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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9]《우승의 비결이요?... 훈련 또 훈련이였습니다!》

[길림신문] | 발행시간: 2015.09.01일 07:45
9연변팀 전국우승 50돐 기념 계렬보도 《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 》(9)

-정종섭 축구원로가 들려주는 길림성축구팀의 우승



1965년 길림성축구팀이 전국갑급련맹전에서 우승을 따내던 당시 《특공대》란 별호로 그라운드를 휘저으며 관중석을 열광시켰던 중국조선족축구원로 정종섭선생, 최근 기자가 선생을 찾아 당시 길림성축구팀이 우승했던 《비결》을 묻자 선생은 한참 창밖을 내다보더니 지나가는 말처럼 그냥 한마디 툭 던진다.

《훈련이지요, 훈련. 그때 참 <정신 나게> 했습니다.》

《<정신 나게>요?》

무슨 뜻인지 잘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기자한테 뒤미처 선생이 해석을 달아왔다.

《평시에도 모아산밑에서 정상까지 하루에 서너번씩 뛰여서 올라갔다와야 했습니다. 너무 힘들어 울지 않은 선수가 없을 지경이였지요...》



첫줄(왼쪽으로부터) 한수은(코치),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 주임 료운주, 지운봉(팀주장), 정지승(팀부주장),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 비서, 황택균(연변체육운동위원회 주임), 박만복,

두번째줄(왼쪽으로부터) 리창린(지도), 의사, 리룡운, 최성룡, 류진석, 정종섭, 문승학, 문형덕, 동경춘, 허경수.

세번째줄(왼쪽으로부터) 홍종우, 문학길, 최창국, 박성규, 정동권, 리범룡, 정순도.

네번째줄(왼쪽으로부터) 박장수(키퍼), 김석주, 김윤철, 라산묵(키퍼), 지수길(키퍼), 지청룡, 김정식, 당붕상(한족).

그러고 보니 《정신 나게》 했다는 훈련은 혹독하게 훈련을 했다는, 이른바 《훈련지옥》을 에둘러 표현한 말인데 왜 그무렵 그런 《훈련지옥》을 겪어야 했는지 선생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끈을 풀어서야 리해할수 있었다. 1965년 길림성축구팀의 우승사(史)가 선생의 축구인생과 더불어 륜곽을 드러내는 순간이였다.

1943년 5월 5일,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태여난 정종섭선생은 소학교 3학년이던 1953년, 부모님을 따라 룡정시 덕신향 금곡촌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축구에 심취했던 그는 1956년, 룡정제1중학교에 입학, 이듬해부터 현에서 꾸리는 과외체육학교에 입학하여 공부가 끝나면 매일 축구공과 함께 뒹굴었다. 그때 그의 축구계몽선생은 1950년대 연변축구계의 명장이였던 김문(金文)선생. 눈썰미가 빠르고 축구의식이 좋았던 정종섭선생은 김문선생의 휘하에서 드리블, 슛, 헤딩 등 기초훈련부터 체계적으로 받으며 팀의 공방핵심으로 활약했다.

1957년 연변소년팀에 입단한 선생은 1958년 장춘에서 열린 전 성 소년축구시합에서 연변팀의 대표로 참석하며 1등의 영예를 안아왔는데 그것이 선생의 축구인생에서는 첫 월계관이였다고 한다. 대회 결속 이후 룡정으로 돌아와 연변제1고중(룡정)에 진학한 선생은 룡정현(당시 연길현)청년팀 대표선수로 활약하며 계속 축구기량을 다져나갔다. 그러던 2학년때(1962년 7월)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당시 길림성축구팀이 성소재지 장춘에서 연길로 근거지를 옮겨왔는데 어느 한번 연변주내 축구시합에서 후비력량을 물색하러 나왔던 김사종감독이 룡정현청년팀 대표로 그라운드를 휘저은 정종섭을 단연 지목했던것이다.



1992년 동계훈련에서 찍은 연변오동팀.

《그때 열아홉살이였습니다. 어찌보면 파격적으로 길림성축구팀에 입단했는데 팀에 와보니 나이가 제일 어렸습니다. 그래도 축구가 꿈이라 결심을 내렸지요. 감독의 말을 잘 듣고 선배들을 따라배워 열심히 해보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결심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국이 자연재해로 대식품시기를 겪게 되면서 길림성축구팀의 감독과 선수들도 하나둘 팀을 떠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팀의 감독도 여러번 갈리던 끝에 북경청년팀의 감독으로 있던 박만복선생이 길림성축구팀의 사령탑을 맡게 되였다. 당시 박만복감독의 나이가 28세, 팀의 많은 로대원들이 그보다 이상이다보니 때로는 지휘에 불복종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박감독 역시 팀에 대한 료해가 부족하다보니 체력을 홀시하고 기술만 틀어잡는 실수를 범했다고 한다.

결과 이듬해 길림성축구팀은 무한에서 펼쳐진 전국갑급련맹경기 결승전에서 13등으로 떨어졌다. 화불단행으로 이해 중국축구협회에서는 경기에 참가했던 24개 팀을 앞 순위 12등까지 갑급팀으로 분류하고 나머지 팀은 전부 을급팀으로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결국 연변팀은 을급팀으로 분류되고말았다. 그해 훈련이 제대로 따라못간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감독진이 새로 바뀌면서 내부단결에도 문제가 생겼고 비가 자주 오고 날씨가 무더운 등 남방지역의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데도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그해 13등을 한것도 다행이였습니다. 크게 실망했지요...》



1981년 연변주체육운동학교축구팀.

그해 《8.1》팀과 상해팀이 국제경기 임무로 끝까지 경기를 치르지 못한 까닭에 중국축구협회에서는 이 두팀을 등수에 배렬하지 않고 그냥 갑급팀 자격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사실 그해 길림성축구팀의 순위는 15등이나 다름없었다는 정종섭선생의 해석이다.

《이런 실력을 가지고 다음해에 다시 갑급팀으로 올라올지 의심이 들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선수들도 저와 같은 생각이였지요...》

길림성축구팀이 을급팀으로 내려앉자 비난으로 들끓었다. 길림성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팀을 위탁받아 관리하고있었던 연변체육운동위원회도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다년간 전국축구계에서 강호로 군림해왔던 길림성축구팀이 일약 하위팀으로 추락하자 《축구의 고향 연변》 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것이였다.



1986년 브르네 초청경기에 참가한 연변팀.

길림성축구운동위원회와 연변체육운동위원회에서는 즉시 긴급회의를 열고 실패의 원인을 분석, 팀의 사상교육부터 틀어잡고 선수들이 무조건 감독의 지휘에 복종할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박만복감독을 비롯한 감독진도 기술훈련과 소범위내에서의 배합작전에만 주의를 돌리고 전면적인 신체훈련과 체력훈련을 홀시한 잘못을 반성하고 팀이 전통적으로 고수해왔던 왕성한 체력으로 과감히 맞서 싸우는 특점을 살리는데 나섰다고 한다.

《그해 겨울철 남방훈련에서부터 죽여주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는듯 정종섭선생은 도리머리질을 한다. 당시 훈련할 때 축구공만 해도 100여개씩이나 도맡아 메고 다녔다는 그, 훈련이 끝나 숙사에 돌아오면 모두들 자리에 쓰러지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훈련도중에 까무러친 선수도 여럿이였고 비가 오나 무더우나 언제 한번 훈련을 그만둘 때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비가 올 때면 다른 팀들은 거의 휴식을 했지만 길림성축구팀은 감독들부터 우선 밖에 나가 흠뻑 비를 맞는 등 선수들한테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런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을 거쳐 선수들의 체력이 뚜렷이 향상됐고 그 왕성한 체력을 기초로 자신의 풍격에 맞는 기전술을 련마하고 터득해나갔다.



정종섭선생의 가족사진.

공든 탑이 무너지랴! 이듬해 있은 전국축구을급련맹전에 무려 86개 팀이 참가했는데 동북경기구에서 불패의 성적으로 1등을 따낸 길림성축구팀은 이해 11월 중경에서 있은 결승전에서 준우승으로 갑급팀에 복귀했다. 이에 크게 고무를 받고 신심을 얻은 길림성팀축구팀은 성과에 자만하지 않고 계속 훈련을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1964년말~ 1965년 봄 남방에서 있은 각 갑급팀들 가운데 길림성축구팀이 국가대표팀과 강도면에서나 질적면에서 가장 비슷했다는 통계다. 1962년에 있었던 길림성축구팀의 매주 훈련시간이 14~16시간에 그쳤다면 이해 매주 훈련시간이 적어서 24~30시간이였다고 한다. 어느 한차례 대운동량훈련에서의 활동거리는 1만 4천메터~1만 8천메터에 달했고 그중 고속도달리기가 300차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이해 상해에서 있은 전국축구갑급련맹전에서 길림성팀은 7승 2무 2패로 (총16점) 우승의 월계관을 획득, 전국을 들썽했다. 정종섭 선생은 허경수, 당봉상 등 동료들과 함께 국가팀에 입선되는 영광을 따냈고 박장수, 동경춘, 정지승 등 동료들은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운동건장으로 비준받았다고 한다.



정종섭(뒤줄 오른쪽 첫번째)선생과 축구원로들.

감독의 지휘에 절대 복종하고 훈련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며 팀 상하가 똘똘 뭉쳐야만 좋은 성적을 기할수 있다는 정종섭선생, 그것을 당년의 우승비결로 알고있다는 그는 지금의 연변장백산팀이 어찌보면 그제날 길림성축구팀의 우승 력사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길림성팀도 을급팀에 내려갔다가 다시 복귀해 갑급리그에서 우승을 따냈다면서 연변장백산팀도 지난해 을급팀에 강등했다가 올해는 갑급리그에 《복귀》해 현재까지 1위를 달리고있는데 뭔가 좋은 느낌이 온다고 한다. 이왕과 달리 최근 년간 축구에 대한 상급부문의 관심이 크고 임종현국장을 비롯한 주체육국 해당 책임자들의 밝은 안목과 그에 따른 축구팀의 옳바른 개혁이 계속 추진되는 한 연변축구가 반드시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날이 필연코 돌아올것이라 굳게 믿는다며 연변팀 후배들한테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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