 지닌 신세기가 탄생했고, 자유영혼 페리박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요섭, 못말리는 새침데기 요나, 7살 꼬마 나나가 나왔다. 그 모두가 도현이 지키고 싶었던 자신의, 타인의 어떤 모습이었다. 아동폭력은 영혼을 망가뜨린다 ― 이 섬뜩한 진실에 대한 이만한 은유가 있을까.
'킬미,힐미'의 묘사는 사실과도 상당부분 일치한다. 학자들은 극에서 묘사된 해리성 인격장애(DID), 일명 다중인격이 아동학대와 밀접한 영향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 심리치료사 비버리 엔젤은 '이중인격-지킬 앤 하이드 신드롬'에서 "DID 환자 중 대다수는 예민한 아동발달기(보통 9세 이전)에 극심하고 반복적이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충격을 갖고 있고, 거기에 유전적 해리 성향을 지녔을 수 있다"며 "해리성 장애는 고도의 창의적인 생존 전략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한다"고 썼다. 최근 일부 어린이집의 폭력 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상당하지만, 이런 고통을 안기는 이는 대개 부모다.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2014년 아동학대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적으로 접수된 아동학대 신고 중 실제 혐의가 있다고 판정된 건수는 9823건이었다. 이 가운데 무려 86%가 가정에서 발생했고, 아동학대의 가해자는 82%가 부모였다.
7중인격의 괴물이 된 남자와 정신과의사로 만난 소년소녀가 이 끔찍한 기억에서 어떻게 살아날 것인지 궁금했다. 문제는 제기하고 수습을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됐다. 지난 12일 '킬미,힐미'의 마지막 회에 그 답이 담겼다. 어른이 된 소녀는 어린 자신에게 "언니는 이렇게 예쁘고 잘 지내고 있어…. 너는 더 이상 지하실에 갇혀있던 아이가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 아저씨가 너한테 화를 낸 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면서 "그건, 그 아저씨가 잘못한 거야"라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도현의 아버지가 용서를 구하자 두 사람이 한 말은 더 직접적이다. 도현은 "21년간 병원에 누워있었다고 해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약자인 척, 피해자인 척 하지 마십시오"라고 엄숙하게 말했다. 리진은 한 발 더 나갔다. "우리에게 용서와 이해를 강요하지 마세요." 그래, 일단은 딱 그만큼만. 눈물이 났다. 속이 다 후련했다.
7중 인격이란 판타지 가까운 캐릭터를 내세웠다며, '킬미,힐미'가 당사자에게 심각한 고통이자 끔찍한 생존방법이기도 할 다중인격을 값싼 소재로 써먹을까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 골 때리는 로맨틱코미디인 줄 알았던 '킬미,힐미'는 작심한 고발이자 절절한 치유의 드라마였다. 평일 밤 10시, 프라임시간대에 방송되는 트렌디 드라마가 아동학대라는, 웬만하면 외면하고 싶은 묵직하고도 고통스런 주제를 직시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킬미,힐미'는 한 발을 더 나갔다. 오버하지 않는 사려깊은 묘사, 묵직한 메시지가 가슴을 쳤다. '킬미,힐미' 팬이 모인 한 커뮤니티에서 십시일반 모은 2000만원을 아동학대 피해자들을 위해 써 달라며 기부한 일은 이 드라마가 보는 이들에게 어떤 감흥을 안겼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생존의 방편과도 같았던 인격들과 이별한 남자와 여자가 손을 마주잡은 결말은 따스하고도 행복했다. 도현과 리진이 아닌 지성과 황정음으로 돌아온 두 주인공이 손을 흔들며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랑해요"라 고백한 건 분명 대사가 아니라 두 사람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 말을 똑같이 그들에게, 이 멋진 드라마에게 돌려주고 싶다.
김현록 기자 roky@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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