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et] 오늘날 우리가 신라(新羅)의 내물왕(재위: 356~402년)에 알고 있는 것은 왕릉을 제외하면 거의 없지만 다행히도 두 건의 역사 문헌을 통해 그의 삶과 통치에 대해서 일부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전해지는 내물왕 관련 지식은 대부분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통한 것이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도 그가 언급돼 있다.
‘삼국유사’는 1200년대 초 한 승려가 이야기와 신화를 모아 집필한 책이다. BC 100년부터 약 650년까지의 야사와 설화, 신화 등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는 1145년 고려의 학자들이 집필한 정사다. 한반도에 위치하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 삼국에 대한 정확하고 사실적인 기록이다.
▲ 신라의 17대왕인 내물왕(奈勿王)(재위: 356-402)은 사적 제 118호인 경주 내물왕릉에 묻혀있다.
내물왕은 신라 왕권에서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세력을 굳힌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내물왕 이후 서기 935년까지 대부분 경주 김씨가 신라의 왕권을 잇는다. 내물왕 이전에는 김씨, 석씨, 박씨 일가가 신라 초기의 왕권을 놓고 경쟁했다.
‘삼국유사’에는 내물왕에 대해 몇 가지 짤막한 정보를 나열하고 있다. 내물왕은 신라의 17대 왕이며 그의 아버지는 나라에 대한 공로로 각간(角干) 지위를 받은 김말구(金末仇)였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 출신의 휴례부인(休禮夫人)이었다. 왕비인 보반부인(保反夫人)은 신라 초기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년)의 딸이며 자비로운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364년 내물왕은 오늘날 울산과 포항 사이에 있는 토함산(吐含山) 부근에서 왜인들을 물리쳤다. 이들은 일본 고훈 시대(古墳時代)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내물왕은 산비탈에 군인들처럼 보이는 허수아비를 세워놓아 적을 교란시키고 매복시켜둔 전력으로 성공적으로 적을 무찔렀다.
373년에는 수 많았던 백제-신라간 전투에서 백제군을 물리쳤다.
381년 내물왕은 전진(前秦)의 왕 부견(苻堅)에 사절을 보내 교류하고 한자와 청자 등 중국 문물 도입에 힘썼다.
▲ ‘삼국유사(三國遺事)’는 1200년대 초 한 승려가 설화를 모아 집필한 책으로 한국 고대의 왕들에 대한 신화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내물왕 36년(390년)에 왜에서 신라에 사절을 파견했다. 왜와 신라, 백제는 당시 전투 중이었다. 왜의 왕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것을 비난하면서 백제에 대항해 신라와 동맹 맺기를 청했다. 그리고 동맹의 증표로 아들을 한 명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내물왕은 이에 동의하며 당시 열 살이던 셋째 아들 미해(美海)와 신하 박사람(朴娑覽)을 사절로 왜에 보냈다. 미해는 그 곳에 정착해 40살까지 신라에 돌아가지 않았다.
392년 내물왕은 고구려의 19대 왕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재위: 391~413년)과 동맹을 맺었다. 393년 왜의 군대가 신라를 또다시 공격하자 내물왕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이를 물리쳤다. 한편 395년에는 말갈(靺鞨)족의 침입을 물리쳤다.
397년 국가에 흉년이 들자 내물왕은 일 년간 백성들의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이는 내물왕의 여러 치적 중 하나로 기록된다.
오랜 과거의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기록이 자료의 전부다. 궁정 기록과 일화집을 비롯해 모든 사료는 정치적이며 제작된 시기를 반영한다. 따라서 고대 신라 왕들에 대해 우리가 지닌 정보는 후대, 그 중에서도 고려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점들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과 비교해 고대에 인간 수명이 짧았던 점을 미루어 볼 때 내물왕의 재위기간 46년은 상당히 긴 기간이다. 내물왕은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신라 왕릉지대에 묻혀있으며 그의 무덤은 한국의 사적 제118호로 지정됐다. 방문객은 입장료를 내고 왕릉에 입장할 수 있으며 내물왕릉은 오늘날 사실상 쾌적한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레고리 C. 이브츠 코리아넷 기자
번역 김영신 코리아넷 기자
사진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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